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호황 땐 옥석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불황 땐 대번에 판가름 난다. 지난 IMF(국제통화기금) 쇼크 때 우리는 수많은 ‘쭉정이 기업’을 걸러낸 학습 효과가 있다. 문제는 이번 불황이 언제 종지부를 찍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일각의 경고처럼 ‘일본식 불황’에 빠져들 위험도 없지 않다. 이제 기업들도 장기 불황에 대비할 때다.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에서 “모를 땐 물어보라”고 했듯이 이럴 땐 멘토 기업을 발굴, 그들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불황 타개책을 물어볼 재계의 ‘어른’이 있을까. <이코노미플러스>는 위기 때 빛을 발했던 개성상인들에게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한국의 대표 ‘상맥’(商脈)을 형성해온 개성상인의 리더십을 통해 불황기 생존 비법을 배워 본다.

 개성상인들은 해방 후 한국 재계사에서 개척자 그룹으로 통한다. 서성환 태평양 전 회장은 화장품, 우상기 신도리코 전 회장은 복사기, 고홍명 한국빠이롯드만년필 회장은 필기구를 국내에 선보인 주인공들이다. 허채경 한일시멘트 전 회장은 시멘트 산업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렇다고 이들 개성상인의 성공 스토리가 ‘흘러간 옛노래’는 아니다. 지금도 재계의 ‘변방’이 아닌 주축으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2대로 넘어와선 이회림(88)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수영(63) 회장이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맡고 있고, 우석형(50) 신도리코 회장은 국내 복사기 부문 1위 수성을 굳히고 있다. 

 1980년대 한국의 ‘현금왕’으로 불린 고 단사천 해성그룹 회장. 그가 전화를 하면 정주영 현대 회장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을 만큼 당대 사채 시장을 주물렀던 지하 경제의 제왕이었다. 2001년 단 회장이 작고한 뒤 2대로 넘어와선 장남 단재완(55) 회장이 전동 공구 국내 1위인 계양전기와 제지업계의 알짜 기업인 한국제지 등을 이끌고 있다.

 고홍명 한국빠이롯드만년필 회장의 호(松江)를 지어줬다는 윤장섭(83) 성보실업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개성상인 중 한 명으로, 단 회장과 함께 현금왕으로 통했던 인물이다. 현재 그의 장남인 윤재천 사장이 성보화학을, 4남인 윤경립 사장이 유화증권을 이끌고 있다.



 지금도 부채 없는 알짜 경영 과시

 개성상인들은 자신이 개성 출신이란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신용과 한 우물 정신을 바탕으로 어려울수록 뒷심을 발휘해온 특유의 생명력 때문이다. 

 개성상인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짠물 경영’이다. 예로부터 ‘외할머니 떡도 싸야 사먹는다’는 게 개성깍쟁이다. 한국의 3대 깍쟁이(서울, 수원, 개성) 중 첫손에 ‘개성깍쟁이’를 꼽을 정도다. 전재준(82) 삼정펄프 회장이 집무실에서 40년 된 소파와 30년 된 우산을 쓰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도 초기 경비를 줄이느라 직접 지게를 지고 제품을 날랐을 정도다. 이는 현대 경영 기법 중 ‘이익 중심 경영’으로 계승되고 있다.

 반면 개성상인들은 돈을 쓸 때는 과감하다. 특히 사람 투자에 인색치 않은 게 공통점이다. 오늘로 치면 ‘인재 경영’의 모범인 셈이다. 40년 된 소파를 쓰는 전재준 회장은 2003년 시가 300억 원대 안양시내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 쾌척하더니 지난해에는 성균관대에 50억 원대 부동산을 내놓으며 나눔의 경영을 실천해 왔다. 

 ‘내 입에 거미줄을 쳐도 돈을 꾸면 제 날짜에 이자까지 쳐서 갚는다’는 개성상인들의 신용 철칙은 현재에 와선 ‘신뢰 경영’의 전형으로 비쳐진다. 특히 한 우물을 팠던 개성상인들은 오늘로 치면 ‘전문 기업’의 모태가 돼왔다. 이 밖에 ‘남의 돈으로 장사하지 말라’는 덕목은 ‘무차입 경영’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 개성상인 4인에게 그들만의 불황 타개법을 들어 보자.

