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취업자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월말 현재 20대 취업자 수는 21년 만에 처음으로 300만 명대(399만2000명)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청년실업률이 20%에 육박, 100만 청년실업자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 경기불황 탓만 하면서 세월을 보낼 것인가. <이코노미플러스>는 20대의 파릇파릇한 나이에도 직원을 거느리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청년 사장 5명을 찾았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가정의 보통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도전정신과 실행능력은 남달랐다. 이들은 창업하다보면 으레 겪는 많은 시련도 거뜬히 이겨내 비록 작지만 그래도 청년실업자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의 달콤한 성공을 맛봤다. 이들은 점차 위축되어만 가는 청년 실업자들에게 말한다. “20대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용기 있는 도전정신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드러내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작지만 달콤한 성공 일군 청년창업자 5명 이야기

장정윤 꼬지필 사장

110만원 짜리 리어카 노점상에서 매출 50억원의 기업으로 탈바꿈

“대학교 1학년 때였어요. 어학연수가 몹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께서 친구 보증을 섰다가 잘못 돼 집안이 어려웠어요. 내가 직접 버는 수밖에 없었죠. 단기간에 큰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르바이트로는 성이 안차고 해서 장사 밖에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노점을 시작했어요.”

지난해 가맹점 100개, 매출액 50억원을 기록한 꼬지필(COF) 장정윤(29) 사장의 10년 전 회상이다. 그녀는 대학교 1학년이던 1997년 휴학계를 제출하고 부산에서 노점상으로 나섰다. 1000원짜리 값싼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반짝 장사가 노점상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 때였다. 그녀는 사업 아이템으로 닭꼬치를 선택했다.

“그 때도 닭꼬치 노점상이 있었어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 있더라고요. 그래서 적어도 실패는 안 할 것 같아 시작했죠.”

그녀의 초기 밑천은 110만원짜리 리어카와 50만원짜리 오븐 등 장비를 비롯해 재료 구입비까지 모두 합쳐 300만원. 돈은 어머니께 빌렸다.

그녀는 다른 노점상보다 특별한 닭꼬치를 만들기로 했다. 먼저 뼈를 모두 발라내고 살코기만을 꿴 닭꼬치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뼈 없는 닭꼬치는 거의 없었다. 또 먹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살코기를 꿴 꼬치를 빼고 은박지에 싸서 주었다. 긴 꼬치가 먹는데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맛은 손님들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손님들이 사먹으면서 뭘 더 넣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걸 더 넣었죠. 입맛을 맞추기 위해 여러 종류의 양념장을 만들었어요. 순살 닭꼬치나 양념에 커피나 양파즙을 넣으면 비린내가 없어진다는 것도 모두 손님들이 말해 준 거예요.”

어려움이 없을 리가 없다. 노점상 단속을 피해야 하고, 인근 가게의 점주들과도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매일같이 떡볶이 아줌마와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점상은 성공적이었다. 그녀가 선보인 1000원짜리 닭꼬치는 하루 1000개씩 팔려 나갔다. 한 달 매출이 3000만원에 육박할 때도 있었다. 순수익은 1000만원에 이르렀다.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그녀는 3600만원이란 거금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동안 꿈이었던 5개월간의 영국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맡긴 노점이 거의 망한 상태였다. 다시 그녀가 나섰다. 매출이 다시 오르며 자리를 잡기 시작해 아예 가게를 냈다.

“갑자기 노점 옆에 30평짜리 치킨집이 생긴 거예요. 도저히 리어카로는 경쟁이 안 될 것 같아서 모험을 했어요. 사채 3000만원을 빌려 4평짜리 가게를 마련했어요. 다들 미쳤다고 했죠.”

그녀는 콜라를 무료로 무제한 제공하는 등 다양한 마케팅을 펼쳤다. 하루 매출 100만원이 넘으면서 장사가 번창하자 직영점을 4개까지 늘렸다.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 것이 그 즈음이었다. 2001년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자는 사람들과 동업을 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프랜차이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큰돈을 벌려는 욕심에 무리한 투자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땐 너무 어려서 진짜 아무 것도 몰랐어요. 거의 사기를 당하다시피 했죠. 그 때 날린 돈만 해도 5억원이나 됐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4평짜리 가게에서 시작했어요.”

2003년에는 드디어 서울로 진출했다. 부산보다는 서울에서 더욱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그를 지켜본 교수님이 2억원을 선뜻 투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두 번째 위기를 맞아야만 했다.

