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든 터진다’는 뜻의 애니콜(Anycall). 꺼져가던 불씨나 같았던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사업을 살려낸 것은 물론 삼성전자를 일약 세계적인 기업으로 알리는 데 일조한 브랜드다. 그 가치만 50억달러(4조5000억원, 삼성그룹 추산)가 넘는다. 때문에 애니콜의 성공 사례는 세계 유수의 MBA에서 케이스 스터디가 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애니콜 브랜드 창안자는 그동안 미스터리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마저 한때 애니콜 브랜드 창안자를 찾으려 애썼지만 헛수고만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코노미플러스>가 애니콜 브랜드의 창안자를 14년 만에 찾아냈다. 오정환(61) 르노삼성자동차 고문(당시 삼성전자C&C 사업부장(상무))이 바로 그다. 그는 아울러 1993년 프랑크푸르트회의 때 이건희 회장에게 3년 안에 모토롤라를 이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를 1년 앞당겨 실현한 그야말로 초창기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오 고문과 당시 그와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의 확인 취재를 통해 자칫 묻힐 뻔했던 초창기 ‘애니콜 신화의 진실’을 밝힌다. 이들은 오늘의 애니콜이 있기까지 일등공신들이었음에도 의외로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했다.

올 1월17일 <조선일보> 인터넷 사이트(www.chosun.com)에 ‘애니콜 신화의 주역 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사장이 기술총괄부회장으로 승진했다’는 기사가 뜨자 재미있는 댓글이 올라왔다.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은 이기태 사장이 아닙니다. 전임자인 삼성전자 정보통신사업부와 삼성자동차 부사장으로 계셨던 오OO분께서 불철주야 노력하신 결과이며, 이기태 사장은 애니콜 브랜드가 국내 정상에 올라간 후에 그 자리를 맡아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애니콜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탄생 당시 이기태 사장은 뭘 했는지 역추적 해보십시오. 진정한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은 아닙니다.’(조두현, dhjo01)

기자는 일단 이기태 부회장을 흠집 내려는 글이려니 생각하면서도, 애니콜 신화에 얽힌 언론보도들을 하나씩 체크해나갔다. 이때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삼성전자 휴대전화사업부를 일약 스타덤에 앉힌 ‘애니콜’ 브랜드의 제안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기사가 한 줄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조두현씨(그는 1994년 애니콜 탄생 당시 삼성전자C&C 사업부 내 애니콜 광고부장이었다는 게 확인됨)의 댓글에 적힌 ‘오OO’씨는 오정환 르노삼성자동차 고문(당시 삼성전자C&C 사업부장(상무))이다. 그는 그동안 보도된 기사들 중에 한때 상표로 될 뻔했던 ‘애니텔(anytell)’의 창안자로 나오긴 하지만 애니콜 발의자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 고문과도 함께 일했던 조진호 현 휴대전화사업담당 상무(당시 통신기획팀 과장)는 “애니텔이라는 아이디어는 오 고문의 작품이 맞지만 애니콜로 결정된 것은 당시 난상토론 끝에 붙여진 이름이다”며 애니콜 브랜드의 발의자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는 당시 오 고문과 초창기 애니콜 신화창조를 만들었던 직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그 진실의 윤곽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먼저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부터 찾았다.

이용석 당시 삼성전자C&C(이하 C&C) 사업부 광고팀 대리(현 IMC 사장)는 “오정환 당시 상무가 애니텔을 제안했는데 다른 상표와 유사해서 법무팀에서 리젝트 했다”며 “다시 오 상무가 애니콜을 제안 했고 그 때 품의서를 내가 썼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판매기획팀(아마 통신기획팀을 잘못 말한 듯 보임)에선 애니콜에 반대 의견을 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자기들이 그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한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C&C 광고판촉팀 프로모션 담당자였던 김혜정 르노삼성자동차 과장은 “당시 <애니깽>이란 영화가 나왔던 때였는데 제일기획에서 ‘프리, 콜, 애니, 웨이’등 몇 가지 단어를 주면서 조합하라고 했다”며 “그때 오 상무가 애니콜로 결정했다”고 단숨에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콜’이라는 말이 붙자 콜걸이나 전화방을 연상시킨다며 정말 반대파들이 많았다. 이때 오 상무가 그런 걸 모두 불식시키면서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밀어붙였다. 하도 주위 반대가 많아서인지 말단 직원인 나한테 와서 애니콜이란 브랜드 레터링을 시켰다. 당시 애니콜 글씨체를 크로키 북에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주위 반대파들로부터) 구박받으면서도 오 상무가 시키는 대로 했다”며 14년 전 기억들을 생생하게 쏟아냈다.

