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과천 ‘푸르지오 써밋’ 조감도. 사진 대우건설
경기도 과천 ‘푸르지오 써밋’ 조감도. 사진 대우건설

“디에이치(현대건설), 아크로(DL이앤씨), 푸르지오 써밋(대우건설), 르엘(롯데건설)….”

대형 건설사들이 자신 있게 내놓는 고급(High end) 아파트 브랜드다. 각각 힐스테이트, e편한세상, 푸르지오, 롯데캐슬이라는 고유 브랜드가 있지만 별개의 브랜드를 론칭해 지위재(地位財)로서의 아파트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고급 브랜드가 최근 건설 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롯데건설이 북가좌6구역 재건축 사업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롯데캐슬’ 대신 고급 브랜드 ‘르엘’을 적용하겠다고 밝히면서다. 건설 업계에서는 북가좌동이라는 입지에 비추어 볼 때 의외의 결정이라 보고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별도의 고급 브랜드를 출범한 건설사들의 고민을 보여준 사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롯데건설은 북가좌6구역 재건축 조합에 자사의 고급 브랜드 ‘르엘’을 제안했다. 건설사들의 고급 브랜드가 주로 강남 재건축 단지의 전유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다. 롯데건설은 “(롯데건설이 수주한) 상암 DMC 복합쇼핑몰과 수색 역세권 개발 사업과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밝혔다.

롯데건설의 설명에도 건설 업계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결정이 롯데건설의 ‘아픈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롯데건설은 앞서 흑석9구역 재건축 사업의 시공사로 선정됐지만, 르엘 브랜드를 적용할지 문제로 조합원들과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롯데건설은 애초 흑석9구역에 28층·11개 동 설계안을 제안했지만 서울시의 25층 고도 제한에 걸려 무산됐다. 롯데건설은 25층·16개 동 대안을 제시했지만 조합은 롯데건설의 고급 브랜드인 ‘르엘’을 요구했다. 이에 롯데건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조합의 시공 계약 해지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건설이 북가좌6구역에 선제적으로 르엘 카드를 내놓은 배경에 흑석9구역의 전례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북가좌6구역을 두고 롯데건설과 맞붙은 DL이앤씨는 똑같은 고급 브랜드 ‘아크로’로 맞불을 놓는 대신 ‘드레브372’라는 북가좌6구역 전용 브랜드를 따로 내기로 했다. 롯데건설과는 달리 기존 고급 브랜드의 희소성을 지키면서 청담동에서 주로 쓰는 형태의 독자 브랜드를 새로 제안한 전략으로 보인다. ‘아크로’ 카드를 아낀 DL이앤씨도 아크로를 적용해 달라는 조합들의 요구가 곳곳에서 갈등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9년 4월 수주했던 신당8구역에서 아크로 적용 여부를 두고 재개발 조합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이번 달 7월에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지난 2015년 롯데건설·현대산업개발·금호산업 등과 컨소시엄을 꾸려 참가했던 광주 ‘최대어’ 서구 광천동 재개발 사업에서도 지난 5월 같은 이유로 계약을 해지당했다.


서울 대치2지구 재건축 아파트인 ‘르엘 대치’ 조감도. 사진 롯데건설
서울 대치2지구 재건축 아파트인 ‘르엘 대치’ 조감도. 사진 롯데건설
강남구 개포주공3단지 재건축 아파트인 ‘디에이치 아너힐즈’ 조감도. 사진 현대건설
강남구 개포주공3단지 재건축 아파트인 ‘디에이치 아너힐즈’ 조감도. 사진 현대건설

고급 브랜드 전략 딜레마도

건설사들은 조합들의 고급 브랜드 적용 요구에 나름의 기준이 있다며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회사 내부에서 입지, 향후 발전 가치, 주변 시세, 건설자재, 각종 단지 내 편의시설과 그에 따른 공사비용 등 여러 요소를 기준으로 종합적으로 심사해 결정하는 사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준 자체가 회사의 ‘영업 기밀’이기도 해서 대외적인 공개는 어렵다”면서 “회사 입장에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고급 브랜드 적용 시 3.3㎡당 공사비는 일반 브랜드의 30~50%가량 더 비싼 것으로 추정된다. 집 안까지 대리석 등 최고급 마감재를 적용하는 것은 물론 수영장·영화관·사우나 등 호텔급 커뮤니티 시설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조합원들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비용이다. 그럼에도 조합들이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은 지역 시장을 이끄는 ‘랜드마크’로 떠올라야 향후 시세를 끌어올릴 여력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급 브랜드는 특성상 희소할수록 가치가 있는 지위재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건설사들은 조합들의 요구를 마냥 들어주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DL이앤씨의 ‘드레브372’도 이 같은 고민의 산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고급 브랜드를 둘러싼 건설사와 조합 간의 갈등은 일정 부분 건설사들이 자초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4~5년 전 브랜드 론칭 당시만 해도 최고급화 전략으로 강남 일대 단지에 한정적으로 적용해 희소성을 앞세우던 건설사들이 정비사업 수주전이 치열해지면서 먼저 조합에 고급 브랜드 카드를 제시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고급 브랜드 현상은 강남뿐 아니라 서울의 경계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우건설이 업계 최초로 고급 브랜드 ‘푸르지오 써밋’을 비(非)강남권인 흑석11구역과 비수도권인 부산 남구 대연4구역 대연비치에 적용한 바 있다. DL이앤씨도 지난 3월 부산 해운대구 우동1구역에 비수도권으로는 처음으로 ‘아크로’ 적용을 약속했다. 광주 서구 광천동 재개발 조합이 DL이앤씨와 계약을 해지한 배경에는 ‘서울’ 장벽이 뚫린 우동1구역 사례에 조합이 자극받아 ‘아크로’ 브랜드를 요구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최고급 브랜드 사용을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아닌 리모델링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현대건설은 동부이촌동 한가람아파트의 리모델링 사업에 ‘힐스테이트’의 상위 브랜드 ‘디에이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현될 경우 리모델링 단지에 고급 브랜드를 적용하는 첫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같이 흘러가자 아예 고급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던 건설사들이 내심 미소를 짓는 경우도 있다. 삼성물산과 GS건설은 별도의 고급 브랜드 없이 각각 ‘래미안’과 ‘자이’ 브랜드로 일원화하고 있다. GS건설의 경우 일부 단지에 ‘그랑 자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자이’와 별도의 브랜드는 아니라는 게 공식 입장이다.

고급 브랜드를 론칭하지 않은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몇 년 전 고급 브랜드 열풍이 불었을 당시에는 트렌드에 뒤처지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결과론적으로는 브랜드를 이원화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또 “건설사들은 강남 사업지만 진출할 것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공사비가 저렴한 지역도 진출해야 하는데, 사업지에 상관없이 고급 브랜드를 요구하면서 오히려 사업 수주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심지어 기존 단지에서도 불만이 쌓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여기저기 고급 브랜드를 적용하면 결국은 고급이 아니게 되고, 결국 또 다른 브랜드를 론칭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유병훈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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