“가게를 오픈 하는 날이 조류독감이 퍼진 날이었어요. 치킨집을 하던 사람들이 자살할 정도로 조류독감은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저도 이제 끝났구나 싶었죠.”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팔아 거래처 대금 및 직원들의 월급을 주고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기 매매상과 수술 날짜까지 잡았다. 하지만 밑바닥에 떨어지자 희망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4개월 정도를 버티자 ‘조류독감’ 영향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면서 서서히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윽고 그녀는 어려움을 딛고 2004년 서울 목동점을 시작으로 직영점과 가맹점을 열기 시작해 현재 100여 개의 가맹점을 보유하게 됐다.

그녀는 경쟁사들이 생기고 가맹점이 늘어나자 부산에 닭꼬치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그의 닭꼬치는 부산 및 경기도, 김포 생산(제조??)공장과 물류창고에서 닭고기를 삶고 꼬치를 끼우는 1차 가공을 마친 상태로 가맹점으로 배송된다. 꼬치 맛을 결정짓는 소스는 대기업인 롯데에 아웃소싱해 완제품 상태로 공급하고 있다.

사실 완제품을 공급하는 것은 위생이나 안전성 문제도 있지만 해외시장 공략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녀는 꼬지필을 한국에서 성공시키고, 더 나아가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뻗어나가 세계적 브랜드로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싱가포르에 해외 지사 1호점이 조만간 오픈 할 예정이다. 중국과 태국에도 지점을 내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답 대신 ‘꿈을 이루는 앨범’이라는 제목의 자신의 노트를 보여줬다. 그녀는 노트에 돈을 버는 3가지 이유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최고의 회사 만들기, 자연보호와 동물 구조’라고 적어 두고 있었다. 그녀는 37세에 유능한 사업가가 되고 52세에는 지구 정화를 위해 환경운동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월급 250만원에, 회사 지분 70%를 소유한 그녀는 아직 성공했다고 하기는 이르다고 자평한다. 꼬지필을 맥도날드와 같은 세계적인 시스템 체인으로 키워 나가는 게 그녀의 꿈이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야심에 찬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성공이요?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어요.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은 너무 빨리 포기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박문성 세라온 사장

소니, 삼성 등 대기업들이 우리 고객이죠

박문성 세라텍 사장(29)은 올해로 창업 6년차 20대 CEO다. 박 사장은 휴대전화 액정 보호 필름과 패션 문신 스티커를 판매하고 있다. 액정 보호 필름은 휴대전화나 PDA, PMP, PSP 등의 액정을 보호하는 필름으로 거울이나 엿보기 방지 기능이 있는 것도 있다. 그는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액정 보호 필름을 자체 개발하고 단가를 3분의 1로 낮춰 시장을 단번에 선점했다.

소니코리아와 삼성정보통신 등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지난해 4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바른손 등 문구용품 업체와 미니스톱, 바이더웨이 등 편의점과도 계약을 체결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는 7억원.

“인터넷에서 소문나면서 인기 상품이 됐어요.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했다는 것은 제 제품의 품질이 인정받았다는 얘기죠.”

박 사장은 2002년 군 제대 후 대학생 신분으로 단돈 70만원을 갖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패션 문신 스티커’였다. 외국 잡지를 보다 우연히 발견한 아이템이었다. 당시 외국에서는 패션 문신 스티커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국내에는 상륙하기 전이었다.

“경험 삼아 장사를 시작했어요. 취직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월드컵 때라서 문신 스티커가 잘 팔릴 것 같았어요. 간단히 문신을 새기고, 지우기도 쉬운 즉석 문신을 개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리지 않고 붙인다는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습니다.”

디자인과 재료 구입, 인쇄, 유통 등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짜보니 200만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진 돈은 70만원. 그는 70만원을 200만원으로 불리기 위해 월드컵을 겨냥해 월드컵 스케줄 달력이 그려진 마우스패드를 먼저 만들었다. 마우스패드는 제법 팔려나가 애초에 목표로 했던 200만원에 못 미치는 170만원이라는 자금이 모였다.

사업 자금을 마련한 그는 값싸면서 품질 좋은 제조업체를 찾아 나섰다.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업이었다.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문신 스티커를 만들어줄 업체를 찾았다. 디자인은 박 사장이 직접 했다.

문신 스티커가 만들어지자 그는 홍보와 판매에 들어갔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팔리지 않았다. 여기에다 다른 업체가 문신 스티커를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누가 잘 파느냐가 관건이었다.