삼성전자 기흥연구소 부장이었던 천경준 현 삼성전자 고문도 “누가 뭐래도 오 상무가 애니콜 브랜드를 만드는 것과 영업 마케팅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일등공신”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러던 중 기자는 애니콜의 최초 제안자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문서인 당시 C&C 사업부의 내부문건을 입수했다. ‘HHP 브랜드네임 선정의 건(1994년 7월25일 작성)’과 ‘HHP 브랜드네임 재선정의 건(1994년 8월1일 작성)’, ‘애니콜 브랜드 도입 경과(1996년 4월9일 작성)’ 등 3건의 보고서다. 이중 ‘애니콜 브랜드 도입 경과’라는 문건에 오정환 상무가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1994년 7월21일 문서로 제안했음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애니콜의 명명자가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기자는 당시 직원들과의 전화 인터뷰 후 경기도 일산 농장에서 소일하고 있는 당시 오정환 C&C 사업부장을 설득 끝에 만났다. 입수한 문건과 오 고문 및 당시 직원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애니콜 브랜드의 탄생 비화를 재구성했다.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특명

“3년 내 모토롤라 따라 잡아라”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전자 임원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이 회장이 주창한 ‘신 경영’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한 자리였다. 이 회장은 300여명의 임원들과 일대일로 질의응답을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던 오 상무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건희 회장: 오 상무 무엇을 맡고 있나?

오 상무: 휴대전화 등 C&C 사업을 맡고 있습니다.

이 회장: 우리의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은?

오 상무: 모토롤라가 90%, 우리는 5%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회장: 3년 내 50%를 넘을 수 있나.

오 상무: 해보겠습니다.

오 고문은 그 자리에서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래도(못한다고 해도) 잘리고 저래도(성공을 못해도) 잘릴 바에야 일단 해보기라도 하고 회사를 떠나자’고 마음먹고 대답했다는 것. 이에 대한 주위 반응은 웃음소리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휴대전화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룹이 반도체에 이어 휴대전화 사업을 신 성장 동력으로 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휴대전화 사업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사업을 접는 방안까지 고려했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초창기 휴대전화 사업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994년 이 회장은 천경준 삼성전자 고문(당시 휴대전화 연구개발 부장)에게 “내가 모토롤라 이기는 법을 알려줄까”라고 묻고 천 고문이 “네”라고 대답하자 “그래 열심히해봐.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 고문은 삼성항공 특수사업 기획관리담당 이사로 지내다 1990년 삼성전자 정보통신 국내영업본부 시스템영업담당 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오 고문은 삼성항공 근무시절 방산 부문을 담당했는데 국방부 회의 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장성들에게 ‘똥별’이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돼 자리를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삼성 컴퓨터 ‘센스’도 오정환씨 작품

오 고문은 삼성전자에서 처음에는 컴퓨터 영업을 맡았다. 그는 삼보에 밀리던 컴퓨터 판매를 삼성으로 뒤집어 놓으면서 영업력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노트북 센스로 더 잘 알려진 ‘센스(SENSE)’ 브랜드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오 고문은 1992년 12월 C&C 사업부장(상무)을 맡는다. 휴대전화 및 컴퓨터, 주변기기 제품들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1993년 6월 그는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특명을 받자 휴대전화 사업에 매진한다.

