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 5층 옥상정원. 사진 현대건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 5층 옥상정원. 사진 현대건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지하철 신용산역 앞 고층 빌딩 사이 정육면체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건물 위와 옆, 뒤쪽엔 큰 구멍이 뚫려있고 그 사이로 초록빛 정원이 보인다. 보름달처럼 우아하게 빛나는 이 건물은 아모레퍼시픽 사옥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 건물은 지하 7층~지상 22층, 대지면적 1만4525㎡(약 4394평), 연면적 18만8902㎡(약 5만7201평) 규모다.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설계하고, 현대건설이 시공했다. 공사는 2014년 8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진행됐다. 공사비는 5706억원. 준공 이후 약 6000여 명의 상주 인원(아모레퍼시픽 및 삼일회계법인 등)이 입주해 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신사옥 건립 계획을 확정하면서 기업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주변 지역과 조화를 이룬다는 기본 원칙을 세웠다. 자연과 도시, 지역사회와 회사, 소비자와 임직원 사이에 교감과 소통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고층이 아닌 넓은 공간의 사옥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준공 이후 이 건축물은 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및 국토교통부장관상, 2018년 한국건축가협회상 건축가협회장상, 세계초고층도시건축학회(CTBUH)의 ‘2019 CTBUH 어워즈’ 대상 등을 받으며 국내외 업계와 학계로부터 큰 호평을 얻었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 전경. 사진 아모레퍼시픽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 전경. 사진 아모레퍼시픽

2만여 개 루버, 디자인 살리고 에너지 아껴

아모레퍼시픽은 전 세계 건축가 49명을 선정해 공모전에 초청했다. 이후 현상설계를 거쳐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제출안을 뽑았다. 치퍼필드는 한국 방문 당시 한눈에 반한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단아하고 간결한 형태를 갖춘 단 하나의 커다란 볼륨을 가진 건축물로 설계했다. 또 한옥의 중정을 연상시키는 건물 속 정원을 집어넣는 등 한국의 전통 가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소로 아름다움을 더했다.

치퍼필드는 2018년 기자간담회에서 “신사옥이 단지 일하는 공간이 아닌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으면 한다는 서경배 회장의 생각에 공감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건축물 사방의 문이 사람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며 “직원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했다.

“사옥은 크게 노출 콘크리트, 유리, 알루미늄, 화강석(국내산 포천석) 등의 마감재로 시공됐다. 이는 물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재료를 쓰겠다는 치퍼필드의 디자인 철학이 담긴 것이다.” 6월 사옥에서 만난 조태희 아모레퍼시픽 부동산전략팀 부장은 해안종합건축사무소 출신으로, 아모레퍼시픽 사옥 설계부터 준공까지의 여정을 들려줬다.

지상 22층 큐브 모양의 이 건축물 외관은 독특해 존재감이 남다르다. 외벽은 백색 핀(Fin·알루미늄 루버·햇빛 가리개) 2만1511개가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핀의 길이는 4.5~7m로 다양하다. 총중량은 3300t에 달해 1년 동안 제작, 시공했다.

알루미늄 핀들로 이뤄진 기하학적인 외부 마감과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색의 변화가 이 건축물만의 역동성과 차별성을 만들었다. 핀은 디자인적 요소뿐 아니라 에너지 절감의 용도로도 계획된 장치다. 태양광이 직접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오피스 설계의 경우 공조시스템 등 다른 냉난방 요소를 감안해 여름철 빛을 차단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건물 안은 전반적으로 밝고 깨끗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다. 이는 밝은 회색빛의 노출 콘크리트, 3층 높이(15.9m)에 달하는 높은 층고가 만들어 낸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는 콘크리트 표면에 별도 마감을 하지 않고 거푸집을 떼어낸 콘크리트 구조체를 마감으로 사용해 조형미를 강조하는 공법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건축 전문가들은 혀를 내두른다고 한다. 매끄러운 표면의 고품질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조태희 부장은 “콘크리트가 굳으면서 기포가 생길 수 있는데, 기포 자국이 전혀 남지 않은 표면을 구현해내고자 하면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고 설명했다.

현대건설도 가장 큰 난제였다고 회고했다. 설계사와 발주처가 원하는 노출 콘크리트의 품질 수준을 이해하고자 직원들이 38개월의 공사 기간 중 총 28차례나 독일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논의를 하고 대안을 찾았다.

김종호 현대건설 부장(공무팀장)은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정형화된 틀이 없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는 분야라 설계사와 발주처가 원하는 품질 수준과 콘셉트를 우선 파악해야 했다”고 했다. 그는 “모든 부위별로 실물 크기의 목업(mock up) 공사(샘플 시공)를 수십 차례 했고, 디자이너와 협의를 거쳐 최종 품질 수준과 공법을 확정한 뒤 실제 시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하늘에 떠 있는 대형 정원···소통·휴식 공간

건물 5층과 11층, 17층에 총 세 개의 ‘옥상정원’이 있다. 빽빽한 빌딩 숲 서울 도심 지상에서도 보기가 쉽지 않은 광장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 직원들은 푸른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쉴 수 있다. 치퍼필드는 정육면체 건축물의 세 면을 뚫어 공간을 비워낸 대신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담고자 했다. 한국 전통 조경의 ‘차경(借景)’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집 안으로 들여와 감상 대상으로 활용하는 한옥의 설계가 쉬운 예다.

천장에는 레오 빌라리얼 작가의 대규모 미디어 작품이 설치돼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작품 주위에 모여들어 소통하고 서로 예술적 경험을 공유하기를 원했다.

“건축물도 자연, 도시,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등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작품이자, 필요 이상의 높이나 유행하는 디자인보다는 건축물 자체의 가치와 수준에 집중한 작품이다.” 2019년 세계초고층도시건축학회는 아모레퍼시픽 사옥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