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촬영된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 노선상가 전경.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73년 촬영된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 노선상가 전경.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아파트 공화국’은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단어다. 아파트는 2019년 기준 국내 전체 1812만7000가구 가운데 1128만7000가구(62%)를 차지하는 대중적인 주거 형태다. 때론 어느 아파트에 거주하는지가 사회적 지위도 반영한다. 국내에 아파트 붐을 몰고 온 단 하나의 단지만 꼽자면 1970년 준공된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이 주로 언급된다. 국내 최초로 준공 이전에 모델하우스를 지었고, 국내 최초로 프리미엄(웃돈)이 붙은 아파트 단지여서다.


해수욕장 같던 그 시절 ‘한강백사장’···모래 위에 지어진 단지

이촌동 한강맨션은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인근 한강변을 따라 지어졌다. 지상 1~5층, 23개 동, 660가구다. 이 땅은 과거 백사장이었다. 1960년대까지 이촌동~노들섬은 드넓은 모래벌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시 지도에 이촌동은 ‘한강백사장’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시대 이촌동은 ‘사촌(沙村·모래마을)’이라고 불렸다. 오랜 기간 서울 시민의 여름 피서지로 사랑받은 공간이었다. 이촌동의 과거 사진을 보면 바닷가 해수욕장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 백사장을 메워 택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은 1962년 서울시 사업으로 시작됐다. 하천부지를 택지로 조성해 주택난을 해소하고 인근 주택 침수 피해를 막으며 택지 매각으로 시비(市費)도 벌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매립지에 이촌동 공무원아파트(1968년)가 준공됐다. 이후 공무원아파트보다 한강에 보다 가까운 땅에 건설부 산하 수자원개발공사가 1968년 다시 택지 조성 작업을 펼친다. 이 땅을 대한주택공사(주공)가 매입하며 지은 단지가 한강맨션이다.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는 한강맨션 기공식에서 장동운 당시 대한주택공사주공 총재를 만나 “장 총재, 꼭 봉이 김선달 같구먼. 한강 모래 팔아 돈 버는 것 같아”라는 농담을 건넸고, 장 총재는 “주공의 공신력으로 집 장사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웃어넘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한주택공사는 이 부지에 중산층을 위한 최고급 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공 아파트는 저소득층을 위한 시민아파트로만 지어진 때여서 꽤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임승업 주택도시연구원 주택연구소장이 쓴 1970년 6월 ‘주택 제25호’는 공공도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택 공급에 나서야 한다는 고민이 읽힌다. “경제 성장률이 유례없이 빠른 국가이고 개인 소득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보면 국민의 주택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중앙 관서의 빈약한 주택 정책으로서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고 (중략) 무엇인가 주택공사가 다 하지 못했음을 절감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한주택공사의 가장 큰 고민은 공사비였다. 공공 자금을 서민층이 아닌 부유층에 썼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어서였다. 대한주택공사가 꺼낸 카드는 모델하우스를 짓고 주택을 선분양해 건설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선분양이 일반적이지만, 후분양이 당연하던 당시엔 공급의 대전환이었다. 대한주택공사는 택지비를 제외하면 분양 광고비 800만원과 모델하우스 건립비 200만원만 쓰고 건설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았다.


왼쪽부터 6월 29일 한강맨션 전경과 한 아파트 입구. 사진 고성민 기자
왼쪽부터 6월 29일 한강맨션 전경과 한 아파트 입구. 사진 고성민 기자

최초로 프리미엄 붙은 단지···식모방도 조성

한강맨션의 고급화는 평면에 집중됐다. 우선 27~55평형으로 공간을 기존 아파트 대비 확 넓혔다. 32평형 이상에선 중산층 수요에 맞추고자 부엌 근처에 식모방을 조성했다. 당시 농어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이 부유한 가정에 식모로 일하는 일이 많았다. 담장을 설치하고 초소와 경비원을 배치했고, 차별화를 위해 미술계에 외벽 색깔도 자문했다.

특히 50평형대는 당시 사회상으로 매우 호화스러운 주택이었다. 현재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당시 5급 공무원의 1972년 기준 1호봉 월급은 1만7300원이었다. 한강맨션의 분양가는 27평형이 340만원, 51평이 645만원이었으니 호봉 상승 없이 단순 계산해보자면 27평형을 분양받으려면 약 16년, 51평형을 분양받으려면 약 31년이 필요했다.

한강맨션은 대한주택공사의 최초 선분양 단지여서 직원들이 최초로 분양에 발 벗고 나섰다. 장동운 총재는 2006년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분양을 촉진시키려고 주공 직원들에게 2만~3만원씩 활동비를 지급했다”면서 “한강맨션이 분양되지 않으면 감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직원들에게 겁을 줬고, 직급별로 책임 분양을 유도했다”고 말했다. 1969년 9월 1차 분양에서 약 41%를 분양한 데 그쳤는데, 몇 달 뒤 완판한 이후 국회의원들이 분양권을 달라고 청탁해 오더니 1970년 7월 입주할 땐 분양가의 10~15%씩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한다.

한강맨션의 분양 성공으로 인근에 고가 아파트 건설이 잇따를 정도였다. 장 총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사무실로 저를 찾아왔어요.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 합디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정 사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부지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정 사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그 이후에 삼익주택, 한양, 라이프주택 등이 잇달아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한강맨션은 준공 50년이 지난 현재도 최고가 단지 중 하나다. 전용면적 89㎡(약 27평)는 4월 28억원에 거래됐다. 전용 120㎡(약 36평)는 지난 1월 30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재건축을 추진하며 신축 아파트로 변모한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재건축 이후 지상 35층, 1441가구 아파트로 변모할 예정이다. 2017년 재건축조합이 설립됐다.

6월 29일 찾은 이촌동 한강맨션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주공 아파트에서 많이 보이는 수십 년 자란 나무들이 아파트 키만큼 성장해 있었다. 빛바랜 ‘관리소·놀이터’ 표지판과 직사각형 반듯이 용적률 101%로 지어진 건물이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강맨션에서 1970년대부터 거주했다는 김모(76)씨는 “지금은 강남에 밀리지만, 당시엔 택시 타고 ‘한강맨션 갑시다’ 하면 택시기사가 얼굴을 두세 번씩 힐끗 쳐다보곤 했다”라면서 “녹지가 많고 대지가 넓어 주거지로 안정감이 든다”고 말했다.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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