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새 컬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펜실베이니아대 인문학사(건축학),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조경학 석사, 전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 연구원 / 사진 컬리
박은새
컬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펜실베이니아대 인문학사(건축학),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조경학 석사, 전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 연구원 / 사진 컬리

김슬아 컬리 대표가 ‘마켓컬리’를 처음 세운 건 2015년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새벽배송’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앞세워 국내 유통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컬리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2015년 매출액은 29억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컬리 매출액은 9530억원으로 1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누적 회원 수는 800만 명을 넘었다. 불과 5년 만에 일궈낸 성과다.

언론에선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 출신인 김 대표의 젊은 리더십에 주목했지만, 이런 성과를 김 대표 혼자서 이루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김 대표를 도와 컬리의 현재를 만든 여러 조력자 중에서도 유통 업계에서는 박은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존재를 눈여겨본다. 컬리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만 해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자리가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박은새 디렉터가 컬리의 문화와 브랜드, 콘텐츠 전반을 이끌어 나가면서 김 대표와 함께 컬리의 현재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귀국 후 국책연구원에서 일했다. 유통 업계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컬리에 합류한 이유가 궁금하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출퇴근 거리가 멀어서 연구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주말에 본가에 가서 먹을 음식을 소분해 와서 평일에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골라준 반찬이나 음식 같은 믿을 수 있는 상품을 소량으로 판매하는 마켓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마켓컬리 서비스를 알게 됐고, 경기도권에서 구하기 힘든 상품 몇 개를 주문했는데 정말 바로 다음 날 새벽에 배송돼 있어서 놀란 기억이 있다. 당시 청년들의 수도권 인구 밀집 이슈를 해결하려고 청년 귀농·귀촌 장려를 위한 중소도시 활성화를 박사학위 주제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마켓컬리가 대안이라는 생각을 했다.”

컬리에 합류할 때만 해도 작은 스타트업이었다. 걱정이 없었나.
“회사 규모는 작았지만 기존 유통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하는 회사의 비전이 서비스 전체에 묻어났고, 브랜드가 주는 아우라도 있었다. 김슬아 대표가 나에게 공간을 공부한 사람이면 오프라인에서의 장보기 경험을 온라인에서 구현하는 데 차별화된 시각을 갖고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더라. 브랜드가 가진 아우라는 김슬아 대표의 이런 차별화된 생각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규모가 작은 유통 회사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고 있는 것 자체에도 놀랐다.”

2016년에 컬리에 합류하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한 건가.
“분야와 산업, 회사의 규모를 막론하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텍스트와 비주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콘텐츠 제작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방향성을 비롯해 전체 프로젝트의 전략과 기획을 잡고,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업무도 맡는다. 지금은 컬리의 TV 광고를 제외한 모든 온·오프라인 텍스트와 이미지 총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입사 이후 컬리 매출이 수십 배 정도 성장했는데, 그렇다고 콘텐츠 제작에도 수십 배 많은 돈을 쓸 수는 없다. 100개의 상품 콘텐츠 퀄리티를 유지하는 건 쉬울 수 있지만, 1000개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조직화, 시스템화, 가이드화하는 역할도 내 몫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좋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 위한 자질은 무엇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기본 역량은 당연히 미적 감각이다. 그런데 감각적인 크리에이터는 많다. 요즘은 전문가가 아니어도 감각 있는 일반인이나 인플루언서도 많다. 크리에이티브가 영향력을 가지는 건 미적 감각에서 그치지 않고 업계의 스탠더드를 바꿀 때다. 컬리는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그 노력이 결과물에 담겼는지 많은 분이 컬리의 크리에이티브를 좋아한다. 업계에서도 마켓컬리를 모방하면서 ‘컬리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스타일도 생겼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롱런하기 위한 비법이 있을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꾸준히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머리를 비워야 한다. 기존과 다른 환경에 놓여서 리셋해야 한다. 매년 2주, 3주씩 멀리 떠났다. 김슬아 대표가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존중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가 가장 바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휴직 기간을 가지는 걸 이해해줬다. 우물이 마르면 회사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상호 협의가 돼 있었다.”

모든 직장인이 필요할 때마다 멀리 떠나서 재충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에서, 일상에서 창의력을 충전할 방법은 없나.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을 본다고 영감이 떠오르거나 하는 게 전혀 아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오히려 자연을 비롯해 살아 숨 쉬는 것과 매일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아름다움을 통해 영감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은 일상에 더 몰입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장에 다닌다. 운전하면서 보는 한강과 지하철에서 보는 한강이 다르다. 심신이 잘 회복되면 새로 출시된 힙한 음악이 아니라 집 앞 공원에서 우연히 듣는 새소리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영감이라는 건 별다른 게 아니다. 일상과 사물에 대한 본질을 재발견하는 시각과 태도다.”

컬리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은 실패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실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이다. 학창 시절 한국에서 바이올린을 했다.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바이올린만 켰다. 그렇게 6, 7년을 했는데 다치면서 바이올린을 포기하게 됐다. 공부를 제대로 안 했으니 한국에서는 입시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도피성으로 미국 유학을 택했다. 좌절이자 실패로 인한 선택이었는데 막상 미국에 가보니 새로운 길이 열리는 걸 경험했다. 그 이후 실패가 오더라도 더 좋은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삽질을 거듭해야 나만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는데, 요즘은 많은 사람이 안정적인 선택과 답이 보장됐을 때만 시작하려는 경향이 있다. 부딪히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좌절감, 패배감에 대한 두려움과 회복탄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분명히 배우는 것이 있다.”

경영학이나 마케팅을 배운 게 아니다. 첫 기업 생활이 컬리였고, 입사할 때부터 관리자를 맡았다. 리더십에 대한 고민이 없었나.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은 되지만 ‘마녀’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잘 몰랐지만 입사했을 때 욕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라 업계가 통상적으로 일하는 방법에 대해 경험이 없었고, 안 된다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못 해준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제는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다만 조직생활 관점에서 보면 ‘둥글게 둥글게’가 좋을 수 있지만,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에서는 중심을 잡지 않으면 휘둘릴 수밖에 없다. 아닌 건 아니고, 별로인 건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표면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lus point

상장 앞둔 컬리, 오픈마켓·렌터카 진출하며 몸집 불리기

컬리는 최근 2022년 상반기 오픈마켓 시장에 진출한다고 선언했다. 컬리는 그동안 상품을 직접 사들여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 품질 관리 면에서 강점이 있지만, 취급 품목이 제한적이라 규모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판매자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오픈마켓에 진출하면 컬리의 약점으로 꼽히던 ‘규모의 경제 미실현’을 해결할 수 있다.

컬리는 얼마 전 항공권과 렌터카 예약 사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신선식품보다 가격대가 높기 때문에 몸집을 키우는 데 안성맞춤이다. 컬리는 올해 4월부터 호텔 숙박권과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 판매도 시작했다.

컬리가 몸집 불리기에 나서는 건 내년 상장을 앞두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컬리는 2022년 국내증시 상장을 목표로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종현·이윤정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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