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그녀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은 현실로 이뤄졌다. 교육심리학에선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향상되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이르는데, 만초니 교수는 ‘필패 신드롬’은 ‘역피그말리온 효과’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사진 셔터스톡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그녀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은 현실로 이뤄졌다. 교육심리학에선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향상되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이르는데, 만초니 교수는 ‘필패 신드롬’은 ‘역피그말리온 효과’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사진 셔터스톡
장 프랑수아 만초니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학장 전 인시아드(INSEAD)대 경영학 교수, ‘필패 신드롬’ 저자 사진 IMD
장 프랑수아 만초니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학장 전 인시아드(INSEAD)대 경영학 교수, ‘필패 신드롬’ 저자 사진 IMD

A사에 근무하는 김 부장은 얼마 전 부서에 새로 들어온 이 과장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업무 지시를 하면 시원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굼뜬 것이 김 부장 기대를 맞추기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주도적으로 일을 맡아서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김 부장 눈에 비친 이 과장은 도무지 의욕 없고 소극적인 부하 직원의 전형으로 비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김 부장은 이 과장이 해야 할 일들을 이 과장 동기인 박 과장에게 서서히 떠넘긴다. 그럴수록 이 과장은 점점 더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결국 김 부장은 이 과장에게 ‘무능한 직원’ 꼬리표를 달고 다음 인사 때 그를 부서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어느 회사에서나 흔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과장은 정말 김 부장의 판단처럼 무능한 걸까? 이 과장이 제대로 된 실적을 내지 못한 이유가 색안경을 끼고 부하 직원을 본 김 부장 때문은 아닐까?

장 프랑수아 만초니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학장은 기업 리더 300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해 집필한 저서 ‘필패 신드롬(Set-Up-To-Fail-Syndrome)’에서 “부하 직원들은 종종 상사가 달아 놓은 ‘꼬리표’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상사가 특정 직원에게 마음속으로 ‘능력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면, 꼬리표가 달린 직원은 정말 무능한 직원이 된다는 것이다. 만초니 교수는 긍정적 믿음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인용해 이를 ‘역(逆)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필패 신드롬 책이 처음 나온 건 2002년이지만, 올해 1월 국내에서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만초니 교수의 주장은 지금도 꾸준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코노미조선’은 2월 18일 만초니 교수를 서면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상사는 왜 자신이 필패 신드롬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나.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꼬리표를 달 때 객관적 실적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는 변덕이 심한 것 같아’ ‘누구는 사사건건 따지려고만 들어’라고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부하 직원에 대한 인상 평가를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들과 자신이 궁합이 잘 맞을지 아닐지 여부를 무의식적으로 결론 지어 버린다. 이를 알 턱이 없는 부하 직원은 어느 순간 자신이 상사의 ‘핵심 인력(inner circle)’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업무 수행 능력이 점점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상사는 그 부하 직원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한층 더 심하게 그를 모니터링한다. 그럴수록 직원은 점점 위축되지만, 상사는 자신의 행동이 악순환을 촉발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고 단순히 부하를 ‘코치’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필패 신드롬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는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상사라면, 부하 직원이 자꾸만 업무에서 이탈(disengagement)하려 할 때 자기가 필패 신드롬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한다. 어떤 부하 직원이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자꾸만 변명거리를 찾고, 책임이 따르는 일을 맡지 않으려 한다면, 자신이 그를 무능한 직원 취급해서일 수 있다. 반면 부하 직원들은 상사가 자신과 다른 직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상사가 자신에게 ‘무능’ 꼬리표를 달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상사의 몸짓, 어조, 자신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 반응, 혹은 상사가 자신에게 어떤 일을 ‘제안(suggestion)’할 때 얼마나 강력하게 주장하는지 등이 모두 신호가 될 수 있다.”

상사가 붙여 놓은 ‘무능’ 꼬리표를 떼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상사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였다는 걸 발견할 경우, 당신은 분명히 더 열심히 일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효과를 낳는다. 첫째, 상사는 당신의 노력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사는 이미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발견하는 ‘선택적 관찰(selective observation)’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것은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성사했다 해도 상사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라거나, 누군가가 도와줘서였을 거라고 폄훼하기에 십상이다. 둘째,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과도한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일하다가 결국 실패를 면치 못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사는 ‘그럼, 그렇지. 쟤는 뭘 해도 안 돼’라고 당신에 대한 편견을 더욱 굳힐 것이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사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기 위한 창구를 열어두는 것밖에 없다. 이때 당신 역시 상사에게 ‘가혹하다’ ‘간섭이 심하다’ ‘불공정하다’ 같은 꼬리표를 붙이는 걸 자제해야 한다. 당신이 상사에게 그런 꼬리표를 붙여놓고 상사의 모든 행동을 그 꼬리표에 부합하는 렌즈로 바라본다면, 상사의 괴롭힘 역시 더욱 심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당신도 상사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필패 신드롬’의 늪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조직에 필패 신드롬이 만연할 경우, 유능한 직원들도 피해를 입나.
“유능한 직원들은 과도한 업무량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상사가 ‘무능’ 꼬리표를 단 부하 직원들이 할 일을 유능하다고 믿는 직원들에게 몰아주기 때문이다. ‘무능’ 꼬리표가 달린 직원들이 회사 복도 같은 데서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직원들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으면 그걸 들어줘야 하는 직원들은 자신의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조직의 사기도 떨어진다.”

상사에게 ‘무능’ 꼬리표가 붙은 동료를 어떤 식으로 도와줄 수 있나.
“우선 동료의 불평을 들어주고 현실 확인(reality check)을 해 주는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믿는 동료에게 그 동료가 믿는 것만큼 상사가 악질인지, 그렇지 않으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는지 냉정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만약 상사가 당신을 높이 평가한다면, 동료를 대신해 상사에게 동료의 불만 사항을 건의해 줄 수도 있다.”

필패 신드롬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사와 부하 직원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의학적 치료에 빗대서 말하겠다. 우선 환자의 징후(상사와 부하 직원의 갈등 상황)에 동의하고, 원인을 진단한 뒤(갈등의 원인에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 치료법(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재발을 방지(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해야 한다. 단순한 인사 조치는 근본적 해결 방안이 아니다. 직원을 인사 이동시키는 건 손쉬운 방법이지만, 필패 신드롬에 빠진 상사와 부하 직원이 갈등을 통해 배운 것이 없다면 나중에도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상사가 직원의 긍정적 측면을 보고, 직원은 적극적 개선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오윤희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