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다 아키오 일본 도요타자동차 사장이 2020년 1월 6일(현지시각)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도요다 아키오 일본 도요타자동차 사장이 2020년 1월 6일(현지시각)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알버트 비어만 현대차그룹 연구개발본부장은 12월 10일 온라인으로 개최한 ‘최고경영자(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2025년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시범 출시한 후 2030년 본격적으로 양산하겠다”라고 밝혔다. 배터리 업계와 협업 체계를 구축해 10년 내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차세대 전기차를 출시한다는 게 현대차의 계획이다.

판매량 기준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12월 11일 현대차보다 4년 빠른 2021년 중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 프로토타입(시제품)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도요타는 2021년대 초반 전고체 배터리를 양산하는 세계 최초의 완성차 메이커가 되겠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이에 대해 미국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는 12월 14일(이하 현지시각) “2021년 출시할 도요타의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는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도요타의 선언으로 글로벌 전고체 배터리 시장 경쟁이 가속할 전망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배터리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한 배터리다. 효율성과 안전성 측면에서 전기차 보급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닛케이아시아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도요타는 2021년 세계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 시제품을 공개하고 2~3년 내로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요타가 2017년 본격적으로 착수한 전고체 배터리 개발의 결실을 볼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내년 공개될 시제품은 10분 정도면 충전이 완료되고 한 번 충전으로 약 500㎞를 주행한다. 또한,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안전하다. 이 같은 도요타의 계획은 현재까지 글로벌 완성차 및 배터리 업체가 밝힌 전고체 배터리 공개 시점 중 가장 빠른 것이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미국 배터리 스타트업인 퀀텀스케이프에 대한 투자 및 공동 개발로 2025년 전고체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를 선보일 계획을 갖고 있다. 퀀텀스케이프는 12월 8일 개발 중인 전고체 배터리가 15분 안에 80%를 충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밝히기도 했다.

독일 BMW도 미국 기업 솔리드파워와 손잡고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를 2025∼2026년 출시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무라타와 히타치, 교세라, 도레이, 스미토모화학 등 일본 소재 업체와 중국 배터리 업체 CATL도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시장 성장 가능성이 커지자 아예 배터리와 관계없던 글로벌 기업도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애플 아이폰의 위탁 생산 업체로 알려진 대만 전자 업체 폭스콘은 피아트크라이슬러오토모빌스(FCA)와 중국에 전기차 합작사를 세우기로 하고,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를 2024년까지 생산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도요타의 이번 발표가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완성차 회사인 닛산도 2028년 자체 개발한 전고체 배터리를 전기차에 탑재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도요타와 닛산 모두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 주요 수단은 도요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관 컨소시엄을 통해서다.

닛케이아시아는 “이미 일본의 주요 에너지 기업인 미쓰이금속과 이데미츠고산은 고체 전해질을 생산하기 위한 기반시설 건설에 나선 상황”이라고 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현재 탈(脫)탄소 기술 지원을 위해 2조엔(약 21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이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사용될 것으로 일본 언론들은 전망했다. 국내를 살펴보면, 현대차가 자체적으로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분사한 LG화학 배터리 사업부),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기업과 협업 가능성이 거론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쯤 전고체 배터리 샘플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며,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 가능 시점을 2027년으로 잡고 있다. 특히 전고체 배터리는 전기차뿐만 아니라 친환경에너지 발전 장치에 필수적인 에너지 저장 장치(ESS)에도 적용할 수 있어 성장 가능성이 크다. 일본 후지경제연구소는 2035년 글로벌 전고체 배터리 시장 규모를 2조8000억엔(약 29조4000억원)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전략 무기화 가능성도 거론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통해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과 한국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닛케이아시아는 “전 세계적으로 탈탄소가 대세가 되면서 전기차는 점차 일반화할 것”이라며 “일본 정부는 현상 유지 시 전기차와 관련한 대부분의 기술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커질 것으로 보고 전고체 배터리의 국내 개발을 장려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는 일본이 과거 리튬이온 배터리를 먼저 개발했는데도 중국과 한국에 시장 지배적 지위를 빼앗긴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니와 파나소닉 등 일본 전자 업체들은 차량용 배터리 셀을 상용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과 한국 업체들이 급부상했다.

배터리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9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순위는 중국 CATL이 19.2(기가와트시)로 세계 1위, 한국 LG에너지솔루션이 18.9로 바로 뒤를 이었다. 3위는 일본 파나소닉으로 17.6였다. 4위와 5위는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이 나란히 차지했다. 국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도요타가 현재는 하이브리드차에 집중하고 순수 전기차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찌감치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집중해 왔다”라며 “당장 전기차를 팔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전고체 배터리를 내놓으면 전기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한 번에 뺏어올 수 있다는 계산일 것”이라고 했다.

주영섭 고려대 석좌교수(전 중소기업청장)는 “도요타의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당분간 자차에만 적용하고 타사에 판매하지 않는 등 전략 무기화 가능성이 있다”라며 “테슬라를 포함한 글로벌 전기차 경쟁사에는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정부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는 물론이고, 현대차, 배터리 3사, 협력사, 국책연구원, 대학 등과 협력 체계를 풀 가동해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영진 KDB미래전략연구소 산업기술리서치센터 연구위원은 관련 보고서를 통해 “전고체 배터리의 본격적인 시장 형성 시점은 2030년쯤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라며 “그러나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차세대 배터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R&D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했다. 손창우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향후 2~3년 내 급격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재편이 예상된다”라며 “기업의 노력뿐만 아니라 산·관·연의 집중적인 협력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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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체 배터리(all solid state battery) 배터리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전해질을 기존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한 차세대 배터리. 완전 충전 시간은 10~15분으로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짧고, 주행 거리는 두 배 이상 길다. 충격에 대한 안전성은 월등히 높다. 일본 도요타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2012~2014년 도요타가 출원한 차세대 전지관련 특허의 68%가 전고체 배터리 분야다. 현재 도요타는 1000개가 넘는 전고체 배터리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