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유튜버 4인으로 이뤄진 가상의 모임 ‘한사랑산악회’ 콘텐츠의 한 장면. 50대 중년 남성 4인방으로 설정된 부캐들로 상황극을 이어나간다. 사진 유튜브
부캐 유튜버 4인으로 이뤄진 가상의 모임 ‘한사랑산악회’ 콘텐츠의 한 장면. 50대 중년 남성 4인방으로 설정된 부캐들로 상황극을 이어나간다. 사진 유튜브

‘SK텔레콤 잘나가네, 최준도 섭외하고.’

SK텔레콤이 최근 출시한 휴대전화 요금제인 ‘언택트 플랜’ 광고에 출연한 개그맨 김해준의 광고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그만큼 SK텔레콤이 인기 있는 광고 모델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높은 연령대의 대중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김해준이 연기하는 제2의 페르소나이자 가상의 캐릭터, ‘부캐(부·副캐릭터)’인 ‘최준’은 MZ 세대(밀레니얼+Z세대·1981~2004년생)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준’은 개그맨 출신 유튜버인 김해준이 유튜브에서 연기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눈을 반쯤 가린 헤어스타일, 느끼한 말투를 구사하는 카페 사장으로 그려진다. 최준과 영상통화를 하는 콘셉트로 촬영된 SK텔레콤 광고는 젊은 소비자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유튜브에 업로드된 지 한 달 만에 조회 수 158만 회를 기록했다. 본래는 점잖고 숫기 없는 성격인 개그맨 김해준은 능청스럽고 방정맞은 캐릭터 ‘최준’을 연기하면서 새로운 자아와 정체성을 표출한다. 직장인, 학생 등 틀에 박힌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MZ 세대가 유튜버의 새로운 페르소나에 열광하는 것이다.

광고 업계에 최근 ‘부캐’ 섭외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르는 MZ 세대에게 자사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기업이 부캐 유튜버 섭외에 적극적이다. 조승현 제일기획 캐스팅 디렉터는 “부캐는 기존 광고 모델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다양한 캐릭터와 펀(fun)한 요소를 가미할 수 있어 광고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다”며 “이들을 통해 젊은 세대가 많이 활용하는 소셜미디어(SNS)에서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해 광고 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해준은 부캐 ‘최준’ 덕분에 SK텔레콤을 포함해 올해만 10개가 넘는 브랜드와 광고 계약을 했다. 서브웨이·굽네치킨·설빙 등 외식 업계부터 최근 프랑스 화장품 기업 에스티로더가 인수한 첫 아시아 기업으로 주목받았던 닥터자르트 등 화장품 업계까지 다양하다. 유튜버 김민수가 23세 무명 래퍼로 설정해 연기하는 부캐 ‘임플란티드 키드’ 역시 KT의 온라인 전용 요금제 광고에 출연하는 등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부캐’는 본래 게임 이용자가 주력으로 키우는 캐릭터인 ‘본캐’가 아닌, 부차적으로 키우는 캐릭터, 일명 ‘부계정’을 의미하는 게임용어다. 게임 이용자는 더 다채롭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부캐를 생성한다. 예컨대 본캐를 궁수로 키우며 매번 반복적인 게임을 해왔다면, 부캐는 마법사로 키우며 평소 사용하지 못했던 게임 아이템을 사용하는 등 신선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만 사용되던 이 단어는 점차 사회·문화적인 의미로 확장됐다. 2019년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놀면 뭐하니?’에 출연하는 개그맨 유재석은 드러머 ‘유고스타’, 트로트 가수 ‘유산슬’ 등을 연기했다. 대중에게 익숙한 ‘국민 MC’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유느님’ 유재석이 항상 단정한 옷차림의 달변가라면, 트로트 신인가수 ‘유산슬’은 화려한 반짝이 재킷을 입은 어리숙한 인물이다. 유재석의 ‘부캐’들이 인기를 얻자, 가수 이효리, 개그우먼 김신영 등이 각각 ‘린다 지’ ‘김다비’라는 부캐를 만들어 본캐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현재 광고계 내 부캐 열풍을 이끄는 주역은 유튜버로 변신한 무명 개그맨들이다. KBS ‘개그콘서트’ 등 TV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연이은 폐지로 무대를 잃은 무명 개그맨들이 유튜브로 넘어가, ‘부캐’ 콘텐츠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부캐’ 콘텐츠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무명 개그맨이 아닌, 대기업 임원, 카페 사장 등을 연기하며 역할놀이를 하는 것이다.


