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라오닝성의 한 의사가 우한에 있는 환자를 원격진료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중국 라오닝성의 한 의사가 우한에 있는 환자를 원격진료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정부가 2월 24일부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 병·의원에 원격의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코로나19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되고 의료기관을 통한 감염과 병원 폐쇄 사례가 잇따르자 내놓은 긴급조치다. 정부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도 원격의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당시엔 강북삼성병원 등 일부 병원에 국한했었고, 모든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원격의료를 허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가벼운 감기 등을 앓는 환자는 의료기관에 직접 가지 않고도 전화로 상담과 처방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자가격리자·만성질환자·노약자 등의 경우 의사의 판단하에 대리처방도 허용됐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이번 원격의료 허용이 현행 의료법의 대면의료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원격의료에 필요한 인프라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졸속 조치’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성명을 내고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분명한 전화 상담 및 처방은 검사가 필요한 환자의 진단을 지연하거나 적절한 초기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할 위험성이 있다”며 전국 병·의원에 ‘원격의료 보이콧’을 주문했다.

실제로 일선 병·의원에서는 환자가 전화 상담 및 처방을 요구해도 ‘우리 병원은 원격의료를 하지 않고 있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서울 소재 한 이비인후과 원장은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처방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온전히 병원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 아니냐”며 “진료비도 계좌이체로 받으라고 하는데 소위 ‘먹튀’를 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대학병원이나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심각한 대구·경북의사회는 정부의 원격의료 허용 방침에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원격의료 통해 ‘의료 질’ 높이는 선진국

원격의료를 법으로 금지한 한국과 달리 해외 선진국은 대부분 지역별 의료 수준 편차를 해소하고 의료비용을 낮출 목적으로 원격의료를 허용하고 있다. 정보기술(IT) 발달에 따라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의사가 환자를 상담하고 처방전을 발행하는 원격진료뿐만 아니라, 당뇨 등 만성질환자의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등 원격의료의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원격의료 분야에서 가장 앞장선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국토가 넓어 시골과 대도시 간의 의료 접근성 차이가 심각하고 의료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원격의료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원격의료 동등법’을 통해 원격의료도 대면의료와 같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원격의료 기업이 성장해왔다.

미국 1위 원격의료 기업인 ‘텔라닥(Tela doc)’은 직원에게 의료 복지를 제공하고자 하는 회사를 대상으로 하는 원격진료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회사가 일정한 구독료를 내고 텔라닥에 가입하고, 개별 진료비는 각자 직원이 부담하는 구조다. 텔라닥의 경쟁력은 ‘진료 접근성’이다. 미국에서 대면진료를 받으려면 평균 20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텔라닥을 통하면 24시간 중 언제라도 10분 내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전 세계 1만2000개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매년 수백만 건의 원격진료를 중개하는 텔라닥의 시가총액은 85억달러에 달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인구 대비 의료진 숫자가 부족하고 지역별 의료 수준 격차가 큰 중국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원격의료를 육성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09년 ‘인터넷 의료 및 보건정보 서비스의 관리방법’ 정책을 발표하면서 원격의료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2019년 12월 1일부터는 온라인 헬스케어 플랫폼에서 처방약 판매도 조건부로 허용했다.

중국의 원격의료 산업은 대표적인 IT 기업인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알리바바그룹 산하의 ‘알리헬스(Ali health)’는 원격진료부터 의약품 배송까지 한 번에 가능한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알리헬스는 인간 의사에 의한 원격진료에 그치지 않고, 인공지능(AI) 원격진료를 제공해 중국의 의료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이용자 3억 명이 넘는 ‘핑안굿닥터’에서는 매일 65만 건의 의료 상담이 이뤄진다.

코로나19의 근원지로 의료기관 감염 문제가 심각한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도 원격의료가 활발하게 시행되고 있다. 중국 전역의 의료진이 핑안굿닥터 앱을 통해 우한 주민을 문진하는가 하면, 우한 의료진은 환자의 폐 CT(컴퓨터 단층촬영) 사진을 찍자마자 타 지역 의사에게 전송해 판독을 맡기기도 한다.

일본도 원격의료를 활용해 코로나19 감염으로 고립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의 승객들을 지원했다. 2000개 객실에 모두 헬스케어 앱이 깔린 애플 아이폰을 지원하고, 이를 통해 승객이 의사·간호사와 상담하고 필요한 약물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 라인의 자회사 라인헬스케어도 지난해 말부터 일본에서 원격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미국 1위 원격의료 서비스 ‘텔라닥’을 통해 환자가 의사에게 화상통화로 진료를 받는 모습. 사진 텔라닥
미국 1위 원격의료 서비스 ‘텔라닥’을 통해 환자가 의사에게 화상통화로 진료를 받는 모습. 사진 텔라닥

한국 원격의료, 20년째 제자리걸음

국내에서도 20여 년 전부터 원격의료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 왔지만, 의료계와 시민단체의 반대로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된 상태다. 정부는 2013년과 2016년 두 번에 걸쳐 원격의료 법안을 입법예고했지만, 결국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입법에 실패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허용한 원격의료가 명확한 시행 지침 없이 ‘의사의 판단에 맡긴다’는 방침만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에서 스마트폰 앱, 스케어 기기 등을 활용해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것과는 달리, 관련 인프라가 전무한 국내에서는 환자 개개인이 의사·약사와 협의해 전화와 팩스, 계좌이체를 통해 직접 원격의료를 진행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사스·메르스·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며 “이에 대비해 지금이라도 원격의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인프라를 확충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윤섭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소장은 “원격의료를 법으로 금지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한국의 의료 접근성이 좋다고 해서 원격의료를 계속 금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는 “임시적 조치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처음 원격의료를 모든 의료기관에 허용함으로써 의료계와 국민 모두 원격의료의 효용에 대해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원격의료를 상시 허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원격의료를 통해 도서·산간지역 등의 의료 서비스 소외 문제 등을 보완할 수 있고 현재와 같은 전염병 창궐 사태에도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며 “그동안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국가마다 의료 환경이 다른데 무작정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근거와 당위성을 갖고 각 이해관계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