백성기 제일약품 홍보실장(당시 제일기획 애니콜 광고담당 차장)은 “당시 오상무가 애니콜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있다. 당시 내가 제일기획 애니콜 담당자였는데, 1993~1995년 애니콜의 1년 광고예산 30억~60억원을 상반기에 다 쏟아 부었다. 내가 이를 기획했고 오 상무가 적극적으로 밀었다. 당시 컴퓨터 등 다른 사업도 많았는데, 나와 오 상무가 쿵짝이 맞아 애니콜에 올인할 정도로 애니콜을 적극적으로 밀었다”고 회고했다.

김행우 유씨오미디어 사장(당시 통신기획팀장)은 “내가 1995년 1월1일자로 판매기획팀장으로 발령을 받자, 당시 직속 상사였던 오 상무가 내게 가장 강력하게 주문했던 게 ‘모토롤라를 어떻게든 이겨라’는 지시 사항이었다”고 전했다.



‘콜걸이냐’며 놀림 받았던 애니콜

1994년 8월2일 우여곡절 끝에 탄생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휴대전화 사업과 관련 오 고문의 공을 꼽으라면 단연 ‘애니콜’ 브랜드 작명이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 휴대전화 SH-300을 내놓았으나 품질 문제 등으로 판매 확대에 치명적인 장애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1994년 SH-700 런칭을 기반으로 마지막 피치를 가하고, 모토롤라의 강력한 아이덴티티에 대응하고자 브랜드 도입에 나섰던 것이다.

1993년 11월 C&C 사업부 광고팀은 제일기획을 통해 심팩트사에 브랜드 제작을 의뢰한다. 이때 포타폰, 핸디텔, 이노텔, 엑스라인, 프리텍 등 5개의 안이 올라왔지만 임팩트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재선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94년 4월 C&C 사업부 통신기획팀은 소비자현상공모를 통해 접수된 총 3500여 건 중 8개를 다시 선정한다. 수프라(supra), MIK, 프리텔(freetel), 에쓰폰(essphone, s-phone), 한소리(hansory: 한국인의 소리), 포키(pockey: 아주 작아서 포켓에 간편 휴대), 코디피(cody-p), 쾌청(快晴, 廳) 등.

1994년 6월 통신기획팀은 외주 용역안, 소비자 공모안, 사업부안 종합 18개를 선정하고 상표권 조사 결과 사용 가능 상표 11건을 선정했는데 그중 내부에서 제안한 상표는 엑스피아(x-pia: 신세대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 엑스텔(x-tel: 신세대의 통화 연결 수단), 엑스커플(x-couple: 통화 커플의 자유로운 통화를 보장), 엑스투(x-2), 오라인(o-line: 통화 성공률의 완벽함을 의미), 애니텔(anytel) 등 6개였다.

1994년 7월 C&C 사업부는 애니텔(anytel)을 최종안으로 선정한다. 애니텔은 오 고문이 1994년 1월 구두로 제안한 것. 오 고문은 당시 애니콜도 함께 얘기했다고 한다. 오 고문은 당시 영화 <애니깽>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난 후 그날 밤 잠을 자다가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가던 중 문득 애니콜과 애니텔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에 다음날 오자마자 당시 디자인 담당자에게 레터링을 지시했다는 것.

오 고문은 애니텔보다 애니콜이 마음에 더 끌려 이를 브랜드로 밀려고 했으나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콜걸(call girl)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게 이유였다. 오 고문은 “브랜드는 섹슈얼해야 한다”며 애니콜로 유도했지만 반대가 워낙 심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애니텔이 유사상표인 앤텔(antel)로 인해 사용할 수 없다는 지적재산센터의 판정이 나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994년 8월2일 통신기획팀 이희식 팀장(현 맨테크 사장)은 애니콜을 브랜드네임으로 선정하는 ‘HHP 브랜드네임 재선정의 건(8월1일 작성)’이라는 보고서를 지적재산센터의 ‘상표 등록에 관한 의견’이라는 문서를 첨부해 오 고문에게 결재를 받는다.