1. 한 우물 고집



고홍명 한국빠이롯드만년필 회장



 “돈만 좇았다면 은행 몇 개는 가졌을 터”
 

 
울 종각 4거리 보신각 옆을 지나다 보면 샛노란색 바탕에 검정 글자로 새겨진 ‘빠이롯드’란 간판이 눈에 띈다. 벌써 51년 된 낡은 간판으로 ‘뚝심’의 표상처럼 서 있다. 이곳은 국내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년필을 만든 한국빠이롯드만년필사다. 

 빠이롯드빌딩 5층에서 만난 고홍명(80) 회장. 그는 개성상인 1세대 중 드물게 현직 회장으로 근무 중인 송상이다. 고 회장은 접견실에서 명함을 나누자마자 묻지도 않은 말부터 꺼내며 인터뷰에 임했다. “원래 송상들은 밖으로 나서는 걸 싫어합니다. 묵묵히 자기 사업 잘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에 와선 무슨 단체장에도 나서고 매스컴에도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원…”

 그는 “기업가는 고저(그저의 북한 사투리) 말이 아닌 사업으로 보여줄 따름”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러고선 “후진들에게 송상의 얼이 도움이 된다면 생애 마지막일지 모르는 인터뷰를 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곁눈질하다간 본업 날리지’ 

 
“요즘 같은 불황일수록 전문 기업이 대접받지요. 한 우물을 깊게 파야 뿌리가 튼튼한 법이에요. 남들이 ‘돈’ 된다고 하면 이쪽 기웃거렸다, 저게 된다고 하면 저쪽으로 한눈이 팔려서야 어디 전문 기업이 되겠습니까. 돈 되는 업종을 택했더라면 벌써 은행 몇 개쯤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때 자진 입대, 수도사단에서 2년간 중위로 참전한 직후인 1954년 신화사를 설립했다. 그 후 지금까지 만년필 전문 업체로 한국빠이롯드를 이끌어 왔다. 잉크, 볼펜, 사인펜 등 필기구 관련 사업만 벌써 반세기를 지켜온 셈이다. IMF 당시 은행 비상임이사로 재직할 만큼 은행 주식이 많았는데도 금융업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1973년 박두병 씨(두산그룹 창업주),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과 함께 한양투자금융에 공동 투자한 적은 있다).

 송상으로서 그의 첫째 원칙은 ‘우물을 파되 깊게 파라’다. 한때 다른 쪽에 곁눈질하다 실패한 기억도 이 같은 철학을 더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1982년 1회용 라이터 전문 업체인 일본도카이(TOKAI)정기와 함께 한국도까이정기를 세웠다가 7년 만인 1989년 사업을 접은 다음부터는 다른 사업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가슴 아픈 얘기도 털어놨다. “외아들(고석진, 작고)이 한때 전자 쪽에 손을 댔지요. 미국에서 공부한 티를 낸 거죠. 반대했지만 막을 수가 없더군요. 그때 날린 돈만 한 2000억 원이 넘을 겁니다. 사업만 잃었으면 마음도 덜 아팠을 겁니다. 그 녀석 사업 망하고 속상했는지 술만 먹더라고요. 그러더니 간이 상해 54살 나이에 먼저 세상을 등졌습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도 인간성 칭찬 

 
지난 2003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 인수를 발표한 직후에는 최동수 조흥은행장이 찾아왔다고 한다. 고 회장이 조흥은행 대주주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최 행장이 와서는 ‘100년 역사의 조흥은행이 신한에 넘어갔다’며 면목이 없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위로해 줬어요. ‘은행은 지점이 많아야 하는 거예요. 조흥이 신한보다 조직이 더 크니까 잡혀먹힌 게 아니라 조흥이 신한을 차지한 셈이죠.’ 그랬더니 최 행장이 눈물을 그치더라고요.”

 그는 한때 조흥은행 주식 2000만 주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지금은 “한 200만 주쯤 될까”라며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도 한미은행을 빼면 신한을 비롯해 시중 은행 주식을 소유 중이라고 한다. 

