30대 직장인 엄모씨는 요즘 퇴근 후 집 앞 편의점에서 수제맥주(크래프트 맥주)를 사는 게 낙이다. 잠들기 전 영화를 보면서 수제맥주 한 캔을 ‘혼술’하면 피로가 씻겨나간다. 회식에서 꾸역꾸역 마셔야 하는 게 맥주인 줄 알았던 엄씨는 2년 전 여자친구와 데이트로 수제맥주 펍에 간 이후로 수제맥주 맛에 눈을 떴다. 수제맥주를 집 앞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점도 엄씨의 수제맥주 사랑에 한몫했다. 예전에는 편의점에 ‘카스’와 ‘하이트’ ‘칭다오’ 정도 있었지만 점점 ‘곰표 밀맥주’ ‘제주 위트 에일’ ‘진라거’ ‘크라운 맥주’ 등 수제맥주가 늘면서 고르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대학교 4학년인 권모양은 대형마트를 가면 와인 코너에 들려 1만원대 와인을 몇 병 산다. ‘비싼 술’이라는 인식이 있어 예전에는 마실 엄두가 안 났지만 요즘은 마트에서 4900원부터 1만~3만원대의 와인이 즐비해서 부담이 적다. 권양은 “와인은 맛도 있을뿐더러 고급술을 마신다는 느낌까지 들어서 분위기 내기에도 딱”이라며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마신 와인을 찍어 올리는 친구도 많다”고 말했다.

회식에서나 볼 법한 천편일률적인 소주와 기성 맥주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지난 2년간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사태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 문화를 만들어 냈다. 지난해 7월 롯데멤버스 설문에 따르면 팬데믹 이전에 집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비중은 각각 40.2%, 31%였다. 팬데믹 이후에는 각각 83.6%와 6.7%로 차이가 현저히 벌어졌다. 유흥 시장이 타격을 입으면서, 자연스레 소주와 기성 맥주 판매가 줄었고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를 중심으로 다양한 취향에 따른 와인과 수제맥주, 위스키, 프리미엄 소주, 논알코올(비알코올) 맥주 등 수요가 늘었다. 비싼 술이라도 술집보다 싼값에 마실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유통업체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결과, 유흥 시장 대신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주요 주류 구매 창구로 급부상했다. 이마트 등 대형마트는 와인 코너를 확장했고 주요 편의점은 앞다퉈 수제맥주를 입점시켰다. 편의점 위스키 코너는 미니 바를 연상시킬 정도다. 

취향이 다양해지고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개성 있는 술 소비는 하나의 문화가 됐다. MZ 세대는 이제 집뿐만 아니라 캠핑장·호텔·파티룸에서 와인과 수제맥주, 위스키를 즐긴다. 그리고 이를 소셜미디어(SNS)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각자의 취향을 전파한다. 2030 세대의 술 문화를 접한 4050 세대도 점차 소주·맥주 조합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이 커버 스토리로 ‘酒(술) 소비 개성시대’를 기획한 배경이다.


주류대상 출품 맥주 15종→126종

2014년부터 매년 조선비즈가 주최하는 ‘대한민국 주류대상’ 역시 술 소비의 개성시대를 보여준다. 출품된 맥주는 2014년 15종에서 2022년 126종, 와인의 경우 같은 기간 144종에서 434종으로 급증했다. 

과거 ‘상류층 술’로 여겨지던 와인은 홈술족이 늘고, 수입 주류업계를 옥죄던 일부 규제가 풀리면서 소주, 맥주만큼 대중화됐다. 국내 와인 수입량은 지난해 처음으로 7만t, 5억5980만달러(약 7230억원·관세청 집계 기준)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국내 와인 시장 규모는 2021년 1조5000억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바탕으로 와인은 맥주를 밀어내고 국내 수입주류 1위 자리를 지난해까지 2년 연속 꿰찼다. 와인 가격이 많이 저렴해지면서 와인 주 소비층에 MZ 세대가 대거 유입된 점도 와인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이마트가 2019년 선보인 4900원 와인 ‘도스코파스(DOS COPAS)’는 출시 4개월 만에 1년치 초도물량 100만 병을 완판했다. 이후 대형마트들은 1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의 와인을 경쟁적으로 출시했다. 용량이 소주보다 많으니 와인이 순식간에 ‘가성비 술’이 된 셈이다. 반대로 ‘프리미엄 와인’ 수요도 늘고 있다. 와인 마니아는 국가별 최고급 와인, 비건, 내추럴, 유기농 등 일반 와인 숍에서 만나기 어려운 와인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에 6월 14일 호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는 프리미엄 와인 1400여 종을 보유한 ‘부티크 와인샵’을 열기도 했다.