백화점과 남대문 등의 상가를 찾아다녔지만 반응은 별로였다. 매장에 넣은 제품도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문신 스티커를 방송국에 무료로 보냈어요. 유명 연예인 중 한 명이라도 붙이고 나온다면 크게 홍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예상대로 한 기상캐스터가 문신 스티커를 얼굴에 붙이고 나왔습니다.”

방송이 나간 다음날부터 문신 스티커는 대유행을 타기 시작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제품을 모두 팔아 1억원을 벌었다. 170만원을 들여 열흘 만에 1억원 수익을 남겼으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는 월드컵 특수에 자신감을 얻어 사업을 확대했다. 여름 해변을 공략하기 위해 번 돈 1억원을 모두 투자해 100만 장의 스티커를 만들었다. 하지만 주말마다 비가 오면서 제품은 팔리지 않았다. 더욱이 제조를 서두르면서 품질도 떨어져 소비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다음해에는 편의점을 판매망으로 뚫어 2000여만원의 순수입을 올리긴 했지만 재빨리 다음 사업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문신은 여름 한철용 제품인 데다 경쟁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기 때문. 1년 내내 팔 수 있는 아이템을 찾던 그는 일본에서 100% 수입하던 액정 보호 필름을 국산화하기 위해 제품 개발에 나섰다.

“2004년 초까지 국내에는 휴대전화 화면이 꺼지면 거울이 되는 ‘매직미러’라는 일제 제품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7000원이라는 굉장히 비싼 가격이었죠.”

그는 일본산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가격’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품질은 같은 수준이지만 장당 7000~8000원짜리 일본 제품보다 훨씬 저렴한 2000~3000원짜리 액정 보호 필름을 내놨다. 이 역시 발품을 팔며 제조업체를 찾아다닌 결과였다. 그의 제품으로 인해 일본 제품 가격이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박 사장의 성공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틈새시장 공략에 있다. 휴대용 디지털 기기는 누구나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정도인 데다 액정이 커지면서 보호 필름에 대한 수요가 늘 것이라는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인터넷을 활용한 마케팅도 유효했다. 네티즌들은 어떤 제품이 좋은지 비교하고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의 제품이 네티즌들을 사로잡기 시작하자 입소문은 금방 퍼졌다. 2005년부터는 소니코리아, 삼성정보통신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아이리버, 아메리카 등에서도 제품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액정 보호 필름에서는 선진국인 일본에서도 수입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대학생이다 보니 어려운 점도 많다. 그의 말대로 초보일 때는 용산 등 업체에 납품할 때 제값을 못 받고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수금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아 100만~200만원씩 못 받은 곳도 꽤 됐다. 판매처를 확보해 놓지 않고 무작정 제품만 개발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행착오가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요즘 경쟁사들이 생기면서 위기감을 느껴요. 후발업체들이 늘어나고 가격 경쟁도 치열하기 때문이죠. 디자인과 기능 등을 강화한 신제품으로 계속 차별화해 나갈 겁니다. 전자파 차단이나 노트북 스크래치 방지 등의 제품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칠 계획입니다.”

박 사장은 아직 동국대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대학생활만 7년째지만 앞으로 2년을 더 ‘늦깎이’ 대학생으로 있을 생각이다. 사업과 공부를 병행하기도 쉽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고 한다. 그는 발명 장학생 1, 2, 3등급을 수상했고, 특허청장상을 4번이나 수상했다. 동국대 창업경진대회 우수상, 한국컴퓨터정보학회장상 외 다수 수상 경력이 있다.

윤미 윰 사장

자취방의 PC 한 대로 시작 연매출만 30억원 달해

“연봉으로 치면 2억원 정도 되죠. 이만한 돈을 벌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소호 몰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여성의류 전문 쇼핑몰 윰(www.yoom.co.kr)의 윤미(28) 사장은 월 2억~3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제는 연 매출 30억원대의 어엿한 사장이지만 처음부터 창업이 목표는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웹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 땐 지금처럼 인터넷 쇼핑이 활발하지 않을 때였지만 시간도 아끼고 저렴한 옷을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을 자주 이용했어요. 하지만 방문하는 인터넷 쇼핑몰이 너무 못생겼더라고요.”

웹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인터넷 쇼핑몰은 너무 초라한 수준이었다는 것. 그는 전공을 살려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자신이 직접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올린 쇼핑몰을 2004년 오픈 했다. 초기 창업비용은 700여만원. 자취방에 PC 한 대를 달랑 둔 것이 전부였다.