 고 회장의 두 번째 철학은 ‘남의 돈 갖고 장사할 생각 말라’다. 그는 “은행 돈은 남의 돈”이라며 “자기 돈이 아닌데도 제 돈처럼 쓸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고 회장은 사업 후 51년간 은행 돈을 한 푼도 끌어 쓰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논리로 치면 고리타분할 경영 스타일로 손가락질할지는 몰라도 그는 평생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사실 사업하다 보면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자기 돈으로 완벽하게 시작할 수도 있지만, 하다 보면 또 필요한 게 사업 자금이지요. 이때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욕심을 내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는 “IMF 때 정말 울고 웃었다”고 말한다. IMF 때 그 많던 은행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일과 서울 천호동 공장 터가 강동구에 수용됐을 때 현찰 800억 원을 손에 쥔 일이다. 그는 “만일 만년필 외에 다른 사업을 했다면 분명 사업 자금 때문에 그 공장 터를 팔았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전라도 사람만 뽑는 독특한 용병술

“당시 김충환 강동구청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와서는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라며 ‘빠이롯드공원’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서울 알짜배기 땅을 빠이롯드로 이름 지으면 나야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겠냐고 했지요.” 

 그는 장사도 좋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개성상인 정신을 실천한 셈이다. 현재 그곳은 ‘천호동공원’으로 명명돼 있다. 그의 세 번째 경영 철학을 묻자 “먼저 인간이 되라”는 공자님 말씀을 꺼낸다. 고 회장의 ‘인간론’에는 세 가지 항목이 들어간다. “첫째가 겸손입니다. 둘째는 항상 자세를 낮추라는 거고요. 셋째는 남의 말을 끝까지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생활이 평안해지고, 사업도 잘 됩니다.” 실제 그는 항상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다. 인터뷰 내내 중국 후진타오 주석처럼 자세를 낮췄다. 그러면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의 일화를 얘기해 줬다.

 “그 분(이병철 회장)이 저를 예쁘게 봤는지 한번은 삼성가 장남인 이맹희 씨와 저, 둘만 부르더군요. 이건희 회장은 그때 불려오지도 않았죠. 그 자리에서 전자사업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때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생겼죠. 그리고 제 조카(최당)를 삼성전자 초대 공장장으로 세우더군요. 아마도 저의 됨됨이를 괜찮게 보신 모양입니다.” 고 회장은 독특한 용병술을 써왔다. 친구는 경상도 사람이 많았던 그가 뽑은 인재 중 99%는 호남 출신이었던 것. 개성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유를 묻자 “과거 조선 때부터 귀양살이했던 양반 자손이라 가장 똑똑하다”는 게 답이다. 인터뷰 전날인 2월3일에도 직원 1명을 채용했는데, 조선대 출신을 뽑았다고 한다.

 그는 요즘도 열정적으로 사업을 한다. 개성상인 1세대 중 매일 출근하는 오너는 그가 유일하다. 지난 2월6일에도 태국을 다녀왔다. 한국빠이롯드는 현재 태국과 베트남에 해외 공장을 두고 있는데, 이 때문에 팔순 나이에도 해외 출장을 1년이면 10회씩 다닐 정도다. 왜 그렇게 많이 다니느냐고 묻자 “태국어와 베트남어를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는 개성상인치곤 드물게 가방끈이 길다. 한양대 경제학 박사로 현재도 한국경제학회 정식 멤버다. 일본 유학파 출신(메이지대 법대)답게 일어도 능통하다. 1990년대 초에는 하와이 유학도 다녀올 정도로 학구열이 높다. 중국어까지 합치면 5개 국어를 하는 셈이다.



 올 구정때도 태국 출장 다녀와

 그는 팔순인 지금도 여전히 골프를 친다. 그러면서 “온리(Only) 9홀”이라고 덧붙인다. 가는귀가 조금 먹었고 고질인 당뇨 증세만 빼면 여전히 건강 체질이다. 부인인 함은숙(80) 여사는 한국빠이롯드만년필 사장으로 있다. 

