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종희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  서울대 의대 박사, 현 서울대병원 정밀의료센터장·희귀질환센터장, 전 진료협력센터장,  전 일본 국립신경센터 연구 전임의· 미국 컬럼비아대학 신경과 연수 사진 전효진 기자
채종희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 서울대 의대 박사, 현 서울대병원 정밀의료센터장·희귀질환센터장, 전 진료협력센터장, 전 일본 국립신경센터 연구 전임의· 미국 컬럼비아대학 신경과 연수 사진 전효진 기자

“엄마·아빠 잘못 아니에요. 최대한 할 줄 아는 게 많은 아이로 키워봅시다.”

6년 전, 서울대병원 어린이병동에 한 보호자가 환아 없이 찾아왔다. 아이는 소아 희귀질환 국내 최고 권위자인 채종희 교수로부터 ‘듀센형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고 1년에 2번씩 꾸준히 진료를 받아왔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채 교수가 진단을 내릴 때 했던,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할 줄 아는 게 많은 아이로 키우자는 약속을 더는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전 세계 8000여 개 희귀질환 중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은 5%에 불과하다. 완치보다는 관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다. 치료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채 교수에게 보호자는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자식한테 미안한 마음은 없게 해주셨어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채 교수는 같은 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흩어진 데이터를 한곳에 모은 인공지능(AI) 기반 연구 플랫폼이 있다면 환자, 보호자, 의료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희생에 연구가 쌓여 희귀질환 분야 진료 시스템이 진화하고 있다. 희귀질환의 80%는 유전자 돌연변이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데 환자뿐 아니라 유전자가 영향을 미칠 가족계획까지 통합적 관리를 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지난해 5월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를 위해 써 달라며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삼성의 기부금 중 1500억원은 소아암, 600억원은 희귀질환, 나머지 어린이병 연구에 900억원이 사용될 예정이다.

희귀질환 분야 명의로 꼽히는 서울대병원 채종희 희귀질환센터장(교수)을 3월 23일 오전 임상유전체의학과에서 만났다. 일반적으로 소아청소년과는 10여 종류의 질병군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하면서 환자를 보지만, 이날 채 교수에게는 60여 종류의 각자 다른 질병이 있는 환자 9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채 교수는 “환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환자, 의료진, 보호자가 모두 함께 호흡을 맞춰 끝까지 완주하는 게 목표”라면서 “‘연구의 시간’이 쌓이면 미진단질병도 해법을 찾을 수 있듯, 지속가능형 연구플랫폼을 구축해 후대가 더욱 손쉽게 희귀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다 희귀질환을 연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주 전공은 소아신경학 근육병이다. 희귀질환 중 근육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다보니 희귀유전자 질환 연구까지 분야가 확대됐다. 일본 국립신경연구소에서 ‘노나카근육병’을 발견한 희귀병 대가 이쿠야노나카 선생님과 함께 연구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과 우리나라가 다른 점이 있나.
“일본은 미래 세대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근육병 환자의 조직검사 결과를 조직은행으로 만들어 연구 발판을 만들었다. 우리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겠지만, 디지털 기술 능력을 빌려 희귀질환 연구 AI 플랫폼을 만든다면 후배들이 큰 도움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희귀질환은 진단부터 장벽에 막힐 때가 있지 않나.
“의료진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가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을 떠도는 ‘진단방랑(diagnostic odyssey)’을 줄이는 일이다. 환자를 처음으로 진료할 땐 무조건 15분 이상 본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믿음을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희귀질환은 한 의사가 오래 종합적으로 볼 때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확률이 커진다. 내 진료를 받는 모든 환자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저장해두고 틈날 때마다 빠진 건 없는지 본다. 미세한 움직임도 진단과 해결책을 찾는 단서가 된다.”

진단을 내리면 의사 입장에서 어떤 마음이 드나.
“치료 방법이 있으면 굉장히 좋겠지만, 현대의학으로도 희귀질환의 95%가 아직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 유전자 변이가 원인이라고 하면 부모가 가장 괴로워한다. 하지만 부모는 멀쩡한데 아기만 돌연변이로 희귀한 병에 걸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진단명이 나오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엄마 아빠 잘못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실수하신 겁니다’라고. 그리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중 가장 많이 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보자고 말하면 부모도 울고, 나도 울 때가 많았다.”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인을 알면 불확실성이 해소가 된다는 점이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관리 측면에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일례로 대개 첫째 아이가 유전병이 있으면 부모는 둘째 낳기 꺼려하는데, 이런 것은 현대의학기술로 조절할 수 있다. 착상전 유전진단법(PGD)을 통해 수정란을 만들 때부터 질환이 배제되도록 한다면 미래 자녀계획도 가능하다.”

서울대병원은 지난해 정밀의료센터와 희귀질환센터를 통합해 국내 최초로 임상유전체의학과를 출범했다. 진료실 내부는 타 진료과와 비교해 최대 세 배 정도 넓고, 컴퓨터 모니터도 10대 이상 있었다. 한 진료실에 내과, 소아청소년과, 신경과, 진단검사의학과 등 여러 학과 교수가 동시에 들어와 통합 진료를 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매주 전 세계 희귀질환 연구진끼리 모이는 줌(Zoom) 회의도 열린다. 소아 환자를 데리고 있는 서울대병원과 성인 환자를 연구하는 해외 사례를 퍼즐처럼 맞춰보면서 원인과 진단법을 찾는다. 클리닉에 온 환자를 의사 한 명이 보는 게 아니라 유전 질환에 특화돼 있는 ‘드림팀’이 진료하고 있었다.

유전자 기반 융합진료를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희귀질환은 처음에는 1개의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변하거나 여러 합병증이 생긴다. 의사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모든 것을 다 관리해야 한다. 여러 과가 모여서 협진을 하는 이유다. 협진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힐 때도 있다. 한달에 두 번씩 외래진료가 끝나는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전 세계 27개국 희귀질환 관련 의료진들과 온라인 줌 회의를 한다. 환자 진단과 문제 해결을 위한 희귀질환 유전체 미팅이다. 이는 치료제 개발을 위한, 혹은 치료약제 선택을 위한 단서가 된다.”

진료 목표는 무엇인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을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지 환자는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싶고, 같은 상황의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정보를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올해부터 극희소질환에 대한 정보 구축을 본격적으로 해보려 한다. 임상 정보와 연계된 유전체 정보를 한곳에 모으는 ‘SNUH 바이오포털’을 구축할 예정이다.”

예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마침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부금 덕분에 이런 연구 플랫폼 구축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정말 감사한 기부다. 사실 소아청소년과는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미국 어린이병원들이 다 기부금으로 이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부럽기도 하다. 기부금은 미래를 위해 써보려 한다. 치료제를 연구하는 데 쓸 수도 있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쓸 수도 있고 방법은 많다.”

목표가 있다면.
“일반적으로 부모님이 희귀질환에 걸리면 자식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하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렇다면 부모는 포기를 못 한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모두 함께 호흡을 맞춰서 달리는 느낌으로 진단부터 치료까지 함께 가려 한다. 연구도 지속할 것이다. 계속 찾고 질문할 것이다. ‘혹시 이런 환자 보셨어요?’라고.”

전효진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