“오프라인 가게를 내야 했다면 돈이 없어서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이라는 게 홈페이지를 꾸미는데 돈이 많이 드는데 그건 직접 했으니까 그 외에는 돈 들 일이 별로 없었죠.”

처음에는 투잡스(two jobs)로 일하다 주문이 늘어나고 새벽에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적절한 옷을 구입해야 하는 등 일이 많아지자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쇼핑몰 사업에 전념했다. 하지만 오픈 당시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 되지 않았을 뿐더러 소비자들도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에 불안해했을 때였죠. 저도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환불하기 일쑤였으니까요.”

하지만 홈페이지 디자인이 다른 곳보다 독특해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면서 방문이 늘어 쇼핑몰을 오픈 한 겨울부터 실질적인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아이템 선정에 특히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패하는 인터넷 쇼핑몰 창업자들이 가장 쉽게 지나치는 부분이다. 인터넷 쇼핑몰의 경우 아이템 선정에서 승부가 갈린다.

“그 당시 인터넷 쇼핑몰들은 대부분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디자인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오히려 일반적인 직장인이 필요로 하는 디자인은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여기에 착안했죠.”

윤 대표는 안 팔리면 ‘내가 입지’라는 생각으로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컬러와 디자인 중심의 옷을 아이템으로 선정했다. 타 쇼핑몰에서는 너무 평범하고, 보편적이라서 고르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직장인들은 필요한 게 있지만 사러 나갈 시간이 없어 인터넷을 뒤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실용적인 옷을 구비했어요.”

자신이 고른 옷을 직접 입은 사진을 올린 것도 윤 사장이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고르거나 의뢰한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어 판매한 또 다른 도전도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인터넷 쇼핑몰들이 싸게 제품을 공급받아 저가로 파는데 주력하고 있었죠. 저가로만 경쟁해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전 1년에 몇 번 정도는 직접 디자인하거나, 유명 제품의 디자인을 참고해 좀 비싸지만 좋은 제품을 내놨어요.”

그의 차별화 전략은 계속 이어졌다. 다른 쇼핑몰들에 비슷한 제품이 나오면 아이템에서 바로 빼버렸다. 대형 쇼핑몰들이 저가 공세를 펼칠 때에도 윤 대표는 높은 가격을 고수했다. 마케팅을 따로 한 적은 없었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단골도 생겼다.

윰은 지난 2005년에 월 1억원의 매출을 올리더니, 지난해부터는 월 2~3억원으로 매출이 껑충 뛰었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 되면서 윤 대표의 고민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요즘은 너도 나도 인터넷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어요. 가격 경쟁을 하다가는 다 같이 망하게 된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죠. 또 인터넷 트렌드가 빨리 변하면서 앞서 가야 한다는 강박감도 크고요.”

윤 대표는 “인터넷 쇼핑몰로 성공한 사례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인터넷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고 있지만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일단 시작하기로 결심했다면 쇼핑몰에 올인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이빛 이빛에듀 사장

통.번역사에서 10억대 연봉의 어엿한 학원 대표로 변신

전문어학교육기관인 이빛에듀파크와 교육 컨설팅 회사인 트리플에이치 박이빛(27) 대표이사의 연봉은 거의 10억원에 이른다. 그가 처음 영어전문학원을 설립한 것은 2002년.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하다 잠시 귀국해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영어 강사였다. 처음에는 통역과 번역 일에 뛰어들었지만 수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2000년 한국에서 책값과 학비를 벌어서 대학원을 갈 생각으로 잠시 강의를 했었죠. 그런데, 강의를 한 첫 날부터 너무 파격적인 인기를 끌었고, 단 한 달 만에 200명의 팬클럽이 만들어질 정도였어요. 지금은 팬클럽 회원이 1500명 정도돼요.”

자신이 영어를 익힌 방식으로 가르치다 보니 수강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영어를 가르치기 보다는 영어를 익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6개월 정도 입시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하다 입소문이 나서면 2~3개 학원에서 억대 연봉 강사로 자리를 잡고는 그냥 눌러 앉게 됐다. 그는 결국 영국 런던대를 이수하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나머지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2000년부터 한 2년 동안 인기를 누리면서 제 이름으로 된 학원을 내도되겠다 싶더군요. 여러 학원을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하기 보다는 한 자리에 정착하기로 결심을 했어요. 강의 들은 학생들의 요구도 많았어요.”

