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202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벤 버냉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필립 딥비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 사진 연합뉴스
왼쪽부터 202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벤 버냉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필립 딥비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 사진 연합뉴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은행과 금융 위기 연구에 기여한 미국 경제학자 세 명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0월 10일(현지시각) 벤 버냉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 필립 딥비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교수 등 세 명을 제54회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수상자 중 버냉키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연준 의장 출신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수상은 세계 경제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대응으로 전례 없는 ‘유동성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올해 연준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억제를 위해 긴축에 돌입하면서 위기감이 커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전 세계적으로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금융·외환 시장 불안이 확대되고, 은행과 금융기관의 회복력(resilience)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 노벨 경제학상도 뱅크런(bank run·현금 대량 인출 사태)과 금융 위기, 불황의 관계를 연구한 전문가들이 수상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벨위원회는 “1980년대 초 이들의 연구는 금융 위기 상황에서 은행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규명했다”며 “특히 은행 붕괴를 막는 게 왜 필수적인지를 보여줬다”고 밝혔다. 

이날 수상자를 발표한 존 해슬러 스톡홀름대 교수는 “이들의 연구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붕괴 위험에 처했던 2008~2009년 금융 위기뿐만 아니라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가 금융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는 설명이다.


‘대공황 연구’ 권위자 버냉키, 뱅크런·불황 관계 밝혀

수상자 세 명 중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버냉키 전 의장이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연준을 이끈 버냉키는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자 미국의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추고, 중앙은행이 국채 등을 사들여 시장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양적완화(QE) 정책을 펼쳤다. 당시 헬리콥터로 하늘에서 돈을 살포하듯 돈을 찍어냈다고 해서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준 의장으로 부임하기 전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로 명성을 쌓은 학자 출신이기도 하다. 1953년 미 조지아주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버냉키 전 의장은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스탠퍼드대와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내면서 1930년대 대공황을 집중 연구했다.

버냉키 전 의장은 1983년 쓴 논문에서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뱅크런이 은행 파산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융 위기가 장기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노벨위원회는 평가했다. 은행이 붕괴하자 저축을 투자로 전환하는 사회의 능력이 사라졌고, 결국 불황이 대공황으로 악화됐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해슬러 교수는 “당시에는 은행 도산이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의 결과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며 “버냉키의 연구가 기존 통념을 깼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버냉키 전 의장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대한 의견은 경제학계 내에서도 엇갈린다. 버냉키 전 의장의 과감한 양적완화 정책 덕에 금융 위기가 대공황으로 확산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올리비에 블랑샤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 그의 행동이 없었다면 경제는 훨씬 더 붕괴했을 것”이라며 “그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썼다. 

반면 양적완화로 시장에 풀린 자금이 자산 시장 거품을 키우고 양극화를 부추겼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때 시작된 ‘돈 풀기’가 지금의 인플레이션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 루머→은행 붕괴’ 과정 연구

버냉키 전 의장과 함께 수상자로 선정된 다이아몬드 교수와 딥비그 교수는 금융 위기와 유동성 분야에 정통한 학자들이다. 이들은 1983년 공동 저술한 논문 ‘뱅크런, 예금보험과 유동성’에서 은행이 파산할 것이란 소문이 예금주의 인출 행렬, 나아가 은행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석했다. 이어 정부가 예금보험을 보장하고 은행에 대한 최종 대출자 역할을 함으로써 이런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은행이 예금주와 대출자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대출자의 신용도를 평가하고 좋은 투자에 대출이 사용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뱅크런 사태를 설명하는 ‘다이아몬드-딥비그’ 모형을 1983년 창안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예금보험 제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되는 모형”이라고 말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금융 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잃을 때 발생한다”며 “전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이 금리를 빠르게 올리는 시기에는 공포 심리가 확산할 수 있기 때문에 통화 정책이 투명하게 운용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Plus Point

버냉키 “신흥 시장 자본 유출 위험 직면”

그동안 노벨 경제학상은 시대의 화두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주로 수상했다. 최근 5년간 수상자 명단을 보면 빈곤 문제, 기후 변화의 경제적 효과, 최저임금과 고용 관계 등 경제·사회적으로 중요성이 높아진 분야를 연구한 경제학자들이 많았다.

올해 수상자의 경우 최근 미국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선 가운데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진 현재 경제 상황을 반영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지난 3월부터 금리 인상을 시작한 연준은 최근 세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씩 올렸고, 내년까지 최종 금리를 4.5%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예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기준금리가 전 세계적으로 상승하는 가운데 은행과 금융기관의 회복력에 대한 우려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전했다.

버냉키 전 의장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고강도 긴축이 촉발한 달러 강세로 신흥국의 경제 위기 위험이 커졌다고 경고했다. 그는 “아시아 등 신흥 시장은 달러 강세로 인한 자본 유출 위험에 직면해 있고, 유럽에서는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금융기관이 압박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금융 시스템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을 때보다 나은 상황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이 금융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세 명이 공동 수상한 것은 1969년 제정 이래 아홉 번째다. 올해 수상자 세 명은 상금 1000만스웨덴크로나(약 12억7000만원)를 나눠 갖는다.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뜻에 따라 인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2022년 노벨상은 경제학상을 끝으로 올해의 수상자 발표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