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경남 창원시 한국전기연구원의 초고압 시험장. 사진 최상현 기자
1월 31일 경남 창원시 한국전기연구원의 초고압 시험장. 사진 최상현 기자

1월 31일 경남 창원시 한국전기연구원(전기연)의 초고압 시험장. 5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코일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100만V(볼트) 전기를 내뿜었다. 시험 설비와 연결된 시험품은 막대한 전압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펑’ 소리를 냈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고무 타는 냄새가 시험장을 가득 채웠다. 수십억원을 들인 한 해외 업체의 프로젝트가 수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전기연 대전력 시험장에서는 현대일렉트릭이 개발한 ‘친환경 배전반 설비’ 단락 시험이 진행됐다. 해외 전력 회사에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이 배전반 설비는 6억VA(볼트암페어)에 달하는 전력을 버텨내고도 불똥 하나 튀지 않아야 시험성적서가 발급된다. 시험 사전 준비에만 3억원에 달하는 자금과 수개월의 노고가 들어갔지만, 정작 시험은 0.1초도 안 돼 끝났다. 대전력시험실 김윤성 선임은 배전반을 감싼 검은 천을 꼼꼼히 살펴보고 “시험 성공입니다!”라고 선언했다. 현대일렉트릭 직원들은 그제야 손에 쥔 땀을 털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중 하나인 전기연은 타 출연연과 구분되는 ‘시험인증’이라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 ‘산업의 피’에 비유되는 전기 설비는 사소한 고장이 도시·산업 전반을 마비시키는 정전으로 이어지는 탓에 그 무엇보다 신뢰성과 안전성이 우선된다. 수백만 볼트의 낙뢰에 맞거나 합선 등 사고로 고압의 전류가 설비로 침투하더라도 끄떡없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극한 상황을 인공적으로 구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기연은 전 세계에 12곳밖에 없는 국제 공인 시험인증 기관(STL) 중 하나로 세계 2위 및 아시아 1위의 시험 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전기연에서 발급한 인증서는 믿을 수 있다’는 인식이 업계에 널리 퍼져 있어, 일본·중국·동남아·중동 등의 전력 설비 업체가 비싼 운송비를 감수하고 시험을 의뢰하러 온다.

국가 기간 산업에 속하는 전력 산업 특성 상 시험인증을 받지 못하면 납품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내 전력 기업의 수출 경쟁력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시험을 진행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해외에선 대기업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는 전력기기 산업에서 최근 국내 중소기업이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정홍 현대일렉트릭 차장은 “우리야 시험에 실패하면 문제점을 보완하고 재시험을 신청할 수 있지만, 해외 업체는 그대로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한국에 이렇게 우수한 시험인증 기관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라고 했다.


배수진 전기연 RSS센터장이 췌장암 표적 치료용 형광복강경 광원장치를 들고 있다. 사진 한국전기연구원
배수진 전기연 RSS센터장이 췌장암 표적 치료용 형광복강경 광원장치를 들고 있다. 사진 한국전기연구원

모든 신기술은 전기로 통한다

전기연은 시험인증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 기업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전기가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전기자동차, 차세대 배터리 산업 분야 등은 물론이고, 의료·신소재·방산 등 여러 분야에서 전기를 접목한 신기술을 개발해 민간 기업에 전수하고 있는 것.

대표적인 성과가 지난해 4월 ‘동성제약’에 이전한 ‘췌장암 표적 치료용 형광 복강경 및 광역학 기술’이다. 동성제약이 보유한 ‘광(光)민감제’는 빛에 민감하게 반응해 특수한 레이저를 쪼이면 활성산소를 발생시키는 특질이 있는데, 이를 암 진단과 표적 치료에 응용한 것이다. 연구 담당자인 배수진 전기연 RSS센터장은 “정상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암세포만을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차세대 의료 기술로,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에게도 시행할 수 있다”고 했다.

‘구리-그래핀 전도성 잉크’ 기술은 소재 국산화와 가격 경쟁력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사례로 꼽힌다. 반도체와 같은 전기·전자 부품에서 전선 역할을 하는 전도성 금속잉크는 그동안 대일 수입 의존도가 높아 취약점으로 지목됐던 ‘원천 소재’다.

값비싼 ‘은’을 주재료로 하는 기존 일본산 금속잉크와 달리 ‘구리’를 사용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했다. 기술료 5억5000만원에 로열티 1.5%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전기연에서 기술을 이전받은 ‘대성금속’은 월 10t 규모의 대량 생산 설비 구축을 완료하고 연내 상용화를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Plus Point

[Interview] 최규하 한국전기연구원 원장
“실험실에 갇힌 기술은 죽은 기술…지역 산업 살리는 출연연 돼야”

최규하 한국전기연구원 원장. 사진 한국전기연구원
최규하 한국전기연구원 원장. 사진 한국전기연구원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인 ‘초연결성’은 모든 개인과 산업이 ‘전기로 통하는’ 시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기 시장이 끊임없이 확대될 것이기에 이와 관련된 신기술을 개발해 기업에 매력적인 먹거리를 만들어주는 우리의 임무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최규하 한국전기연구원 원장은 1월 31일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지역 산업이 위태로운 지금, 전국 각지의 출연연은 지역 기업과 유기적으로 협력해 첨단 기술로 돌파구를 만들어 줄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2018년 취임한 최 원장은 그동안 전력기기·의료·소재·기계·방위산업 등 다방면에서 실용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지역 기업에 전수하는 데 힘써왔다.


왜 지역 기업과 협업을 강조하나.
“기본적으로 매칭의 문제다. 지역 기업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업계의 첨단 기술 경쟁에서 줄줄이 탈락해 위기를 맞고 있다. 이를 해결해 줄 기술이 분명 있지만, 민간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실험실에 잠자고 있었다. 실험실에 갇힌 기술은 죽은 기술이나 마찬가지다. 죽은 기술을 내보내 살리는 것이 원장인 내 역할이다.”

전기연은 전력망 관련 기술에 특화된 기관인데, 민간에 이전한 기술은 전혀 뜻밖의 것들이 많다.
“‘전력의 안정적 공급’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대대적으로 국가 전력망을 확충하던 시기에 부여된 미션이다. 아시아 최고의 시험인증 기관이 되는 것으로 그 임무는 완수됐다. 지금의 미션은 ‘전기의 편리한 사용’이다. 전기가 사용되지 않는 산업 분야가 없듯이, 전기연은 그동안 스마트 팩토리부터 전자폭탄, 전기선박, 의료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개발해왔다. 이를 민간에 이전하면서 ‘이색적이다’는 반응이 나온 것 같다.”

앞으로의 목표는.
“취임하며 선포한 비전이 ‘글로컬(global과 local의 합성어) 전기연’이다. 그동안 지역 기업을 기술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로컬’에 집중해왔다.올해는 다양한 국제협력을 통해 전기연의 브랜드 가치를 한층 높이고, 지역 기술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