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저스. 사진 블룸버그
리처드 로저스. 사진 블룸버그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8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화려하게, 인상적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로저스는 건축의 미(美)에 대한 (대중의) 관점을 바꿔놓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021년 12월 18일(현지시각) 리처드 로저스의 별세 소식을 이같이 전했다. 로저스는 세계 곳곳의 스카이라인을 도화지 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영국 런던의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과 ‘로이드빌딩’,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 내 터미널’,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유럽 인권재판소 본부’ 등은 물론 서울의 새 랜드마크가 된 여의도 ‘파크원’도 그의 작품이다.

로저스가 생전 즐겨 말해온 ‘퐁피두센터’ 일화는 그가 어떻게 건축의 미에 대한 기준을 바꿔왔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 파리의 대표 문화 공간 퐁피두센터는 로저스가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84)와 함께 설계했다. 퐁피두센터 개관을 앞둔 1977년 1월, 로저스는 근처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 여성이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퐁피두센터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로저스가 자랑스럽게 “내가 설계자”라고 하자, 이 여성은 우산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퐁피두센터가 얼마나 파격적인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개관 초반 이 건물은 ‘괴물 같다’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폭 60m, 높이 42m, 지하 1층, 지상 6층밖에 되지 않지만 건물 밖에는 튜브로 덮인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됐다. 공조시스템·배관·철골 등도 외부에 드러나는 파격적인 설계였다.



왼쪽부터 리처드 로저스의 대표작인 영국 런던 ‘로이드빌딩’과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 한국 서울 여의도 ‘파크원’. 사진 블룸버그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후인 2007년. 로저스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프리츠커상은 1979년 하얏트 재단이 뛰어난 건축가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들은 “로저스가 퐁피두센터에서 보여준 실험정신과 하이테크 운동을 일으킨 점을 높이 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하이테크 건축 기법은 금속 골조와 유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건축 기법을 말한다. 로저스는 프리츠커상을 받으며 소설가 밀란 쿤데라 말을 인용해 “역사란 모든 일이 다 지난 다음에야 명료해진다”고 말했다. 파격적이라는 평가에도 로저스는 늘 자신의 설계에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1933년생인 로저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제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피해 로저스가 네 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난독증으로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로저스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군 복무를한 후 유명 건축가였던 사촌 어네스토 로저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며 건축을 접했다. 이후 영국에서 모더니즘 사조를 가르쳤던 AA스쿨(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건축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미국 예일대 건축대학원 등을 거치며 하이테크 건축을 함께 이끈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를 만났다.



리처드 로저스가 렌조 피아노와 공동 설계한 파리 퐁피두센터. 사진 블룸버그

“건축 통해 더 나은 세상 만들어”

로저스는 출세작인 퐁피두센터를 포함해 세계 곳곳의 랜드마크 건물을 설계해 명성을 떨쳤다. 런던 로이드보험의 사옥 ‘로이드빌딩’도 그의 대표작이다. 로저스는 퐁피두센터에 적용한 아이디어를 로이드 빌딩에도 반영했다. 실내 전용면적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계단 등 6개 타워를 건물 외곽에 노출시켰다. 외관 타워에는 유리 엘리베이터, 급수관, 도관 등이 들어갔다. 유리지붕을 설치해 자연채광도 극대화했다.

영국 그리니치의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도 로저스 작품이다. 밀레니엄 돔은 천막 구조 위에 삐죽삐죽 솟은 구조물로 찰스 왕세자도 혹평했다. 하지만 로저스는 1991년 영국 왕실로부터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을 높게 평가받아 기사 작위를 받아 ‘경(卿)’이 됐다. 1998년에는 종신 작위를 받았다. 로저스는 2006년과 2009년에는 영국 최고 권위의 건축상인 스털링상을 받았다. 런던 히스로공항 제5터미널, 리든홀빌딩 등도 그의 설계작이다.

한국에도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 서울 여의도의 파크원은 로저스의 설계작이다. 파크원은 53층과 69층 오피스빌딩 두 동과 더현대 서울 백화점 등으로 구성된 복합단지다. 파크원 건물의 붉은색 테두리는 단청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적색이야말로 한국 전통 건축의 미학과 함께 미래 지향적이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최적의 색상이라고 판단한 것. 파크원도 초반에는 본래 단청색과 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로저스는 자신이 1977년 세운 ‘로저스 스턱 하버 플러스 파트너스(RSHP)’에서 2020년 은퇴했다. 그는 은퇴 전인 2018년 9·11테러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 제3빌딩(3WTC) 등을 설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로저스는 떠났지만, 그가 ‘하이테크 건축’의 거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렌조 피아노는 과거 로저스에 대해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항상 네 발자국 앞서갔다”며 “그는 건축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로저스는 생전 “나에게 건축이란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며 “기능과 미(美)라는 두 가지 요소가 성공적으로 결합할 때 훌륭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다”고 했다. AFP통신은 그를 “하이테크 건축 사조의 선도자”라 평했다.

안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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