일반적으로 학원을 설립하면 가장 큰 문제가 학생 모집이지만 박 대표의 경우에는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요구로 설립된 것이다. 그가 서울 신림동에 학원을 내자마자 6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영어 전문 강사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은 2004년 한국교육방송(EBS)에서 영어 강의를 한 덕분이었다. TV에 얼굴을 내밀자 학생들은 더욱 많이 몰려들었다. 이후 그는 도곡, 청담, 역삼 등 서울 강남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지난해에는 목동에도 학원을 설립해 4개 학원을 통해 12억원을 벌었다.

그는 돈을 벌자 원 없이 책을 샀다고 한다. 강의를 시작한 게 그 때문이었던 것. 어느 날은 책이 너무 많아 잠 잘 공간이 부족해 200권에 이르는 책을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최근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다. 영어학원에서 교육 컨설팅으로 눈을 돌리고 최근 트리플에이치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방송을 할 때 알던 영어 강사 4명과 의기투합했다. 이제는 학원 위주의 사업으로는 더 이상 돈 벌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PC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영어 공부가 가능하게 됐잖아요. 이제는 콘텐츠가 돈이 될 겁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먼저 사업에 착수하게 됐어요. 이미 해외의 유수기업과 제휴해 영어 관련 콘텐츠를 제공받기로 했어요.”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억대 영어 강사라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를 속이려고 할 때였다고 한다.

“그동안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특히 젊은 여성이다 보니 저를 속이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나를) 원장으로만 앉혀 놓고, 돈은 자신들이 관리를 하겠다는 등 별별 유혹이 있었죠. 돈을 따라 그런 유혹에 넘어갔다면 오히려 실패했겠죠.”

박 대표가 영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영국에서 전학 온 친구 집에 갔다가 그의 가족들이 외국인들과 불편 없이 지내는 것을 보고 그도 영어 배우기에 뛰어들었다.

“친구네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게 됐어요.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독일어를 했고요. 외국어고등학교 때는 일본어를, 대학 때는 서반아어를 제 2외국어로 공부했죠. 어쩌면 초등학교 때 친구 덕분에 외국어에 상당한 취미를 가지게 됐던 게 제 일생의 큰 방향을 정해준거 같습니다.”

그는 외고 졸업 후 외국 유학을 꿈꾸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지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외국의 많은 대학을 저울질하다 영국의 런던대를 찍었다. 선생님이나 유학원을 거치지 않고 런던대에 직접 전화를 걸어 교과과정 등을 알아보고, 입시요강을 요청했다. 토플 성적과 필요한 서류를 보낸 몇 주 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영국으로 갔어요. 학비는 부모님께서 일부 도와주시기도 했지만 번역이나 통역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어요. 책 값 때문에 사흘을 굶고 공부하던 때도 있었어요. 학비 문제 등으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의 꿈은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좋은 콘텐츠로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이성은 코비스 사장

스프링 골프티로 20억원 벌어 골프용품 업게에서 새바람 '기대'

“이제는 눈을 세계로 돌려야죠. 티 하나로 세계시장을 제패할 겁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골프용품 업체로 성장하는 게 꿈입니다.”

골프 티(Tee) 하나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골프용품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코비스 스포츠의 이성은(28) 대표. 이 대표는 단지 공을 올려놓는 골프 티에 비거리를 늘리고, 타수를 줄이는 기능을 더한 주인공이다.

일반적으로 티는 잘 부러지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소모품이다. 코비스의 대표 상품은 특수 스프링으로 저항을 최소화시킨 VS(Vital Spring)티. 30만 번의 충격 테스트를 거쳤고 피로 테스트도 10만 회 이상 버텨 잘 부러지지 않는다.

사실 이 골프 티는 이 대표가 아닌, 골프 실력이 싱글 수준인 아버지의 작품이다. 스프링 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이 대표의 부친은 나무 티가 잘 부러지는 단점을 없애기 위해 복원력이 뛰어난 스프링이 들어간 티를 직접 만들었다.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소비자인간발달학)에 재학 중이던 이 대표는 “아버지가 만든 골프 티를 보는 순간 ‘이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학 2학년 때부터 배운 골프 덕분에 골프 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30년간 스프링 제조업을 한 경험을 살려 골프 티에 스프링을 접목한 것을 딸이 상품화한 것이다.

