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영 KB국민은행 금융 AI 센터장서울여대 컴퓨터학과,전 한글과컴퓨터 최고기술책임자(CTO) 서울 여의동 KB국민은행 여의도전산센터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오순영 KB국민은행 금융 인공지능(AI)센터장이 답변하고 있다.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오순영 KB국민은행 금융 AI 센터장서울여대 컴퓨터학과,전 한글과컴퓨터 최고기술책임자(CTO)
서울 여의동 KB국민은행 여의도전산센터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오순영 KB국민은행 금융 인공지능(AI)센터장이 답변하고 있다. 사진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나는 여성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도 아니고, 석·박사가 아닌 학사 출신이다. 임원이면 으레 그럴 거라는 게 하나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희귀해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엉뚱하거나 모난 돌들이 잘나가는 시대다.”

오순영(45) KB국민은행 금융 인공지능(AI)센터장(상무)은 한글과컴퓨터(한컴) 첫 여성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이다. 흔히 정보기술(IT) 업계 임원이라 하면 떠오르는 남성, SKY·카이스트(KAIST), 석·박사 학위 소유자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 센터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공부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며 “결국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게 관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1977년생인 오 센터장은 서울여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한 후 2004년 한컴에 입사했다. 그는 한컴에서 대표 상품인 한컴오피스의 호환성을 향상시키고, AI와 음성인식 등 신사업을 이끌었다. 2019년 한컴 창사 이래 29년 만에 첫 여성 CTO가 된 오 센터장은 지난 6월 IT 업계를 떠나 금융사인 KB국민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 센터장이 몸담은 KB 금융AI센터는 KB국민은행과 KB금융지주의 겸직 부서로, 금융 서비스와 AI 기술을 접목한 서비스 개발이 주 업무다. KB국민은행 직원들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AI 서비스를 발굴하고, KB금융지주 AI 관련 가이드라인·정책 등 전략을 기획한다. 최근엔 고객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AI 금융비서’를 개발했다.

오 센터장을 최근 서울시 여의동 KB국민은행 여의도전산센터에서 만나 금융인을 꿈꾸는 이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오 센터장과 일문일답.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 달리 금융 업계를 선택한 배경은.
“사회생활을 닷컴벤처에서 시작하고, 한컴에서 17년가량 일하면서 다음은 어디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빅테크, AI 스타트업 등이 아닌 금융사로 간다고 하자 주변에선 IT 업계의 자유로운 환경과 다른 조직 문화, 금융 관련 지식 부족 등을 꼽으며 반대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점들이 금융 업계를 선택한 이유였다. 스스로 불나방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어렵고 잘 모르는 분야가 오히려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기존 금융 업계 출신과 다른 관점으로 발상의 전환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이 선택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 자칫 자만할 수 있는 시기에 겸손하게 듣고 배울 기회가 됐고, 금융 AI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해 해볼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한 채용박람회에서 경력은 사다리가 아닌 정글짐이라고 한 발언이 인상 깊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변화한다. AI 등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이 실제 산업계에서 활발하게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한 데이터, 충분한 컴퓨팅 파워, 충분한 네트워크 속도 등으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길을 올곧게 가야 할 분야도 있겠지만, 다른 산업 간의 활발한 융·복합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다른 분야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중요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 당장 내게 의미 없을 것 같은 일도 언제 쓰임이 있을지 모른다. 정상을 향해 다양한 형태로 올라갈 수 있는 정글짐이 지금 시대에 경력을 쌓아가는 데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정글짐을 잘 타는 방법은.
“일을 골라서 한다기보단, 오히려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맡고 싶어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맡은 일을 어떻게 해야 자신과 회사에 의미 있을지 늘 고민하고 노력했다. 단순한 일, 의미 없어 보이는 일, 혹은 매우 평범한 일도 내가 어떻게 성과를 좋게 만들 수 있을지 혹은 어떤 아이디어를 넣으면 이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 될지를 생각했다.”

남성이 다수인 상황에서 여성으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오히려 이런 상황을 장점으로 잘 활용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성 임원이나 여성 개발자가 많지 않다 보니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존재감이 컸다. 쉽게 기억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맡든지 더 잘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됐다. 그렇기에 어떤 업무를 맡든 책임감 있게 해내려 했고, 그래야 뒤에 또 다른 여성 리더가 탄생할 수 있다고 봤다.”

KB에서의 AI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고객을 위한 AI 금융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고객 개인에게 최적화한, 이른바 초개인화한 금융 서비스를 AI를 통해 제공하는 것이다. AI를 사람처럼 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데이터를 통해 개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예측하고, 맞춤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AI를 통해 사람들의 생애주기에서 필요한 부분을 보조하고 돕는 것이 지향점이라 생각해서 ‘AI 은행원’이란 용어 대신 ‘AI 금융비서’란 단어를 쓰고 있기도 하다.”

시중 은행이 핀테크 업체보다 디지털 전환(DT) 면에서 뒤처진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 금융사에서 일하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접근하는 방식은 다를지라도 디지털 전환이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검토는 여느 핀테크 업체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또 금융사는 업력이 오래된 만큼 데이터 규모에서 경쟁력이 있고,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영업점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 부탁한다.
“흔히 새해가 되면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는데, 개인적으론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은 지 10년은 된 것 같다. 대신 매일 맞는 하루가 중요해졌다. 이른 아침에 그날 해야 할 일 목록을 적고,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하면서 목록을 형광펜으로 싹싹 긋는다. 이렇게 얻는 자존감과 성취감이 일을 자신감 있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또 어떤 목표도 혼자 이룰 수 없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또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학생의 경우, 멘토링 행사에서 받는 질문의 공통점은 스스로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생각하는 경향은 도전에 방해가 된다. 일단 부딪쳐보면 좋겠다. 실패도 성공의 일부이며 한 번에 계획한 방향대로 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경력은 정글짐이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좀 돌아가더라도 하나씩 올라가면 된다. 심지어 몇 칸 내려와도 괜찮다. 어떤 일을 할 때 힘들어도 이를 좋아하고 즐길 수 있다면, 어느새 그 길 앞에 본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