 그는 사업하려면 최고가 되라고 말한다. 현지 공장이 있는 태국을 잘 알아야 한다며 태국 노동법을 1년에 3번을 독파했던 일화도 들려준다. 그는 “지금도 일본 회사들이 태국 노동법과 관련해서는 나한테 자문을 한다”며 웃는다. 고 회장은 “한국은 노동조합이 세다는 외국의 비판을 들을 땐 안타깝다”며 “이 얘기는 꼭 넣어달라”고 말했다. “한국빠이롯드는 노동쟁의 한 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결은 월급을 제때 주는 겁니다. 임금이 많고 적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한평생 사업해온 제 결론입니다.” 그의 아호는 송강(松江)이다. 송도(개성 옛이름)의 물이란 뜻으로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이란다. 그 친구들이란 고 우상기 신도리코 회장과 ‘현금왕’ 윤장섭 성보실업 회장 등이다. 

 그는 요즘도 아침 10시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데, 퇴근 후에는 꼭 소공동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며 체력을 다지고 있다. 



2. 우보경영의 대가 



고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



 “걸음이 더뎌도 내실부터 챙겨라”
 

 “이 사람아, 우리만 좋아서야 되겠는가. 남들 생각도 좀 해야지.”

 1986년 서울 뱅뱅사거리에 18층짜리 사옥을 올린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95년 작고). 그는 자기 사옥을 ‘한일시멘트빌딩’으로 이름 짓지 않았다. 대신 우덕(友德)빌딩이라 지었다. 이유인즉슨 그 빌딩에 입주할 타사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우덕은 그의 공장이 위치한 충북 단양 우덕리에서 따온 그의 호이자 ‘친구의 덕’을 뜻하는 이름.

 현재 6개 계열사를 합쳐 1조2000억 원대 그룹 매출을 올린 한일시멘트의 저력은 바로 허 회장의 ‘인간 존중’ 정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 1961년 한일시멘트가 설립된 것도 당시 20여 명으로부터 공동 출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 도움을 받은 대표적 지인이 같은 개성상인들인 이정림 대한유화공업 회장과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등이다.

 한일시멘트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계나 금융계에선 우량 기업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회사다. 부채 비율이 18%에 불과하고 44년간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여기에는 창업자 허 회장의 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 ‘걸음이 느려도 튼튼하고 꾸준한 보폭으로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른바 ‘우보(牛步) 경영’이다.

 70년대 초 한일시멘트가 탄탄대로를 걷고 있을 때 허 회장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다. 금융이나 유통 등 신사업 진출 제의가 물밀듯 찾아왔던 것. 그때 허 회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기업이 이윤만 생각해서야 되겠나. 지금은 국가기간산업이 더욱 필요한 때다”며 일언지하에 자르자 참모들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는 게 한일시멘트측 얘기다.



 유보율 2000% 알짜 경영 

 
덩치만 키우기보단 ‘내실’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 같은 돌다리 경영은 IMF 쇼크 때 오히려 사세를 키운 한일시멘트의 비결이다. 미래 리스크에 대비한 내부 유보율은 무려 2001%(2004년 9월 말)에 달한다. 금융 부담률은 0.1%에 불과하다. 금융권에 A급 고객이 되고 있는 비결이다. 항간에서 나오는 ‘너무 보수적 경영이 아니냐’는 비판도 허 회장은 웃어 넘겼다.

 시멘트를 골간으로 한 한일시멘트는 그렇다고 한 우물만 판 기업은 아니다. 최소한 10년 앞을 본 미래 경영도 펼쳤다. 변화에 민감한 허 회장의 발 빠른 변신이 돋보인다. 허 회장은 한국 시멘트산업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러나 1970년대 국내 최초로 인도네시아에 철강회사를 설립한 국내 철강계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 후에는 산지 개발에 뛰어들어 해발 800미터가 넘는 대관령에 낙농목장을 조성, 우리 낙농업계의 산파역도 해냈다. 80년대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랜드를 건설하기도 했고, 녹십자제약을 세워 제약업계 선도 기업인이 되기도 했다. 업종은 다양했어도 경영은 내실 위주로 진행한 것은 업종을 막론하고 공통된 모습이다.

