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양쪽 가슴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유전자 검사에서 자신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것을 알고, 수술을 감행했다. 피부는 그대로 두고 유방 속 조직을 긁어낸 후 빈 자리에 보형물을 집어넣었다. 그게 2013년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암 때문에 유방을 잘라내 한쪽 가슴이 사라진 여성이 많았다. 이들은 수영장, 대중목욕탕은 갈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의술이 발달하면서 흉터를 최소화하고 수술 전후 모양이 달라지지 않게, 지방이나 보형물을 집어넣어 재건하는 성형수술이 보편화했다.
김은규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는 유방암 수술에 성형수술 기법을 응용해, 수술 후 가슴 모양이 최대한 변하지 않게 하는 기법을 일찍 국내에 들여왔다.
한국에서 유방암은 여성 암 발생 1위다. 미국⋅일본에서도 여성 암 발생 1위는 유방암이다. 미국 여성 8명 중 1명, 일본 여성 10명 중 1명꼴로 걸린다. 한국 여성은 18명 중 1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미국과 일본에서 유방암은 60대 넘어서 걸리는 병인데, 국내 유방암 환자는 40~50대의 발병률이 가장 높다. 젊은 유방암 환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한국 유방암 환자는 2000년 이후 매년 늘고 있다.
김 교수는 “40~50대 여성은 초⋅중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둔 경우가 많다”며 “초⋅중학생은 엄마 손이 가장 많이 갈 나이”라고 했다. 유방암 수술에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가정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이후 원자력병원 외과 과장을 거쳐 2014년 분당서울대병원에 합류했다. 김 교수는 유방암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노동영 강남차병원장(전 서울대학교암병원장)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 교수를 3월 18일 경기도 성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전날 오후 10시까지 수술을 했다고 한다.
유방암은 수술을 꼭 해야 하나.
“그렇다.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돼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다만 암 중에서 치료법이 가장 발달한 덕분에 수술로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하기만 하면 0~1기 암의 경우 5년 생존율이 95%에 이른다. 그러니 요즘에는 유방 조직을 잘라내더라도 수술 전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한다.”
유방 종양 성형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나.
“유방암 수술은 조직을 모두 잘라내는 전(全) 절제와 일부만 도려내는 부분 절제로 나뉜다. 이렇게 유방을 잘라내면 살이 움푹 파여 보기 좋지 않다. 과거에는 유방암 수술을 하면 ‘환자를 살린 게 어디냐’고 했지만, (젊은 시절에) 그런 모습을 보니 속이 상했다. 한국은 40대 중반의 젊은 유방암 환자가 많다. 유방암은 조기에 발견해 수술만 성공적으로 마치면 사망 위험이 크게 줄어든다. 이를 돌려서 말하면, 수술한 자국이 있는 몸으로 살아갈 날이 길다는 뜻이다. 암세포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환자가 수술로 인한 유방 변형으로 위축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시도한 건 언제가 처음이었나.
“스승이신 노동영 교수님의 펠로(전임의)였던 10여 년 전, 교수님이 암 수술을 하고 나면 내가 봉합 등 후(後)처리를 주로 했다. 환자의 남은 수술 자국을 꿰맬 때 해외 논문에서 본 대로 남아 있는 조직의 모양을 잡아본 것이 시작이었다. 수술을 마친 환자를 외래에서 진료하면, 다른 환자와 비교해 모양이 확실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유방암 수술은 어떻게 발전해 왔나.
“초기 유방암 수술에서는 근육까지 다 잘라냈다. 그다음엔 근육은 살리고 피부까지 잘라냈다. 이후에 부분 절제, 종양 성형까지 수술 기법이 발전했다. 종양 성형은 유방 재건 수술과는 다르다. 조직을 부분 절제하면서 성형 기법을 통해 남아 있는 조직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똑같은 위치의 수술인데도 결과가 확연히 달라진다.”
수술은 일 년에 몇 건이나 하나.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일정이 있는데, 하루에 대여섯 건은 한다. 유방암 수술만 연간 800여 건 정도 하는 것 같은데, 아마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의사 중 한 명일 것 같다.”