수제맥주도 위상을 뽐내고 있다. 양조장 세븐브로이와 곰표가 컬래버(협업)해 2020년 5월 출시한 ‘곰표 밀맥주’는 출시 후 편의점에서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수제맥주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이 밖에 ‘첫사랑 IPA’의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제주 위트 에일’의 제주맥주, ‘경복궁’의 카브루, ‘광화문’의 ARK 등 여러 국내 수제맥주 업체가 소비자 입맛을 다채롭게 해주고 있다. 흥행을 기반으로 제주맥주는 IPO(기업공개)를 마치기도 했다. 수제맥주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홈술과 더불어 홈 파티 문화가 정착되면서 술의 향과 맛을 놀이처럼 즐기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수제맥주와 ‘푸드 페어링(Food Pairing⋅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의 조합)’이 개성 있는 술 소비문화를 이끌고 있다. 페어링은 원래 와인을 즐기는 문화에서 사용됐는데, 수제맥주 시장도 개성을 찾고 고급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남대문 위스키 상가 MZ 세대 북적

위스키 수요도 증가했다. 과거 유흥업소에서나 마시던 ‘아저씨 술’로 인식되던 위스키 시장은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MZ 세대가 ‘고급술’에 꽂히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위스키 수입액은 1억7534만달러(약 2115억원)로 집계됐다. 2020년 대비 32.4% 증가한 수치로, 2000

년대 중반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이던 국내 위스키 시장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위스키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남대문 주류상가에는 MZ 세대가 꽉 차 있다. 

MZ 세대는 프리미엄 소주를 위해서라면 오픈런도 강행한다. 지난 2월 수천 명이 원스피리츠의 ‘원소주(WON SOJU)’를 사기 위해 서울 여의도동에 있는 더현대서울에 몰렸다. 이 소주는 힙합 가수 박재범이 만들어 화제가 됐다. 참이슬보다 7배 비싸지만(1만4900원), 원소주 2만 병은 이날 순식간에 완판됐다. 5월 31일 부산에서 열린 원소주 팝업 스토어에서도 3만 병이 모두 팔렸다.


plus point

Interview 명용진 이마트 주류 바이어
“코로나19 이후 홈술 늘자 와인이 이마트 주류 매출 1위로 우뚝”

사진 이마트
사진 이마트

코로나19로 홈술족이 늘면서 대형마트는 주류 마니아의 성지가 됐다. 상품이 다양하고 가격이 합리적인 점이 고객을 꾸준히 끌고 있는 것. 그중 이마트는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와인 매출 1500억원(국내 와인 소매 매출의 15%)을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주류 유통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코노미조선’은 6월 9일 명용진 이마트 주류 바이어에게 서면으로 대형마트에서 본 술 소비 변화를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이마트 주류 판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코로나19 이후 음주문화가 가정 내로 들어오면서 2020년부터 대형마트 주류 매출 순위가 바뀌었다(2021년 와인 매출 전년 대비 신장률 22%). 매출 1위가 국산 맥주에서 와인으로 처음 바뀌었고, 이 기조는 코로나19 3년 차인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또한 위스키 등 양주 수요가 작년부터 크게 늘면서 올해(1~5월) 기준 양주 매출이 수입 맥주보다 높게 나타났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양주 구매를 위해 면세점 대신 마트를 찾은 것이다. 바·레스토랑 가격 대비 대형마트 양주 가격이 저렴한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2021년과 2022년(1~5월) 전년 동기 대비 양주의 매출 신장률은 각각 45.7%, 22.8%였다. 아울러 홈술이 잦아지면서 국산 수제맥주를 찾는 고객도 늘었다. 고객들이 다양한 향과 맛의 주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2021년과 2022년(1~5월) 전년 동기 대비 수제맥주의 매출 증가율은 각각 37.4%, 26.9%였다.”

그렇다면 이마트 주류 매장에도 변화가 있는가.
“소주, 맥주 대비 종류가 다양한 와인, 위스키를 중심으로 전문점 형태의 매장을 꾸린 ‘와인앤리큐어’ 매장을 계속 늘리고 있다. 현재 전국 30여 개 이마트에서 이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리뉴얼 매장에는 와인앤리큐어가 필수로 입점될 정도다.”

앞으로도 주류 고객을 잡기 위한 이마트의 전략은.
“최대한 다양한 와인을 선보이기 위해 기존 메이저 수입사 중심 바잉에서 중소 규모 수입사로 콘택트 범위를 확장했다. 기존 4~5곳 위주였다면 최대 20여 곳으로 대폭 늘렸다. 연중 최대 와인 행사인 와인 장터에서는 운용 품목을 계속 확대해 올해 최대 1600여 개 와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올해 3월부터는 ‘이달의 와인’ 행사를 시작했다. 매월 테마에 맞는 와인을 선정해 고품질 와인을 저렴하게 제공하며, 와인 기본 정보와 간략한 코멘트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작년부터는 ‘RTD(Ready to Drink)’ 상품도 새롭게 운용하고 있다. RTD는 보드카나 럼 등 양주에 탄산음료나 주스를 섞거나 맥주, 탄산수 등에 다양한 향미를 첨가한 주류다. 상대적으로 도수가 낮고 맛에 부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바뀐 술 소비문화로 안주 품목에도 변화가 있는가.
“와인, 위스키를 찾는 고객이 늘면서 안주도 다양해졌다. 소주, 맥주 안주가 스낵류, 건조 어포, 견과류 라면, 와인과 위스키 안주로는 치즈와 가공육이 인기다. 와인앤리큐어 매장에서도 일부 공간을 할애해 다양한 수입 치즈와 샤퀴테리(하몽·프로슈토 등 염장·훈연·건조 과정을 거친 육가공품)를 판매한다.”

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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