 한마디로 그는 변신의 귀재였다. 그럼에도 ‘산업보국’을 앞세운 시멘트 기본 업종을 튼튼히 하는 전략은 바뀌지 않았다. 특히 10년 앞을 내다본 경영은 본업 격인 시멘트에서 꽃을 피웠다. 91년 국내 최초로 출시한 건축 자재 ‘레미탈’의 성공이다.

 레미탈은 재래 시공 방식이 주류였던 우리 건설시장을 선진국처럼 전문적이고 기계화된 시공 방식으로 바꿔놓은 제품. 건축 현장에서 물만 섞어 공사를 할 수 있는 건축 자재다. 출시 후 10여 년간 20~30%씩 성장을 거듭한 레미탈은 2003년 발명의 날에 유수 IT기업을 제치고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을 정도가 됐다. 지난해만 해도 레미탈은 단일 아이템으로 회사에 1000억 원이 넘는 매출액을 안겨다줘 효자 역할도 톡톡히 했다. 김수강 한일시멘트 홍보팀장은 “향후 5년 내 제품 종류를 일반 건축용에서 토목 구조물의 보수 보강재와 리모델링용 등 60여 종으로 늘려 세계 경쟁력을 갖추겠다”고 비전을 밝힌다.



 선친 ‘성공보다는 올바로 살라’

 허 회장은 1915년 개성 인근 개풍읍에서 태어났다. 송도중학교 졸업 후인 16세 때 이미 사업가 길을 나섰다. 그는 한학자였던 부친으로부터 “사업 성공에 연연치 말라. 실패해도 괜찮으니 올바른 상술을 터득하는 데 주력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간 존중 철학이 몸에 뱄다. 6·25 전쟁 때 홀로 월남해 부산에서 수산물 판매업으로 종자돈을 모은 그에게 전쟁은 큰 기회였다. 전쟁 후 복구사업 때 석회석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1960년 상경한 그는 한국양회판매를 설립한 후 이듬해인 1961년 한일시멘트를 세웠다. 특히 그는 가족주의 경영을 펼쳤다. 한일시멘트에는 160억 원에 달하는 사내 근로복지기금이 있다. 주택 구입 시 1000만~2000만 원을 저렴하게 대출해 주고, 1인당 자녀 2명에 한해 대학교까지 학자금을 대주는 용도다.

 허 회장은 말 그대로 가족 경영을 해왔다. 장남인 정섭 씨가 한일시멘트 명예회장, 3남인 동섭 씨가 현재 한일시멘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또 2남 영섭씨는 녹십자 회장, 4남 남섭 씨는 서울랜드 회장, 5남인 일섭 씨는 녹십자 부회장이다. 가족이 모두 계열사 경영을 해도 한일시멘트는 지급 보증이나 순환 출자가 없는 회사로 알려졌을 만큼 공사 구분이 분명하다는 평이다. 65년 노조가 세워졌지만 40년간 노동쟁의가 없다. 특히 일가족이 경영에 참여해도 노조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큼 투명 경영이 강점이다.

 평소 허 회장은 “글 무식이 아니라 인(人) 무식을 두려워하라”는 지론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는 개성상인 특유의 전통을 계승한 것. 현재 선친을 이은 허동섭 한일시멘트 회장은 “우리 회사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해 왔다면 지금과 같은 내실 경영은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신뢰와 내실을 앞세운 인간 존중 경영이 한일시멘트를 키워낸 키워드인 셈이다.



3. 신용이 최고다



고 서성환 태평양 창업주



 “돈은 잃어도 신뢰를 잃진 마라”
 

 방된 지 20일 후인 1945년 9월5일 서울 남창동에 화장품 회사가 들어섰다. 이 회사가 2004년 매출액 1조1053억 원에 순익만 1499억 원을 올린 국내 1위 화장품사 태평양이다. 고 서성환 태평양 회장이 만 22살 나이에 창업한 회사다. 

 그의 호는 장원(粧源)이다. 해석하자면 ‘화장품의 본류’다. 이름에까지 자기 사업을 새겨 넣을 만큼 그는 평생을 화장품에 바쳤다. 그가 후세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신용 제일’ ‘기술 제일’ ‘한솥밥 정신’ 세 가지다.  1923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서 회장이 성장한 배경은 개성이다. 화장품과 연을 맺은 때도 1939년 개성 중경소학교 졸업 직후인 16세 때부터다.

