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말 스마트그리드 국가 로드맵이 발표됐다. 향후 세계적인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그리드 산업을 향한 본격적인 출항의 깃발이 오른 것이다. 물론 선진국에 비해 출발이 빠르지도 않고 원천기술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꼭 불리한 것도 아니다. 스마트그리드 산업에 연관된 기술이 고르게 발전해 있다는 사실, 국가 주도라는 사실 등 우리가 가진 장점을 활용한다면 스마트그리드 선진국에 입성할 수 있다. 기후변화 주요국 정상회의(MEF)가 이탈리아와 함께 한국을 스마트그리드 선도 국가로 선정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제2차 전력혁명 카운트 다운… 

“생활의 모든 것 바뀐다”

 “스마트그리드는 50년 전 고속도로를 건설했을 때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면서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 사업을 추진하는 국가치고 이런 유의, 거대한 변화를 예상하는 말을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영국은 제4차 기술혁명이라 하고 독일은 제3차 산업혁명이라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에너지 인터넷’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본질에 근접한 표현은 ‘제2차 전력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력은 처음 탄생한 이래 기본적인 개념을 100년 동안이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 송전소에서 공장이나 가정으로 보내면 그뿐이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전기가 들어왔다는 것은 문명이 들어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제2차 전력혁명’이라 불리는 스마트그리드 역시 거대한 문명의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김재섭 한국스마트그리드사업단장은 “스마트그리드는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바꿔 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1차 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다른 점은 제1차 시대에는 일방적이었던 전력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제2차 시대인 스마트그리드에서는 양방향, 즉 전력 정보를 서로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력의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전력의 수요를 정확하게 측정해 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력이나 태양광·전기차 등 새로운 에너지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도 스마트그리드는 필수적이다. 풍력이나 태양광처럼 전력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아 지금의 전력망을 이용한다면 정전이 밥 먹듯이 발생할 수 있다. 전기차 충전을 위해서도 보다 지능화된 전력기술이 필요하다. 스마트그리드는 새로운 전력의 시대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그리드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녹색성장’이라는 세계적인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세계는 현재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거대한 트렌드에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고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 인프라, 신재생에너지, 전기차 등 에너지와 관련된 새로운 기술의 총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된 산업 분야가 광범위하다는 점으로도 스마트그리드의 ‘혁명’을 설명할 수 있다. IT·통신·전기·전자·자동차·2차전지·에너지·건설 등 다양한 산업과 기술이 융·복합되기 때문이다. 관련 시장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지난해 미국 스마트그리드 시장은 214억달러, 세계시장 규모는 693억달러에 달했다. 성장세도 가파르다. 미국이 연평균 14.9%, 세계시장은 19.9%씩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07~2030년까지 전 세계 전력 분야 투자비가 모두 13조6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돈 있고 기술력 있는 나라치고 스마트그리드를 성장 동력으로 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미국은 물론이고 EU·일본·중국 등이 스마트그리드 시장 육성에 팔을 걷어붙인 상태다. 미국은 2003년 ‘그리드2030’ 국가 비전을 발표하고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EU는 2006년부터 매년 스마트그리드 관련 비전과 전략, 중점 분야 등을 발표하며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기술개발 로드맵을 수립하는 데 착수한 상태다.

우리 정부도 스마트그리드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1월 스마트그리드 국가 로드맵을 발표했고 제주도에 실증단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2012년엔 시범단지를 세울 예정이다. 이를 통해 세계시장에 통할 수 있는 표준화된 전력기술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전력 산업은 전통적으로 내수산업으로 인식되었지만 스마트그리드 시대엔 어엿한 수출 산업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스마트그리드 로드맵

정부 끌고 기업 밀고…‘속도를 높여라’

스마트그리드 코리아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달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가 로드맵을 확정하고 기업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신성장동력으로 스마트그리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기업도 적잖다. 가히 ‘열풍’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대단하다. 미국이 6년 걸려 했던 일을 한국은 6개월 만에 해치웠다. 한국은 세계 스마트그리드 시장의 강자가 될 것이다.”

지난 1월 방한한 귀도 바틀스 미국 스마트그리드협회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국가 로드맵을 만들고 협회까지 창설한 한국의 ‘속도전’에 혀를 내두른 것이다. 실제로는 6개월이 아니라 1년이 걸렸지만 그렇다 해도 한국이 스마트그리드 시장에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김재섭 스마트그리드사업단장은 “국가 로드맵은 일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라며 “로드맵의 수립으로 스마트그리드 선행 국가와 같은 스타트라인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내수 74조, 수출 49조 성장 기대

지난 1월 25일 발표한 정부의 ‘스마트그리드 국가 로드맵’은 5개의 중점 추진 분야를 설정하고 있다. 지능형 전력망, 지능형 소비자, 지능형 운송, 지능형 신재생에너지, 지능형 전력 서비스가 그것이다. 이는 스마트그리드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통합형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지능형 전력망 사업은 공급자와 소비자가 자유롭게 연계되는 개방형 전력망을 구축한다. 전력망 고장의 사전예측 및 자동복구체제를 구축해 품질과 신뢰성이 높은 전력을 공급한다. 지능형 송전, 지능형 배전, 지능형 전력기기, 지능형 전력통신망 등의 기술로 구성된다. 지능형 전력설비와 운영체계 등을 수출할 수 있다.

지능형 소비자 사업은 에너지 소비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추진한다. 원격검침과 에너지 사용기기에 대한 능동적 제어가 가능하다. 전력 소비 관리를 해준다는 얘기다. 전력과 수도·가스·인터넷·통신·방송 등이 융·복합되는 서비스도 나올 수 있다. 가정이나 공장 등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전력을 거래할 수도 있다.