당시 애니콜과 함께 애니셀, 애니폰도 브랜드 제안에 올랐다. 지적재산센터는 애니콜은 저촉되는 선등록상표는 조사되지 않았으나 ‘어떤 통화도 가능하다’는 뜻이라 거절이유통지를 예상할 수 있다며 이는 등록이 안 될 수 있지만 사용할 수는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을 달았다. 애니셀은 골드셀, 그린셀 등 선출원상표에 비해 소구력이 약하고, 애니폰은 아이폰, 아트폰과 유사성이 제기될 수 있고, 앤텔과의 차별화가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오 고문은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자신이 처음에 발의한 애니콜로 밀어붙여 최종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삼성의 복덩이나 다름없는 애니콜이 1994년 8월2일 탄생한 것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모토롤라 따라잡아

1년 앞당긴 2년 만에 이 회장과의 약속 지켜

오 고문을 비롯한 초창기 애니콜 신화 창조자들은 그야말로 아이디어맨들이었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주창한 창조 경영을 먼저 실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중반 오 고문은 제조를 맡고 있는 이기태 이사보(현 삼성전자 기술총괄 부회장)를 사무실로 불러 삼성 휴대전화의 장점을 물었다. 이 이사보는 “우리 제품은 튼튼한 게 장점이다”고 말하며 갑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바닥에다 냅다 내동댕이치더란다. 그리곤 분리된 휴대전화 본체와 배터리를 주워 조합시키더니 전화 통화가 되는 것을 입증시키더라는 것. 오 고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이 이사보는 다시 벽에다 다신의 휴대전화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오 고문은 이에 한발 더나가 “차에 깔려도 괜찮을까”하고 묻자, 이 이사보는 “그럴 것이다”고 말했고, 그러자 오 고문은 당장 시험해 보자며 함께 기흥연구소로 갔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휴대전화의 자동차 실험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 제안자는 증언자들의 말에 따라 좀 다르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천경준 고문의 말이 다소 일리가 있어 보인다.

“자동차 실험은 나와 당시 고성수 과장(현 수원지구담당설계책임자/상무)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경쟁사 제품인 모토롤라는 압력 실험에서 약 200㎏를 견디는 제품이었다. 그때 삼성은 1차 실험 때 200㎏를 버티지 못하고 실패했다. 나중에 재개발해 940㎏에도 견디는 제품을 만들었다. 당시 내가 타던 차가 소나타였는데, 차 무게가 1200㎏이다. 이 차로 휴대전화를 밟고 지나가면 바퀴 한 개당 무개가 최소 300㎏아닌가. 실험을 해봤더니 전화가 걸리더라. 그래서 이 실험만 고 과장하고 둘이 6번을 해봤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광고팀에 연락해서 제일기획 사람과 광고 담당자 몇 명이 보는 앞에서 다시 실험을 했고 제일기획에서는 카메라를 찍었다.”(천경준 고문, 당시 연구개발 부장)

이용석 당시 C&C 광고팀 대리(현 IMC 사장)도 “당시 천경준 부장이 기흥에서 자기 차인 소나타로 실험을 했다. 그 현장에 천 부장, 나, 백성기 당시 제일기획 담당자도 같이 있었다. 그러나 오 상무와 이기태 이사보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천 고문은 ‘산악 지형에 강하다’는 카피를 가능하게 만든 애니콜의 ‘골든 안테나’ 개발자라고 귀띔했다.

‘산악 지형에 강하다’는 카피가 나오게 한 주인공 역시 오 고문이라고 한다. 1994년 6~7월경 진주고 선배이자 재무부장관을 지낸 정영의 당시 담배인삼공사 사장이 오 고문에게 전화를 걸어 “설악산에 갔는데 휴대전화가 안 터진다”라고 말하자, 오 고문은 “어느 회사 것인가”라고 묻고 경쟁사 제품이라고 하자 “삼성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농을 주고받았다. 오 고문은 이때 진짜 삼성 제품은 잘 터지나 싶어 강릉, 남원, 제주의 지사장들에게 각각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정상으로 가능한 빨리 올라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도록 지시했다. 한참 있자 각각의 지사장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이를 광고에 이용한 것이다.