 가루분과 구리무(크림의 일본식 발음)을 내다팔면서 개성상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부산 피란 때 북 멘 채 행상 

 당시 그의 부친인 고 서근배 씨가 운영하던 창성상회(재래식 화장품을 가내수공업 형태로 운영하던 잡화상) 사업을 도왔던 것. 그러나 아버지 회사의 점원 노릇만 한 건 아니다. 1943년 약관 나이로 당시 개성 내 최대 백화점인 고려백화점에 화장품 코너를 개설한 건 서 회장 작품이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그는 서울로 내려왔다.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씨가 대구에서 서울로 왔고, 대농 박용학 씨가 강원도 통천에서 간장 장수를 하다 서울로 올라온 것과 마찬가지다. 동양제과 창업주 이양구 씨도 과자 행상을 하다 서울로 올라왔던 때와 비슷하다. 

 6·25 전쟁이 터지자 그의 활동 무대는 피란처인 부산으로 옮겨졌다. 부산 초량동에 미니 공장을 세워 직접 고깔모를 쓰고 큰 북을 멘 채 ‘동동구리무’를 외치며 팔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내놓은 상품이 일명 ‘ABC포마드’. 해방 후 화장품 업계 최대 히트상품이었다. 

 태평양 50년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 도매상들이 태평양 공장 앞에서 ‘제품을 내놓으라’며 장사진을 쳤을 정도”로 ‘ABC포마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때 그의 장사 철학이 굳어졌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고객과의 신용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얘기다. 

 당시 피란지 부산은 사람은 넘쳐나는데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 당연히 인플레가 극심했을 터다. 그러나 그때 서 회장은 ABC포마드 출고 가격을 단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인플레로 인한 원가 상승을 스스로 끌어안은 것이다. 대신 도매상들에게도 판매가를 올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이때 그의 유명한 사업 신조가 나왔다. “한번 잡은 손님이나 거래처는 절대로 놓치지 말라.”

 한국전이 끝나자 상경한 그는 1956년 8월 공장을 한강로2가로 옮겼다. 현재 태평양 본사가 있는 자리다. 김형길 홍보팀장은 “62년 영등포 공장 준공 시 자금난으로 부도설이 나돌았을 때 거래처에서 십시일반으로 선수금을 내놓아 부도 위기를 넘긴 것도 평소 쌓아놓은 신용 덕분이었다”고 소개한다.

 70년대 화장품 유통의 신기법인 이른바 ‘아모레 아줌마’도 서 회장의 신용 제일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물건 값을 일시불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할부로 받은 것. 눈앞의 돈보다는 신뢰를 쌓는 차원에서 고객 편의를 꾀한 셈이다.

 서성환 회장 하면 화장품과 함께 녹차 시장의 선구자로 꼽힌다. 커피 대신 한국의 녹차를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1978년 제주도 한라산에 녹차밭을 조성했다. ‘녹차 100만인 시음대회’를 통해 100만 명에게 녹차를 공짜로 줬다. 회사 입장에서 봤을 땐 엄청난 부담이었다. 당시 태평양 임원진은 녹차 사업을 포기하자고 건의했을 정도다.

 그때 서 회장이 한마디 던졌다. “태평양은 제품이 아닌 문화를 파는 회사다.” 이에 임원진의 반대는 쏙 들어갔고 현재 태평양은 국내 1위의 녹차 전문 회사로 우뚝 섰다. 이 역시 이익보다는 마음을 사는 개성상인 특유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 회장의 두 번째 덕목은 바로 품질 제일주의다. 그는 1999년 참경영인상 수상 때 이렇게 말했다. “제조업체를 하는 사람은 기술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둬야 합니다.”

 그는 창업 후 9년 만인 54년 후암동에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 그가 품질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58년 3월 태평양이 들여온 에어 스펀지 기계 값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당시 도입 가격은 160만3800원. 쌀 한 가마 값이 1000원 하던 시절에 쌀 1600 가마니 값을 지불한 셈이다.