지능형 운송은 전기차 충전 인프라 구축을 목표로 한다. 전기차 배터리와 전력망의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다. 전기값이 쌀 때 충전했다가 비쌀 때 되파는 게 가능하다. 지능형 신재생은 발전량이 일정하지 않아 출력제어가 어려운 신재생에너지를 기존의 전력망에 안정적으로 연계·운용하는 인프라다. 이렇게 되면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해 가정·마을·빌딩의 에너지 자급자족이 가능할 수 있다.

지능형 전력 서비스는 ‘서비스’의 다양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먼저 통신요금처럼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전기요금제도를 개발한다. 전력과 전력을 활용한 파생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전력거래제도도 확립된다. 전력과 IT 기술이 결합되면서 나올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정부의 목표는 2030년까지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의 스마트그리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대되는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2030년까지 2억3000만 톤의 온실가스를 절감할 수 있다. 에너지 수입은 47조원이 줄어든다. 74조원의 내수시장이 새로 생기고 수출은 49조원이 늘어난다. 일자리는 연평균 5만 개가 창출된다.

기업 참여 적극적…해외 진출 교두보

로드맵은 2012년·2020년·2030년 등 3단계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첫 번째 목표는 2012년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그리드 시범도시를 구축하는 것이다. 시범도시는 각별하다. 정부와 기업이 개발한 기술이 실제로 잘 운영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약으로 치면 임상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공해야 스마트그리드의 상품화·산업화가 가능해진다. 시범도시 구축을 위해 현재 정부는 제주도에 실증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실증단지는 일종의 거대한 연구소이자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의 기술이 개발되고 표준화된다. 여기서 나온 기술과 표준이 시범단지에 적용되는 것이다. 현재 제주실증단지에 사업별로 10개의 컨소시엄에 168개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총 투자금액은 2395억원이다. 당초 목표했던 투자 규모의 두 배 수준이다. 그만큼 기업의 관심이 많다는 의미다.

기업들의 참여 열기는 물론 스마트그리드 시장의 성장 잠재력에서 비롯된다. 세계 최초의 통합형 실증단지라는 제주실증단지에서 기술개발에 성공할 경우 해외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해외에선 태양광·신재생에너지 등 특정 분야의 실증단지가 있지만 통합형은 우리가 처음이다.

로드맵을 확정하고 실증단지 조성에 들어가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모든 상황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과연 한국이 기대한 것처럼 세계 스마트그리드 시장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기술 부족이 우려된다. 단위기술은 있지만 원천기술이 충분하지 않다.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대목이다.

원천기술이 부족하긴 하지만 한국의 강점을 잘 활용한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IT·통신·전기·전자·건설 등 한국은 스마트그리드와 관련된 산업들이 고르게 발달돼 있고 IT와 통신·전기 등 핵심 업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대표적인 업종 간, 산업 간 융·복합 산업이기 때문에 해당 기업 간, 정부와 기업 간 협업이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해볼 만하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김재섭 한국스마트그리드사업단장

“한국, 세계 일류 스마트그리드 국가될 것”

 “출발은 늦었지만 목표 설정이 빨라 다행입니다. 스마트그리드 사업과 같은 경우는 목표 설정이 사업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목표를 선점하고 먼저 시작하느냐가 성패를 가를 수 있습니다.”

김재섭 한국스마트그리드사업단장은 후련한 표정이었다. 지난 1년간 수십 차례나 초안을 수정하며 어렵사리 국가 로드맵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로드맵이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어떻게 좁힐 것인지가 문제다. 이 점에서 김 단장은 낙관적이었다.

“한국의 제조업은 언제나 늦게,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반도체도 그랬고 정보통신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분야 모두 세계 최고입니다. 우리가 모든 기술을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외국과 적절한 전략적 제휴를 맺을 수도 있고 국가 차원에서 기술개발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기술은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그리드 산업은 태생이 융·복합이다. 특히 한국이 구상하는 통합형 스마트그리드는 융·복합의 극치다. 많은 기업의 이해관계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관계에선 리더십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업단이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최소한 현재의 인원과 예산으로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사업단은 법적 기관이 아닙니다. 당연히 예산과 기능이 약하죠. 하지만 올해 말까지 특별법이 제정될 예정입니다. 이 법에 사업단의 역할이 명시되면 안정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을 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주실증단지를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스마트그리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사업단에 힘이 실릴 것입니다.”

한국의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국가 주도형이다. 그만큼 일관성을 가지고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지난 50년간의 개발경제가 충분히 보여준 사실이다. 하지만 스마트그리드처럼 전례가 없고 창의성이 필요한 산업에서 이런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을까 의문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 단장은 이번 사업은 국가 주도이기는 하지만 과거와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국가는 인프라만 제공하고 나머지 콘텐츠를 채우는 것은 기업의 몫이라는 설명이다.

기업의 참여는 결국 시장 확대와 수익 향상이 목표다. 하지만 기술개발이 시장 확대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 전력망처럼 사회간접자본에 해당하는 경우 진입 장벽은 매우 높을 수 있다. 처음부터 수출용으로 기획된 한국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풀어야 할 숙제가 여기 있다.

“해외 기업과 적절한 제휴가 효과적일 것입니다. 큰 시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기업과 적극적인 제휴를 맺을 계획입니다. 표준화 작업도 세계시장에 초점을 두고 추진할 것입니다. 현재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데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늘 인지하며 사업을 진행할 것입니다.”

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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