“대학교 방학 때면 빠짐없이 아버지 공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배웠어요. 졸업할 즈음에는 취업보다는 창업에 관심을 두고 관련 강좌를 듣기도 했죠. 아버지가 만든 골프 티를 보고 해볼 만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어요.”

먼저 시장과 경쟁사를 분석했다. 골프 티 시장은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산 기능성 티가 있었지만, 스프링이 들어간 골프 티는 어느 누구도 만들지 않았다. 골프 인구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여서 확실한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에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국내외 골프용품 시장에서 경쟁사의 제품을 분석했는데 골프용품 중에서 가장 눈 여겨 보지 않는 골프 티에 성공 가능성이 보이더라고요. 틈새시장을 확실히 공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어요.”

2002년 10월 법인을 설립하고,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등에 특허를 신청했다. 그리고 여성 창업자금도 신청했다. 스프링 등 핵심 부품은 아버지 회사로부터 공급받기로 협약을 맺었다. 제품화가 완료되자 이 씨는 기획, 마케팅, 영업, 배달을 혼자서 했다. 판로를 뚫기 위해 백화점과 골프장의 용품매장으로 동분서주했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다.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다며 퇴짜 놓기가 일쑤였다.

“아이디어 상품이라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골프용품 바이어를 만나면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거절하더라고요. 그래도 서럽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한 백화점 바이어가 관심을 가지고 입점을 시켜주더군요.”

고급화 전략을 내세워 백화점 입점에 성공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

“물건은 팔리기 시작하는데 돈 받기가 어려웠어요. 매달 말이면 판매 금액을 결제해달라고 전화하는 게 스트레스였죠. 돈을 받으러가서 몇 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었어요. 사업 초보에다 여자라서 더 깔본 것 같았어요.”

여기에다 예기치 않았던 위기도 닥쳤다. 티 재질인 PVC가 겨울에 기온이 내려가면서 골프채에 맞아 깨져 버린 것이었다. 재질의 강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제품과 기업 신뢰도에 먹칠할 순간이었죠. 그래서 수억원의 손실을 감수하고 과감히 전량 회수해 폐기처분했어요. 그리곤 골프채로 때려도 잘 깨지지 않는 우레탄으로 재질을 바꿨어요. 안심이 안 돼 수십만 번의 충격 테스트와 인장 테스트도 거쳤죠.”

또 스스로 자초한 다른 위기도 있었다. 제품을 다양화한답시고 골프 장갑에 손댔다가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이 대표는 골프 장갑 실패 후 골프 티와 함께 구색을 갖출 수 있도록 새로운 마케팅 개념을 접합시켰다. 처음에는 티 하나만을 팔다가 길이가 다른 2개의 티를 묶거나, 보수기, 마커 등 세트 상품을 출시했다. 또 티의 헤드 부분 내부가 보이는 누드 디자인 등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소비자의 니즈를 맞추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지역총판을 개설하면서 국내 유통망도 대폭 확대했다.

2005년 1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엔 두 배로 늘어 21억원을 기록했고, 2004년 3명에 불과하던 직원도 12명으로 늘어났다. 지금 세 들어 사는 사무실 옆에는 4층짜리 사옥도 짓고 있다. 창업 당시 골프 티 시장을 장악하던 일본 제품은 이제 코비스에 밀려 국내에서 사라졌다.

올해 매출 목표는 50억원. 지난해보다 2배 이상 성장하겠다는 야심에 찬 포부다. 젊은 이 대표는 올해부터 해외시장 공략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계획이다. 코비스가 지난해까지 해외 골프박람회에 참가한 회수는 25회. 매년 3~4회 참가한 꼴이다. 미국 골프용품쇼에 출품해 독특한 아이디어로 테일러메이드 등 서너 개 대형 업체들과 수출 상담을 벌여 해외 20여 개국에 수출하지만 해외 매출액은 6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전시회에 참가하는 정도로의 막연한 시장 공략은 해답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 대표의 판단이다.

“전시회 참가를 통해 기반은 어느 정도 다졌지만 시장을 확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무래도 코비스라는 브랜드가 아직 해외에서 유명하지 않아서죠. 지난 1~2년 동안 미국과 일본에 현지 파트너를 물색해 최근 업체를 선정했습니다.”

더욱 정확한 해외시장 조사를 위해 코트라(KOTRA)에 현지 시장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세심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세리나 박지은 등 LPGA에서 활약하는 한국 프로골퍼들이 많잖아요. 그들처럼 언젠가 골프용품 업계에서 한국 바람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장시형 기자 / 사진 : 홍승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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