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티그룹은 2004년 한미은행을 인수해 한국씨티은행을 출범했으나 17년 만에 국내 소매금융 사업을 접기로 했다. 사진은 한국 진출 초반인 2006년 서울의 한 씨티은행 지점. 사진 조선일보 DB
씨티그룹은 2004년 한미은행을 인수해 한국씨티은행을 출범했으나 17년 만에 국내 소매금융 사업을 접기로 했다. 사진은 한국 진출 초반인 2006년 서울의 한 씨티은행 지점. 사진 조선일보 DB

한국씨티은행이 국내 소매금융 부문을 철수하기로 했다. 씨티그룹이 2004년 한미은행을 인수해 한국씨티은행을 출범시킨 지 17년 만의 일이다. HSBC·골드만삭스·바클레이스 등 글로벌 금융 공룡들의 한국 시장 실패 사례는 이렇게 또 명맥을 이어가게 됐다. 날로 치열해지는 금융 시장 환경과는 별개로 규제와 간섭투성이인 한국 금융 환경도 외국계 엑소더스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 정부가 꿈꾸는 서울·부산 중심의 동북아 금융허브의 꿈도 이대로는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씨티그룹은 4월 15일 올해 1분기 실적과 함께 한국 소매금융 사업을 정리하는 내용이 담긴 사업 전략 재편 방향을 발표했다. 씨티그룹은 한국을 포함한 13개 시장에서 소매금융 영업을 철수하고, 아시아·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의 소매금융 사업을 4개의 글로벌 자산관리센터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유명순 한국씨티은행장은 “기업금융을 중심으로 한국 사업을 재편·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금융위)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국내에 있는 씨티은행 점포 수는 43개다. 이들 지점 중 소매금융 점포는 36개다. 상당수는 정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임직원 3500명 중 소매금융 관련 종사자는 939명이고, 총여신 24조3000억원 가운데 소매금융 여신은 16조9000억원이다. 한 씨티은행 직원은 “사업 철수 소식이 전해진 후 대출 연장 여부 등을 묻는 고객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씨티은행의 한국 소매금융 정리는 전부터 예견돼온 일이다. 한국씨티은행의 2020년 순이익은 1878억원으로, 2794억원을 기록한 2019년보다 32.8% 줄었다. 2018년 순이익은 3074억원이었다. 특히 소매금융 부문 순이익은 2018년 721억원, 2019년 365억원, 2020년 148억원으로 매년 크게 쪼그라들었다.

이는 씨티그룹이 2015년 한국씨티은행 자회사인 씨티캐피탈을 매각하고, 2017년에는 당시 133개였던 점포를 44개로 축소하는 등 몸집 줄이기 노력을 한 이후에 나온 결과여서 충격을 더했다. 씨티은행은 2019년 전신(前身)인 한미은행 시절부터 썼던 서울 중구 다동 본점까지 매각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올해 초 씨티그룹의 새 수장이 된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최고경영자(CEO)는 2015년 씨티그룹의 중남미 책임자로 일하면서 브라질·아르헨티나·콜롬비아의 리테일과 신용카드 사업 부문을 매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구조조정 전문가다. 프레이저 CEO 선임은 씨티은행의 한국 철수설에 불을 지폈고, 현실이 됐다. 한국에서 소매금융 영업을 유지하는 외국계 은행은 이제 SC제일은행만 남게 됐다.


외국계 금융사 무덤 된 韓

사실 외국계 은행의 ‘한국 잔혹사’는 씨티그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3년 영국 HSBC은행이 한국 소매금융 사업을 접었고, 2017년에는 미국 골드만삭스, 영국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과 바클레이스, 스페인 빌바오비스카야(BBVA) 등이 한국을 떠났다. 호주 맥쿼리은행도 2019년 국내 시장에서 짐을 쌌다.

금융 시장 내 다른 영역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네덜란드 ING생명(2013년), 독일 알리안츠생명(2016년), 미국 푸르덴셜생명(2020년) 등 글로벌 보험사가 한국을 떠났고, 골드만삭스자산운용(2013년), 미국 JP모건자산운용(2018년) 등 대형 운용사도 발길을 돌렸다. 전문가들은 저금리 핀테크 기업 등장 등 금융회사의 생존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환경뿐 아니라 각종 규제와 간섭으로 기업을 옥죄는 한국 금융 당국도 다국적 금융사의 탈(脫)한국을 촉진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회사 입장에서 한국 금융 당국의 참견 정도는 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 내 다른 금융 선진국과 비교해 너무 강하다”라고 했다.

예컨대 금융위는 지난 1월 금융지주의 배당 성향을 20% 이내에서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불확실성이 커진 데 따른 권고였으나 금융지주에 투자한 주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간섭이었다. 씨티은행을 포함해 한국에서 영업 중인 대부분의 금융회사가 이 권고에 따라 배당 성향을 20%로 맞췄다.

주주 불만이 커지자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배당 성향이 30%는 돼야 한다는 게 일관된 생각이다. 코로나19라는 부득이한 상황으로 배당을 낮춰 죄송하다”라고 사과했다.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도 “주주 가치 측면에서 기대에 못 미치고 있음을 경영진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다”라고 했다.

3월 25일 시행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불완전 판매의 입증 책임을 금융회사로 돌렸다. 7월부터 시행되는 법정 최고 금리 인하(연 24→20%)도 카드사에는 수익 악화와 직결되는 문제다. 금융소비자 보호 명분이라 기업은 대놓고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여기에 국회는 서민금융 재원으로 은행·카드·보험사가 5년간 1조원을 출연하는 내용의 서민금융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

익명의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 시장은 24시간 돌아가고 밤낮이 없는데, 한국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빠른 대응이 힘들다”라며 “너무 높은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도 외국계 기업에는 부담”이라고 했다.


금융허브 가능할까

글로벌 금융회사의 한국 엑소더스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금융허브로 성장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야심 찬 계획에 찬물을 뿌릴 수밖에 없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 전략’을 세우고, 2009년 서울과 부산을 금융 중심지로 지정했다.

결과는 어떨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외국계 금융회사의 한국 내 점포 수는 164개다. 2016년 168개에서 4개가 줄어든 것이다. 올해 3월 영국 조사업체 Z/Yen이 발표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순위에서는 서울이 16위, 부산이 36위에 올랐다. 중국 상하이 3위, 홍콩 4위, 싱가포르 5위. 일본 도쿄 7위 등과 비교하면 한국 정부의 금융허브 전략은 실패나 다름없다.

부랴부랴 금융위가 지난해 11월 최희남 당시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을 외국계 금융회사와 밀접하게 교류하는 금융협력대사에 임명했지만, 최 사장은 올해 3월로 임기가 끝났다. 금융 당국은 “KIC 사장 임기와 무관하게 금융협력대사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라고 했지만, KIC 수장 직함을 뗀 상태에서는 시너지와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게 금융 업계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