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유전 지역 중 한 곳인 노스다코타주 바켄 셰일 유전. 사진 블룸버그
미국 최대 유전 지역 중 한 곳인 노스다코타주 바켄 셰일 유전. 사진 블룸버그

연초만 해도 60달러를 웃돌던 국제 유가가 20달러대까지 뚝 떨어졌다. 원유 100% 수입국인 한국에서 저(低)유가는 생활 물가 하락의 호재이자 기업 투자 기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한 현 상황에서 유가 하락은 달갑지 않은 손님에 불과하다. 꽁꽁 얼어붙은 원유 수요가 저유가 환경의 매력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수요 냉각도 모자라 산유국 공조 체제 붕괴라는 공급 측 악재까지 터진 점은 시장 분위기를 더 싸늘하게 한다.

원유 시장은 당분간 어떤 움직임을 보일까. 전문가들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는 만큼 한동안은 원유 수요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3월 25일까지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2589억원어치를 팔았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한 3월에만 9252억원을 순매도했다. 외국인의 대규모 이탈은 10회 이상의 사이드카(선물 변동 폭이 3~5%에 달한 상태로 1분간 지속하면 선물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프로그램 매매를 5분간 정지하는 조치) 발동과 함께 한국 증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방인성 케이프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순매도 강도를 키운 트리거(방아쇠)는 최근의 유가 급락이다”라고 전했다. 방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한 이후 외국인 순매도는 중국, 글로벌, 유가 등 세 가지 요인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업종에 집중되고 있다.

이 중 특히 유가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방 연구원은 “유가 민감도가 낮은 업종은 높은 업종에 비해 주가 하락률이 평균 5%포인트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며 “각국의 코로나19 대책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점에 외국인 매도를 되돌릴 수 있는 핵심 요인은 유가 반등이다”라고 말했다.

유가 급락의 후폭풍은 한국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다. 미국에서는 셰일오일 업계가 신음하고 있다. 최근 무디스와 피치는 셰일오일 기업 옥시덴털의 신용등급을 각각 정크 등급인 Ba1과 BB+로 하향 조정했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유가가 셰일오일 손익분기점의 절반 수준이다 보니 옥시덴털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에 문제가 발생했고, 신용등급 조정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美·EU 확진자 급증…원유 수요 급감

국제 유가는 언제쯤 제자리로 돌아갈까. 유가 흐름에 관한 합리적 전망을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 측면을 각각 분리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원유 수요 회복은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추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보증권은 전 세계 원유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는 도로 주행용 원유 수요가 4월부터 급감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택 대피령 등 강도 높은 코로나19 억제책을 내놓은 미국과 국가 간 여행 금지 조치에 합의한 유럽연합(EU)에서 도로 주행용 연료 소비가 크게 줄 것이란 이유에서다.

김정현 교보증권 연구원은 “이미 글로벌 주요 도시들의 교통 혼잡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며 “여객 수요 부진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항공 업계의 항공유 수요 회복 여부는 코로나19 사태 수습 마지막 단계에서 확인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외국의 확진자 증가 속도가 원유 수요 급감 분위기를 4월 이후로도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47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유럽은 누적 확진자 25만 명을 돌파하며 세계 최대 발병 지역의 오명을 떠안았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의 피해가 크다. 심각한 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내 확진자는 3월 19일(현지시각) 1만 명을 넘겼는데, 불과 이틀 뒤인 21일에 두 배로 불었다. 이후로도 폭증세를 지속하면서 순식간에 7만 명을 돌파했다.

원유 수요 부진 장기화는 저장 시설 부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리스타드 에너지(Rystad Energy)는 주요국 정부의 이동 제한·금지 명령으로 올해 글로벌 원유 수요가 하루 9710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전년 대비 280만 배럴 줄어드는 것이다. 전 세계 원유와 정유 제품 저장 능력은 78억 배럴 규모인데, 이미 76%의 가동률을 나타내고 있다. 유경하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원유 수요 약세가 장기화할 경우 9개월 이내에 모든 저장 설비가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당분간 과잉 공급 불가피

공급 정상화의 열쇠는 산유국들이 무너진 공조 시스템을 얼마나 빨리 복구하느냐에 달렸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14개국과 비회원 산유국 10개국은 지난 수년간 생산량 조절 합의를 통해 국제 유가를 배럴당 50~60달러 수준으로 유지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올해 3월 감산을 거부하면서 잡음이 불거졌다. 러시아는 “그간 감산 수혜를 미국 셰일오일 업계가 독차지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증산을 선언하고 치킨게임에 뛰어든 상태다.

황병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수요 정상화나 감산 합의가 절실하지만 지금처럼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정유 제품의 수요 위축이 지속한다면 감산 효력을 둘러싼 회의론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며 “엄청난 규모의 감산을 하지 않는 이상 사우디와 러시아가 나서도 초저유가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전규연 하나금융투자 연구원도 “사우디와 러시아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할 때 당분간 원유 과잉 공급 국면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전 연구원은 “사우디의 증산은 러시아에 대한 보복 혹은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전략으로 판단한다”며 “여러 여건을 고려할 때 OPEC이 치킨게임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준범 기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