오 고문은 “나중에 연구소에 알아보니 당시 경쟁사 제품은 통화버튼을 누르면 신호가 기지국으로 한 번만 가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우리 제품은 두 번 가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통화가 잘 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대리점주들을 모델로 낸 광고도 히트를 쳤다.

“당시엔 삼성 휴대전화는 삼성전자 대리점에서 팔았다. 대리점 말고도 휴대전화만 파는 가게(휴대전화 가게-당시 이런 가게를 혼매점이라고 불렀다) 가 따로 있었다. 하나 팔면 5만원씩 먹곤 했는데, 모토롤라는 안 그랬는데 삼성 휴대전화는 반품이 많았다. 누가 이런 제품을 팔고 싶겠는가. 그래서 제일기획이 아이디어를 냈다. 휴대전화의 1차 고객은 엔드유저(소비자)가 아니라 대리점주다. 당시 대리점 주인들은 돈은 많은데 명예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수도권 대리점 사장들을 광고모델로 활용했다. 대리점주 사진을 죄다 찍어 이들이 ‘삼성제품을 보증한다’라는 내용으로 신문에 광고를 냈다. 대리점주들이 그렇게 자기 얼굴까지 박고 광고를 냈으니 삼성 제품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아질 것 아니겠는가. 이 광고 전략이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히트 카피 전에 대 히트를 쳤다. 그때 전국 대리점주들이 왜 수도권 대리점만 하느냐. 우리도 해달라고 해서 대전, 부산, 광주까지 전국을 돌며 대리점주들을 광고모델화 했다.”(백성기 당시 제일기획 광고담당 차장)

오 고문은 휴대전화의 자동차 실험, 불난 집 휴대전화 등 다양한 삼성 휴대전화에 얽힌 비디오를 만들어 대리점에 뿌렸다. 이 같은 삼성 휴대전화 마케팅과 기술력에 힘입어 급기야 모토롤라 대리점들마저 삼성 휴대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1995년 7월 C&C 사업부는 애니콜 국내 점유율 52%로 모토롤라를 따라잡았다. 오 고문이 이 회장 앞에서 3년 안에 50%를 넘기겠다고 한 약속을 1년 앞당겨 2년 만에 실현한 것이다.

오 고문은 그 해 12월31일 서울 여의도 한강 유람선을 빌려 사업부서 직원들과 함께 국내 시장 점유율 1위 자축연 및 망년회를 가질 계획이었지만 12월15일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투입되기 위해 삼성물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축하연회는 수포로 돌아갔다.

오 고문 자동차 사업으로 자리 옮겨

초창기 애니콜 신화의 공로 인정 못 받아

이처럼 초창기 애니콜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오 고문이 삼성의 휴대전화 사업 성공신화에 자신의 이름을 한 줄도 올리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은 “(조직에) ‘살아남은 자의 승리’로 보는 게 정확하다(이용석 IMC 사장).”, “오 상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건 아무래도 ‘공’을 회사 그만둔 사람에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희식 맨테크 사장).”, “사실 조직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인센티브다 특진이다 다 받았지만 실제 고생한 사람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김혜정 르노삼성자동차 과장).”고 말한다.