 고품질 위해 값비싼 원료만 쓴다 

 특히 그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우수한 제품은 꼭 사갖고 들어와 연구진에게 “우리도 만들자”며 기술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59년 당시만 해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의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한 것도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신조는 무엇보다 ‘좋은 원료를 쓰자’였다.

 당시 세관원이 “태평양이 수입하는 원료는 부피가 적은데도 오히려 금액은 타사보다 몇 십배나 비싼 제품들”이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같은 품질 우선 정책은 국내 최초의 화장품 수출로 이어졌다. 1964년 8월 에티오피아 수출을 시작으로 태국(1970년), 미국과 독일(1973년)로 이어졌다. 이는 1000여 년 전 고려 개성상인이 중동까지 인삼을 수출했던 것에 비견되기도 한다. 1964년 당시 국내 수출품은 가발과 미역, 수산물이 고작이었던 시대에 공산품을 수출한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다.

 서 회장의 연구 인력에 대한 대접만 봐도 그렇다. 현재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태평양기술연구원 인력은 250명. 전체 3150명 직원 중 7~8%가 R&D(연구개발) 인력들이다.

 서 회장이 던지는 세 번째 철학은 ‘한솥밥 정신’이다. 그는 평소 ‘식구’라는 말을 많이 썼다. 창업 초기 본사 건물 1층에 자신과 가족들이 살고 3층에는 종업원들이 살도록 했다. 이른바 ‘가족주의 경영’이다. 특히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며 식사를 자주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의 아들 서경배 사장에까지 한솥밥 문화는 이어진다. 2002년 ‘호칭 파괴 선언’도 같은 맥락이다. 피란처에서도 사업이 번창해 오늘과 같은 대기업이 된 것도 종업원들이 피란처까지 찾아와 내 일처럼 돕고 힘을 합쳤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나눔의 상도도 보여줬다. 일찍이 1963년 중앙대에 성환장학금을 설립했고, 1973년에는 사재를 털어 태평양화학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1976년에는 태평양학원을 세워 저소득층의 자녀 교육 향상에 앞장섰다. 그가 작고한 2003년 유족들은 50억 원 규모의 기금을 만들어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현재 태평양을 이끌고 있는 그의 차남 서경배 사장은 “고객은 태평양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고 강조한다. 서 사장은 선친의 경영 철학 중 첫째 덕목인 신용을 고스란히 계승한 셈이다. 



4. 절약의 달인



우상기 신도리코 전 회장 



 “돈 아끼되 사람 투자는 쫀쫀하게 굴면 못쓰지” 

 
울 성수2가에 있는 신도리코 본사는 외관은 딱딱한 공장인데, 내부로 들어가면 ‘문화 공간’이라는 착각이 든다. 미술관에는 수억 원대 작품들이 전시돼 있고, 체육관에는 실내 농구장도 있다. 현대식 휴게실에 옥상에는 대나무 정원도 마련해 뒀다. 충남 아산 공장은 아예 본관 전체 70%가 극장과 노래방 등 복리후생 공간으로 꾸며졌다.

 왜 그럴까. 신도리코 창업주인 고 우상기 회장(2002년 작고)의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라’는 인간 중심 경영 철학 때문이다. 그는 생전 ‘삼애정신’을 실천해온 경영자다. 삼애란 국가와 회사,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국가에는 세금을 많이 내고 회사는 이익을 많이 남기며 직원에는 풍족한 복리후생을 제공하라는 메시지다. 



 허튼 곳에 돈 쓰지 말라

 이 때문인지 1960년 신도교역으로 출범한 신도리코에는 45년간 노조가 없다. 대신 각 부서 1인씩 대표로 구성된 ‘사원복지회’가 있다. 복지회 결정 사항은 100% 회장에 직보되는 시스템이다. 근무 환경도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전 직원이 착용하는 작업용 차림이 단적인 사례다. 생산직과 사무직 구분 없이, 사장과 임원들까지도 파란색 실로 소속과 이름이 박혀 있는 흰색 상의와 바지를 입는 것이다.