유튜버 김민수의 부캐 ‘임플란티드 키드’가 KT 휴대전화 요금제 광고에서 상품을 소개하는 가사의 랩을 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유튜버 김민수의 부캐 ‘임플란티드 키드’가 KT 휴대전화 요금제 광고에서 상품을 소개하는 가사의 랩을 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유튜버 김해준의 부캐 ‘최준’이 11번가 라이브커머스 모바일 채널에서 화장품과 초콜릿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11번가
유튜버 김해준의 부캐 ‘최준’이 11번가 라이브커머스 모바일 채널에서 화장품과 초콜릿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11번가

시청자와 적극 대화하는 부캐 유튜버

국내 주요 기업들이 무명 개그맨을 기용한 광고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것은 MZ 세대 소비자와의 소통이 중요해진 광고 트렌드 때문이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상품이나 브랜드를 제시하고 자랑하는 광고가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소비자 체험을 중시하는 ‘참여 콘텐츠형’ 광고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소비가 단순히 지출 행위에 머물지 않고, 콘텐츠의 한 줄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유통 업계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라이브커머스에서 부캐 유튜버 섭외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라이브커머스는 라이브 스트리밍(live streaming)과 전자상거래(e-commerce)의 합성어로, 실시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채널을 의미한다. 쇼호스트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홈쇼핑과는 달리 시청자가 댓글을 통해 ‘직접 옷 입어주세요’ 등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며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기존 유통 업계뿐 아니라 네이버, 카카오 등 IT 기업 역시 라이브커머스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라이브커머스에 부캐 유튜버들의 출연이 잇따르는 것도 이들이 시청자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부캐’ 콘텐츠는 대부분 카메라 밖의 상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편집된 동영상이다. ‘어떤 커피 좋아해요?’ 등의 질문을 시청자에게 던지는 영상통화 방식의 ‘최준의 비대면 데이트’가 대표적이다. 시청자는 영상 속 인물과 대화하듯 댓글을 달면서 콘텐츠 몰입도가 높아진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홍보학과 교수는 “MZ 세대는 콘텐츠를 향유하는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쇼핑에 댓글을 매개로 한 참여 기능이 가미된 라이브커머스를 적극적으로 소비한다”라며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익숙한 부캐 유튜버가 라이브커머스에 적합한 이유”라고 말했다.

유튜브 분석 사이트인 녹스 인플루언서에 따르면, ‘부캐’ 콘텐츠 채널들의 조회 수 대비 댓글 수는 0.43% 수준이다. 이 사이트는 이 수치가 0.29% 이상이면 ‘훌륭(Excellent)’ 단계로 분류한다. 박 교수는 MZ 세대가 “자존감이 높으면서도 단절을 두려워하는, ‘구속 없는 연결’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댓글을 통해 같은 콘텐츠를 향유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그 속에서 노는 데 익숙한 세대”라고 말했다. 유튜브 댓글을 통해 유튜버의 역할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청자가 라이브커머스에서는 실시간 댓글을 통해 쇼핑을 즐기는 것이다.

이교택 11번가 홍보팀 매니저는 “라이브 방송이 단순히 상품을 보여주는 형식이 아닌, 상품 체험형 예능 포맷으로 다양화하는 게 최근 트렌드”라고 진단했다. 이어 “최근 개그맨 김민수씨와 진행한 방송은 최대 동시 접속자가 25만 명까지 오르는 등 시청자 참여 포맷에서 부캐 개그맨들의 활약이 돋보인다”며 “이를 활용해 더 새로운 방식의 포맷을 기획 중”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