1995년 하반기 국내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50%를 넘긴 오 고문은 SK텔레콤과 1996년부터 삼성전자 휴대전화를 사용하기로 하는 전략적인 제휴를 맺어 시장 점유율 80%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신나게 달려보기도 전에 그는 자동차 사업 판매 부문을 맡으라는 특명이 그룹 비서실로부터 내려왔다. 당시 자동차 사업을 진두지휘한 지승림 기획팀장(현 알티캐스트 회장)이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영업 전문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전자에선 오 고문과 그의 진주고 후배인 이상현 당시 가전사업판매부장(전무)이 알아주는 영업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김 부회장이 오 고문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오 고문은 김 부회장과 자주 부딪혔다고 한다. 1994년 말 김 부회장이 모토롤라 매장에서 삼성제품을 파는 것을 알고는 오 고문을 불러 “빨리 철수하라”며 크게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러자 오 고문은 김 부회장에게 “내가 이 회장에게 직을 걸고 휴대전화 사업의 성공을 약속한 이상 내 소신대로 일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옆에 있었던 진대제 당시 반도체 부문 전무가 “저러다가 어찌하려고 그러느냐”고 말릴 정도였다는 것.

이희식 맨테크 사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1994년 12월말로 기억한다.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애니콜 송년의 밤 행사를 가졌는데 거의 모토롤라를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였다. 애니콜 관계자는 물론 외부 인사인 전국 지점장들을 다 모아놓은 자리였는데 김광호 부회장이 와서 했던 말 중엔 오 상무를 칭찬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 밖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김 부회장이 오 상무를 칭찬하는 멘트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를 놓고 오 상무가 섭섭해 하더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어쨌든 오 고문은 삼성물산으로 발령 나면서 휴대전화 사업과는 인연을 접었다. 그로인해 1999년 휴대전화 사업 관련 삼성인상 대상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를 대신해 계속 휴대전화 사업을 맡아온 조진호 휴대전화 사업 담당 상무(당시 통신기획팀 과장)가 받았다.

성공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다보면 불만자들이 분명히 나오는 법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런 공을 인정받다니…’하는 식의 울분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초창기 근무자들은 나름 불만이 많았다.

애니콜 신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

어쨌든 휴대전화 사업 초창기 근무자들은 한결같이 오 고문을 꼽는다. 물론 애니콜 브랜드 네이밍에서 모토롤라를 국내에서 이긴 것까지 따진다면 그렇다. 천경준 고문을 꼽는 이들도 있다. 초창기 휴대전화 기술을 구축한 주인공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초창기여서 그런지 이기태 부회장을 꼽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단지 제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 고문은 당시 연구개발을 맡은 천경준 고문과 제조를 담당한 이기태 부회장을 초창기 공로자 1순위로 꼽는다. 오 고문은 특히 애니콜이 해외로 뻗어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 부회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애니콜의 성공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면 초창기 개발 주역부터, 지금도 그 명성을 계속 지켜오고 있는 휴대전화 사업 부문의 직원들 모두가 신화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팡이 전문가로 변신한 오정환 고문

오정환 고문은 요즘 지팡이 전문가로 변신했다. 그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지팡이는 줄잡아 70여 개. 그는 친구의 부친인 양흥모 전 성균관대 교수에게 선물하려고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팡이를 샀던 게 인연이 됐다. 그래서 해외출장 때마다 지팡이를 사는 게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유럽이 지팡이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짚고 다니는 도구로써가 아닌 남자들의 액세서리로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오 고문이 구입한 지팡이 중 가장 비싼 것은 프랑스에서 구입한 개 모양의 상아 지팡이로 6000프랑(한화 100만원 상당)을 줬다고 한다.

오 고문은 직접 지팡이도 만든다. 천수장(天壽杖)이라는 상표까지 만들었다.

“옛날에 80세가 되는 노인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 임금이 하사했다는 청려장의 재료를 이용해 각자가 태어난 해의 띠를 손잡이로 디자인해 만들고 있습니다. 속설에 의하면 명아주 지팡이를 사용하면 중풍을 예방한다고 합니다. 명아주는 1년초인데 소금에 절였다가 그늘에 말려 만들면 가볍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우선 100여 개 정도를 만들어 양로원에 드릴 생각입니다.”

오 고문의 지팡이는 이미 유력인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해졌다. 재무부차관을 지낸 모 인사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죽은 뒤에 뭔가를 남기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 고문을 찾아 어렵게 지팡이를 구해갔다고 한다.

이창희 , 박인상 기자 / 사진 : 홍승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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