 사내에선 지금까지 감원이란 게 없다. 인위적 구조 조정은 철저히 배격해 왔다. 회사 밖으로는 1973년 신도리코장학회를 비롯, 1984년 가헌과학기술재단(가헌은 우상기 회장의 호) 등 4개 재단을 설립해 ‘사람’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해왔다. 신도리코 공장이 문화 공간으로 바뀐 때는 IMF 쇼크 때였다. 돈이 마르던 그때 우 회장은 역발상으로 “지금이 투자 적기”라며 성수동 본사와 공장 증축에 대규모 투자를 한 셈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과감했지만 우 회장은 근검절약의 달인이다. 1964년 국내 최초 복사기 ‘리카피555’가 시장에 나왔을 때 일이다. 당시 복사기 유통은 지게꾼 몫이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지게를 짊어지고 동사무소와 관공서 등에 복사기를 실어 날랐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우상기 회장의 두 번째 메시지는 “돈 빌려 장사하지 말라”는 철학이다. 그는 평소 ‘3무 경영’을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적자와 차입, 어음 3가지를 없애라”는 말이다. 이는 무차입 경영을 통한 재무 안정성에서 비롯된 신도리코의 기본 전략이다.



 100% 현금 결제만 하라 

 
1919년 개성 출생인 그는 1960년 창업 때부터 무차입 경영을 실현해 왔다. 이는 장남인 우석형 회장(50)이 바통을 이어받은 현재도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

 2004년 9월 말 현재 부채 비율은 16.6%에 불과하다. 이 비율도 항목상 부채일 뿐이다. 은행 차입금 제로에 외상값(매입채무), 예수금, 미지급 배당금이 전부다. 금융 부담률은 1999년부터 아예 0%다. 반면 유보율은 962.6%에 달한다. 현금 보유액도 25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초우량 기업인 셈이다.

 재무 안정성을 토대로 신도리코는 3:3:3:1 원칙을 수행 중이다. 회사 이익 중 재투자에 30%, 주주들에게 30%, 종업원에게 30%, 10%는 사회 환원에 써야 한다는 원칙이다. 김성웅 홍보실장은 “1988년 이후 배당률이 40%대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신도리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한 우물 정신’이다. 우상기 회장의 ‘전문가 기업’에 대한 의지 때문이다. 현재 신도하이네트, 신도휴스템, 신도에이스 등 8개 계열사가 있지만 모두 사무자동화 관련 회사들이다. 우 회장은 한마디로 사무기기에 한평생을 바쳐온 기업가다. 1964년 국내 기술로 첫 복사기를 만든 이후 73년에는 전자계산기, 81년에는 팩시밀리를 개발해 왔다. 팔방미인형 기업보다는 전문가 기업 우선 원칙을 철저히 적용해온 결과다.

 1982년 업계 최초의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게 그 원동력이다. 현재도 직원 중 10%인 200여 명이 석박사급 연구개발 인력이다. 이들이 보유한 특허 취득 건수만 1500여 개에 달한다. 이 같은 품질 제일주의 전략은 신도리코가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하게 한 일등공신이다.

 현재 아날로그·디지털 복사기 부문 점유율은 신도리코가 약 46%로 확실한 선두다. 한국후지제록스, 캐논 등 2~3위와 격차도 크다. 특히 45년간 적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1999년부터는 해마다 매출액과 이익에서 신기록을 갱신 중이다.

 매출액의 경우 99년 2602억 원에서 지난해 6200억 원(추정)으로 5년 사이 2.4배나 덩치를 키웠다. 순익은 2001년 490억 원 → 2002년 629억 원 → 2003년 633억 원으로 이익 규모가 매년 조금씩 늘어났다.

 2002년 작고한 우상기 회장의 뒤를 이은 장남 우석형 회장은 개성상인 전통을 잇고 있다. 그는 취임 후 “복사기 회사에서 디지털 네트워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면서도 “선친의 뜻을 이어 사무자동화 전문 기업으로 세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는 매월 1일 임직원 앞에서 ‘월례 경영 설명회’를 개최한다. 지난 한 달간 사업 결과를 들려주는 자리다. 정직과 투명 경영을 통해 부친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