부분 절제가 불가능할 경우 어떤 수술을 하게 되나.
“요즘에는 피부는 남겨두는 ‘속(內) 절제’라는 것을 한다. 정확한 명칭은 유두보존유방전절제술이라고 하는데, 수박을 껍데기만 남기고 속을 파내는 것처럼 겉 피부 속 조직을 파내고 그 안을 다른 것으로 채워 넣는 식이다. 앤젤리나 졸리도 조직은 파내고 보형물로 채웠다. 이 밖에 뱃살이나 등살, 내장에 있는 지방 등으로도 채운다.”
속 절제는 어떤 환자들이 하게 되나.
“부분 절제가 불가능한 경우다. 암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더라도 퍼진 부위가 넓어서 부분 절제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느 한 부분만 절제할 수 없다.”
최근 환자 치료와 연구 관련으로 주력하고 있는 기법이 있다면.
“복강경 수술로 대망이라는 내장 지방을 추출하고, 이렇게 추출한 지방을 유방 복원에 활용하는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배꼽에 구멍을 하나 뚫어 내장 지방을 채취하고, 유방은 아랫부분만 절제해서 수술한 후 지방을 집어넣는다. 이러면 수술을 해도 티가 나지 않고, 촉감이나 모양에서 아무래도 더 자연스럽다. 지금까지 250명을 수술했다.”
복강경 수술은 배에 작은 구멍 2~3개만 뚫어, 몸 밖에서 기구를 조작해 수술하는 기법이다. 분당서울대병원은 복강경 분야 세계 최고로 통한다. 이 기술을 유방 종양 성형과 결합한 것이다. 김 교수팀은 최근 이 수술 기법과 관련한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을 본 해외의 여러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참관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유방암은 도대체 왜 생기나.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두루 있다. 선천적 요인은 앤젤리나 졸리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처럼 유방암을 일으킬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다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게는 70%도 된다. 가족력이라는 것도 있다.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렸다면, 딸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2~3배 정도 올라간다. 후천적 요인으로 이른 초경, 늦은 폐경, 늦은 첫 출산, 미출산, 흡연, 음주, 비만 등 생활 습관도 있다.”
유방암을 예방할 방법은 없나.
“암을 예방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동안 연구를 봐도 출산 후 모유 수유를 하면 좋다는 식이다. 유방암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20세가 되면 유방 자가검진을 하고, 40세 넘어서는 1년에 한 번씩은 꼭 유방암 검진을 받고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것이다. 식습관과 생활 습관이 서구화하면서 한국에서도 유방암 환자가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젊다고 안심하지 말고, 암 검진을 자주 받길 원한다.”
한국 여성은 치밀유방이 많아서 X선 촬영만으로 암 조직을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젊은 사람의 경우 X선 촬영만으로 암을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유선 조직도 흰색이고, 암도 흰색이기 때문이다. 하얀 도화지에 하얀 색종이를 오려서 올리면 잘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초음파나 혈액 진단을 하기도 한다. 초음파의 경우 영상 기기를 보는 숙련도 높은 의사가 필요하지만 혈액 검사의 경우에는 혈액만 채취해서 검사하면 되니까 훨씬 간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만 40-69세 여성을 대상으로 국가 암검진을 통해 2년마다 유방 X선 촬영 검사를 한다. 그런데 한국 여성의 유방은 치밀유방이 70~80%나 된다. 치밀유방은 지방이 적고, 젖이 나오는 유엽·유관이 많은 것을 뜻한다. 이 경우 X선 촬영으로 얻은 이미지만으로는 암 조직을 구분하기 어렵다.
유방초음파는 치밀도와 관계없이 검사가 가능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혈액 검사는 유방 X선 촬영 검사와 병행 시 유방 X선 촬영술 단독 대비 치밀유방에서 검사의 민감도(59.2%→93.0%)와 정확도(69.0%→85.4%)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국가 건강검진에 혈액 검사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유방암 치료 신약을 개발할 계획은 없나.
“하하. ‘암 정복’ 같은 그런 거창한 능력은 내게 없는 것 같다. 지금은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반드시 낫게 하고, 수술 후에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