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용 스마트 브루어리 대표 전 삼성전자 부사장, 전 SK하이닉스 사장 /사진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오세용 스마트 브루어리 대표 전 삼성전자 부사장, 전 SK하이닉스 사장 /사진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충북 청주의 지역 특산주 양조장인 스마트 브루어리는 1인 양조장이다. 지난해부터 쌀소주, 보드카, 진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종업원이라고는 오세용 대표 한 사람이 전부다. 전통주 업계에서는 생소한 인물인 오 대표는 한국 반도체 업계에서는 ‘거물’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만 15년간 일했고, 2009년 부사장을 끝으로 삼성전자를 나온 뒤에는 경쟁 업체인 SK하이닉스 생산 담당 사장을 또 3년간 맡았다(2013~2015년). 재직 당시 SK하이닉스 직원 수가 1만2000명 정도였다.

이 정도의 이력이면 모교인 서울대 공대 석좌교수가 다음 자리로 어울릴 법한데, 그는 고향인 청주로 내려가 1인 양조장을 차렸다. 이미 돈과 명성을 거머쥔 그가 뒤늦게 ‘증류주 양조’라는 제2의 창업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반도체 업계의 명성이 전통주 시장에 안착하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국내 처음으로 쌀을 주원료로 보드카와 진을 만드는 등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여러 제품을 내놓았지만, 아직 시장 반응은 신통치 않다. 모르긴 해도 연간 매출이 이전 직장의 한 달 월급에도 못 미칠 것이다.

최근 청주의 양조장에서 만난 오세용 대표는 오크통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양조장에 오크통이 20개가 넘었다. 오크통마다 쌀 증류주가 숙성 중이라고 했다. 오 대표는 “우리나라의 무더운 한여름이 증류주 숙성에는 최상의 조건”이라며 “스코틀랜드에서 몇 년 숙성할 것이 한국에서는 일 년이면 충분하다”라고 했다.

오크통 숙성 중인 술은 작년에 내놓은 쌀소주 마한이다.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두어 달 숙성한 마한은 색이 투명한 반면 1년간 오크통에 숙성한 ‘마한 오크’는 위스키처럼 호박색이다. 마한 오크는 알코올 도수도 위스키와 비슷한 40도로 올렸다. 마한 오크는 숙성 탱크 소재인 오크 향이 진하면서도 쌀소주 특유의 부드러운 곡물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위스키보다 더 맛있는 위스키’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올해 추석쯤 출시될 예정인 스마트 브루어리의 ‘마한 오크’. 사진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올해 추석쯤 출시될 예정인 스마트 브루어리의 ‘마한 오크’. 사진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삼성전자 부사장, SK하이닉스 사장까지 지내고 나서 소규모 양조장을 차린 이유는.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평소에 술을 좋아했다. 공대 출신이라 그런지 술 마실 때마다 ‘이 술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왜 이 맛이 날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술에 대한 궁금증을 항상 갖고 있었다.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시간이 나서 일 년간 양조 아카데미를 다녔다. 2015년 SK하이닉스 사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창업을 준비해 2019년 양조장을 차렸다.”

스마트 브루어리의 대표 상품은 청람(25도)과 마한이다. 청람은 마시기 좋은 소주다. 전통 누룩이 아닌 입국을 사용하고, 감압증류 방식으로 만들어 부드럽고 경쾌하면서 은은한 배·사과 향과 함께 보디감(묵직함)도 좋다는 사람이 많다.

‘마한’은 알코올 도수가 36도다. 국내 중국 식당에서 독보적으로 잘 팔리는 백주가 ‘연태 고량주(34도)’인데, 연태 고량주를 상대할 우리 술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든 게 마한이다. 명욱 숙명여대 주임교수(미식 문화 최고위 과정)는 “마한은 묵직하면서도 상큼함이 도드라지는 고급 소주”라고 평가했다.

알코올 도수가 다른 것 외에 청람(25도)과 마한(36도)의 차이점은.
“청람은 증류 과정에서 초류(증류 초기에 나오는 증류액)를 많이 쓴다. 초류의 향이 짙기 때문이다. 술의 도수가 높으면 자연스레 향도 진한데, 물을 상대적으로 많이 타는 25도 술은 향을 살리기가 36도에 비해 힘들다. 그래서 청람을 만드는 데 초류를 많이 넣는다.”

국산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20여 개)에 쌀소주를 숙성 중이다.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소주라고 부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소주와 다른 술이 탄생한다. 소주보다는 오히려 위스키에 가까운 맛의 술이 된다. 여름을 지낼 경우 6개월만 오크 숙성하면 색깔이 호박색(전형적인 위스키 색상)보다 진해진다. 올가을에 나올 신제품 ‘마한 오크’는 여름을 지내기 때문에 제대로 숙성된 색·향·맛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고온(한여름) 숙성이 술맛을 좋게 하는가.
“지하 공간 같은 데서 하는 저온 숙성은 대부분 와인 숙성에 해당하는 얘기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도 저온 숙성하는데, 그건 그 지역 기후 조건이 저온 숙성에 알맞기 때문일 것이다. 고온 숙성이 숙성에 효과가 큰 것을 그 사람들도 알았더라면, 아마 숙성 장소를 다른 곳(훨씬 기온이 높은 곳)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 대만 위스키가 위스키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게 바로 아열대 기후인 대만에서 숙성한 위스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속성 숙성의 위력을 대만이 보여줬다. 1년 숙성 마한 오크(375㎖)는 2만5000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마한은 1만4000원(375㎖)이다.”

세계적인 전통주, 특히 증류주는 일반적으로 화이트(무색투명)와 골드 계열로 나뉜다. 위스키가 처음 나왔을 때는 보리나 밀을 발효시켜 증류한 화이트 계열이었으나 과도한 세금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몰래 만들다 보니 버려진 셰리 와인 오크통에 보관하면서 지금의 골드 계열의 위스키로 탄생하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반면에 옹기 문화 전통이 강한 한반도는 나무통 문화가 발전하지 않아 나무통 숙성 전통은 없지만, 전통주의 발전적 측면에서 ‘오크통 숙성’은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대기업 사장까지 지낸 사람이 소규모 양조장을 차렸는데.
“삼성에서 10년 이상 임원을 하고 SK하이닉스 사장을 3년이나 한 사람이 무슨 돈이 궁하다고 술 사업을 하나? 이렇게 딱하다고 보는 부류가 있다. 또 하나는 고향인 청주에 은퇴해서 뒤늦게 귀농 비슷하게 하니 나중에 지역 국회의원이나 시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억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술이 좋고, 술 만드는 게 좋고, 내가 만든 술을 사람들이 기분 좋게 마시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술 사업을 한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좋은 술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할 욕심은 있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