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카이스트 전산학과 중퇴, 전 에빅사 대표, 전 그래텍 기획본부장, 전 소프트뱅크코리아 이사, 전 엔써즈 부사장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카이스트 전산학과 중퇴, 전 에빅사 대표, 전 그래텍 기획본부장, 전 소프트뱅크코리아 이사, 전 엔써즈 부사장 /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벤처캐피털(VC)은 스타트업에 돈만 투자하는 존재가 아니다. 제품 출시, 시장 확장, 인력 확보, 조직 관리 등 경영의 모든 과정에서 신생기업 성장을 돕는다. 자동차로 치면 연료 주입은 물론 차량 정비와 운행 보조, 길 안내까지 제공하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프트뱅크벤처스는 국내 스타트업들이 가장 투자받고 싶어 하는 VC 중 한 곳으로 꼽힌다. 20년 동안 260여 기업에 투자한 경험, 소프트뱅크로 이어지는 강력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해외 진출을 꿈꾸는 토종 스타트업에 더없이 매력적인 울타리다.

이런 장점을 입증하듯 소프트뱅크벤처스가 투자한 하이퍼커넥트는 올해 2월 데이팅 앱 ‘틴더’ 운영사인 미국 매치그룹에 17억2500만달러(약 1조9500억원)에 매각됐다. 하이퍼커넥트는 영상 기반 채팅 앱 ‘아자르’를 서비스한다. 최근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제2의 하이퍼커넥트 육성을 목표로 1800억원 규모의 글로벌 기술 기업 투자 펀드를 조성했다. ‘이코노미조선’이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에게 만남을 청한 배경이다.

3월 2일 서울 서초동 소프트뱅크벤처스 사옥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2018년부터 대표직을 맡은 그는 VC 수장이기에 앞서 자신도 스타트업을 두 차례 세운 바 있는 창업가다. 이 대표는 올해 세계 시장에서 통할 인공지능(AI) 분야 원석 발굴에 집중할 방침이라고 했다. 후배 창업가들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하라고 당부했다.


하이퍼커넥트 투자를 강력하게 주장한 장본인이라고 들었다.
“창업자인 안상일 대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안 대표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의 집에서였다. 당시 장 의장은 검색 엔진 ‘첫눈’을 매각한 뒤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창업을 준비하며 업계 후배들을 연결해주곤 했다. 장 의장은 내게 “큰일을 할 친구”라며 안 대표를 소개했다. 안 대표가 구글보다 나은 글로벌 검색 엔진을 만들겠다고 말하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안 대표가 그렇게 만든 회사(레비서치·2008년 폐업)는 실패하지 않았나.
“미국에 진출했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잘할 수 있겠느냐’는 편견에 막혀 충분히 투자를 유치하지 못했다. 든든한 투자자를 만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안 대표를 다시 만난 건 2015년 내가 소프트뱅크벤처스에 합류했을 때다. 하이퍼커넥트 창업 2년 차였다. 그런데 이때도 ‘토종 한국인의 비전이 외국에서 먹힐까’라는 의구심이 안 대표를 따라 다니고 있더라. 또 같은 벽에 부딪히게 하고 싶지 않아 내부에 (하이퍼커넥트 투자를) 강하게 어필했다.”

그래도 무작정 정에 이끌려 거액을 주지는 않았을 텐데, 나름의 투자 기준이 있나.
“크게 세 가지를 본다. 첫 번째는 해당 기업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글로벌 시장에서도 해결해야 하는 이슈인지 여부다. 이게 확인되면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이나 제품을 가졌는지 본다. 마지막으로는 창업자를 본다. 창업자의 지식이나 끈기도 중요하지만, 유능한 인재를 끌어당기는 인간적 매력과 팀원을 다독일 줄 아는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철학이 반영된 투자 사례가 더 있나.
“북미 웹 소설 시장을 공략한 ‘래디쉬’, 제조기업에 무인 검사 솔루션을 제공하는 ‘수아랩’, 수학 문제 풀이 앱 ‘콴다’로 전 세계 교육 시장을 뒤흔든 ‘매스프레소’ 등 포트폴리오는 다양하다. 이 중 수아랩은 2019년 국내 기술 분야 스타트업의 해외 인수합병(M&A) 중 최대 규모인 1억9500만달러(약 2200억원)에 미국 나스닥 상장사 코그넥스에 인수됐다. 축구 데이터 분석 기업 ‘비프로컴퍼니’는 유럽 명문 축구팀 다수와 협업하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도 글로벌 기업 육성이 핵심 목표인가.
“물론이다. 지난해 조직을 코리아 얼리 스테이지(Korea Early Stage), 벤처 그로스(Venture Growth), 차이나 그로스(China Growth) 등 3개 본부로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올해는 이들 조직을 토대로 해외 시장에서 통할 스타트업 발굴에 올인할 생각이다. 소프트뱅크 그룹 유일의 ‘초기 스타트업 발굴 투자사’ 역할을 해낼 것이다. 특히 AI 분야를 유심히 관찰할 계획이다.”

소프트뱅크벤처스가 키운 스타트업을 그룹에서 이어받아 투자한 경우도 있나.
“인도네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성장한 ‘토코피디아’를 2013년부터 투자했다. 우리의 초기 투자 이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도 이 기업에 투자했다. 중국 알리바바, 미국 세쿼이아캐피털, 싱가포르 국부펀드(테마섹) 등도 토코피디아에 돈을 태웠다.”

두 번의 창업 경험이 도움을 주나.
“아무래도, 창업한 이의 심정을 아니까. 과거 ‘창업가’ 이준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사업이 잘 안 풀릴 때는 VC가 우리를 통해 돈이나 벌려는 업체로 보였다. 투자 사이드에 와보니 비로소 이쪽의 진심을 알겠더라. 지금은 매 순간 창업가의 시각과 감정을 고려하면서 도움을 주고자 한다. 시도 때도 없는 간섭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스타트업에서) 먼저 도와달라고 할 때까지 믿고 지켜보기도 한다.”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한 만큼 소프트뱅크벤처스 눈에 들기는 힘들 것 같다.
“쉬운 투자가 어디 있겠나. 그렇지만 창업가들에게는 ‘겁내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2003년 에빅사를 창업했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원격 제어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몰랐다. 무작정 소프트뱅크코리아 대표번호로 전화해 만나 달라고 했다. 학생의 당돌함이 귀여웠는지 안내데스크의 메모를 전달받은 대리급 직원이 진짜로 만나줬고, 그 만남을 계기로 문규학 대표(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 아시아 총괄)까지 만나 투자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적이다.”

2021년의 VC 대표 이준표도 당돌한 창업가를 잘 만나주고 있나.
“최선을 다한다. 당시 내가 투자사 대표번호로 전화한 게 소프트뱅크뿐이었겠나. 문전박대는 일상이었다. 대전 내려가는 버스를 놓쳐 고속버스터미널 PC방에서 밤샌 날이 수두룩하다. 그런 가운데 날 믿어주는 투자자를 만난 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모른다. 2021년의 소프트뱅크벤처스도 스타트업에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