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시의 한 화웨이 매장 전경. 과거에 ‘애플스토어’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블룸버그
중국 선전시의 한 화웨이 매장 전경. 과거에 ‘애플스토어’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블룸버그

미국과 중국 간 ‘첨단기술 전쟁’이 한층 격화하고 있다. 12월 8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모든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서 외국산 컴퓨터(PC)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추방하고, 자국산으로 대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에서 화웨이, ZTE 등 중국 기업의 제품 판로를 막은 데 대한 ‘맞불 전략’으로 해석된다.

중국의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은 이미 데스크톱 컴퓨터로 대부분 자국 기업인 레노버 제품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내장된 부품은 인텔의 프로세서, 삼성전자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등 비중국산이 많다. 이번 지시는 컴퓨터 완제품뿐만 아니라 그 안에 탑재된 부품과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중국산으로 대체하라는 내용이다. FT는 중국 정부가 적게는 2000만 대, 많게는 3000만 대에 달하는 비중국산 컴퓨터를 2022년까지 교체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는 2020년 말까지 30%, 2021년에는 50%, 2022년에 나머지 20%를 교체하는 이른바 3·5·2 정책이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되는 미국 기업으로는 델·HP와 같은 완제품 PC 제조사, 인텔·AMD·엔비디아와 같은 부품 제조사, 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운영체제 개발사 등이 꼽힌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국 기업이 대(對)중국 매출 대부분을 민간 부문에서 내고 있어 충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중국 자체 운영체제인 ‘기린’이 성능과 호환성 면에서 MS의 ‘윈도’보다 크게 떨어져 소프트웨어 완전 대체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중국 정부의 이번 조치가 공공 부문에서 그치지 않고 민간 부문으로 확산될 경우다.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중국 사업 비중이 큰 한국 제조 기업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가 제시한 ‘자국화’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국내 기업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컨설팅 업체 ‘유라시아그룹’의 폴 트리올로 연구원은 국산화 압박이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미국의 제재 때문에 더욱더 급해졌다고 FT에 밝혔다. 그는 “3·5·2 정책은 중국이 꺼낸 새로운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며 “목표는 매우 분명한데 지금 ZTE나 화웨이, 메그비, 수곤 같은 기업이 처한 위협을 피할 만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화웨이와 ZTE로 대표되는 중국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은 최근 미국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 공세를 받아왔다. 시발점은 ‘국가안보’ 문제였다. 미국은 중국산 통신장비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활동에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2018년 8월 공공기관에서 화웨이와 ZTE 등의 제품 사용을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상무부는 올해 11월 중국 화웨이와 70개 계열사를 거래 제한 기업명단(entity list)에 포함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 기업이 중국 정보통신 기업과 거래하려면 사전에 정부 승인을 받도록 하는 조치였다. 제재는 민간 영역으로도 확대됐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11월 자국 통신업체들이 연방정부 보조금을 중국산 장비를 구매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중국 정부의 ‘외국산 컴퓨터 퇴출’ 지시는 올해 초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내려졌는데, 사이버보안법에 따른 ‘안전하고 통제가능한 기술 사용’을 위한 차원이라고 FT는 보도했다. 정보 수집과 감시 등 안보 활동이 대부분 ICT 기반으로 이뤄지면서 정보가 흘러나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양국이 국가기관과 공공기관에서 상대국 ICT 기기 사용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주변 동맹국에도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화웨이 보이콧’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독일·네덜란드 등 동맹국은 ‘화웨이 장비로 5세대(5G)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국가와는 민감한 안보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박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이 반사이익을 누리기도 했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델오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 5G 통신장비 시장에서 글로벌 점유율 37%로 기존 1위였던 화웨이(28%)를 따돌리고 선두를 차지했다. 2018년 삼성전자 이동통신장비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6.6%에 불과했다.

차세대 산업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패권 경쟁 측면도 강하다. 중국은 2025년까지 핵심 부품과 자재의 국산화율을 70%까지 끌어 올려 ICT·로봇·신소재·바이오 등 10대 첨단산업을 끌어올리겠다는 ‘중국 제조 2025’ 정책을 2015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관련 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한편, 자국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과정에서 불공정 무역 문제가 불거졌고 미국 등 선진국의 기술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미국 정부의 화웨이·ZTE 제재 조치에 대응해 중국 정부가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 ‘외국산 컴퓨터 퇴출’ 지시를 내렸다.
미국 정부의 화웨이·ZTE 제재 조치에 대응해 중국 정부가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 ‘외국산 컴퓨터 퇴출’ 지시를 내렸다.

한국 영향은 제한적…‘반도체 자국화’ 우려도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의 ‘외국산 컴퓨터 퇴출’ 지시가 당장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봤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對)중국 소프트웨어 시장과 완제품 PC 시장은 그렇게 크지 않다”면서 “스마트폰 부품 수출이 중심인 한국 산업 구조상 중국의 PC 부품 자국화 영향도 적게 받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중국 정부가 내건 ‘자국화’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해당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만약 PC 부품의 주 소재인 반도체 단위에서도 자국화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면, 중국 수출 비중이 높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에 추가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미 칭화유니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중국 반도체 업체는 ‘반도체 굴기’ 아래 전폭적인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D램 양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18년 삼성전자는 글로벌 매출액 131조5670억원 중 43조3811억원(33%)을 중국 시장에서 냈고, SK하이닉스도 전체 매출의 39%에 달하는 11조9048억원이 중국 내 매출이었다.

중국은 그동안 첨단기술 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공공수요를 기반으로 조악한 품질의 자국 제품을 높은 가격에 구매하고, 제품의 완성도와 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테스트베드’ 방식을 구사했다. 이렇게 성숙된 제품은 15억 내수 시장에서 ‘애국 소비’를 동력으로 점유율을 빠르게 늘려나갔다. 화웨이의 통신장비와 스마트폰, 비야디의 전기자동차, DJI의 드론 등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다.

화웨이는 미국산 부품을 사용하지 않고도 최첨단 스마트폰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애플의 아이폰11,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10 대항마로 떠오른 화웨이 ‘메이트30’은 제재로 수급이 막힌 미국산 부품 대신 대만·네덜란드·일본산 부품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