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 중국사회과학원 경제학 박사, 전 한국산업은행 산은경제연구소장, 전 한국산업은행 중국본부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
중국사회과학원 경제학 박사, 전 한국산업은행 산은경제연구소장, 전 한국산업은행 중국본부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

신고전학파 성장 모형 중에 ‘솔로 성장 모형’이 있다. 로버트 솔로는 198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로 미국의 경제 성장 과정을 분석해 성장 과정을 이론화했다. 여러 가지 단순한 가정을 동원하긴 했으나 그의 결론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면 자본 축적이 중요하며, 자본 축적이 어느 정도 이뤄지면 그 효과가 체감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기술 진보가 필요하다. 국민소득 증대를 통해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속적인 방법으로 기술 진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기술은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 시장과 일부 기술에 국한된 경우를 일반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은 일반적인 시장이 아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한참 회자하던 말 중에 “시장으로 기술을 바꾼다(以市場煥技術)”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외국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자국의 방대한 시장을 무기로 사용한 상징적 표현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외자기업들은 자사의 기술을 중국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사만 가진 독보적인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가진 일반화된 기술일수록 기술보다는 시장이 우선한다. 많은 기업이 가진 보편적인 기술은 독자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력이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시장을 무기로 삼는 중국에서 우리 기업이 피해를 보는 산업으로 게임 산업을 들 수 있다. 중국은 한국에 자유롭게 게임을 수출하고 직접투자 등을 마음대로 단행하고 있으나, 한국 기업들은 중국 정부가 소위 판호라고 하는 판매허가권을 수년 동안 내주지 않아 중국 진출이 막혀 있는 상황이다. 시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자국 시장 보호 정책을 시행하면 그 시장에 진입할 방법이 막혀버린다. 기술이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독보적인 기술은 시장을 이긴다

그러나 시장이 기술을 이긴다는 것은 독보적인 기술 앞에서는 통할 수 없다. 세계에서 기술력이 가장 강한 미국이 기술을 무기화하자 시장을 무기로 하는 중국이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중국이 외국의 선진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기 위해 한동안 추진해왔던 시장과 기술을 맞바꾸는 행위는 절대적 기술 앞에서는 힘을 잃게 마련이다. 절대적 기술 우위를 가진 미국이 통상전쟁과 기술전쟁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시장을 무기로 한 기술 습득 전략은 그 빛을 잃고 있다.

최근 한국이 비교적 높은 경쟁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분야가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다. 이 두 가지 기술이 중국에서 각각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배터리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주로 삼원계 배터리를 생산해온 데 비해 중국은 에너지밀도 등 여러 면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아온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생산해왔다.

한국 기업들은 방대한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삼원계 배터리 공장 건설에 대한 중국 정부 당국의 인허가를 취득하고 중국 내 현지 공장을 설립한 바 있다. 그러나 공장 준공을 마치자마자 중국 정부의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이 발동돼 지금까지 중국 내 판매가 거의 막혀있는 실정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안전성 기준을 이유로 자체적인 안전 기준을 통과한 기업을 의미하는 화이트리스트라는 임시적 제도를 두다가 반대가 심해지자 다시 이를 철회하는 등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들을 시행해왔다.

또한 보호 정책 시행 기간 면에서도 장장 5년여에 걸쳐 한국 등 외자기업은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철저히 제외해왔다. 중국 정부의 눈물겨운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은 빛을 발해 지금은 중국 배터리 기업인 CATL이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과 세계 1, 2위를 다투는 수준까지 올라온 상태다. 배터리 산업은 중국이 시장을 무기로 자국 산업과 기업을 철저히 보호해온 정책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이 소위 선진기술은 아니지만, 삼원계와는 다른 계통의 기술인 리튬인산철 배터리 기술을 갖고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배터리와는 다른 반도체 상황

반면, 반도체는 그렇지 못하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원천기술과 장비기술은 주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미·중 간 기술경쟁으로 미국이 중국으로의 기술 이전을 막는 정책을 통해 중국의 반도체 기술 습득을 억제하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서도 배터리처럼 다른 계통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중국은 시장을 무기로 독자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기술은 중국이 대체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계속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반도체 원천기술 내지는 장비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에 반도체 기술이 있었다면 반도체 부문도 배터리와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의 중국 반도체 시장 진입이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터리와 반도체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장 보호 정책을 시행하는 해당 국가가 관련 기술을 가졌는지 여부와 해당 기술의 독보성 여부가 시장 진출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DRAM)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고 중국이 아직 이 분야에서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중국 내 판매가 순조로운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국이 관련 기술을 습득하고 해당 제품을 생산하게 되면 반도체도 스마트폰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시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자국 산업 보호와 자국 기업 몰아주기 정책이 발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술이 없으면 시장에 진입할 수 조차 없다. 누구나 가진 기술이면 레드오션에서 다른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겪으면서 박(薄)한 이윤으로 언제 도태될지 모르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시장을 무기로 쓰는 중국에서 기술은 일시적으로 시장을 이길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술이 자사만 가진 독보적인 기술일수록 그 시장도 기술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시장보다 중요하고, 시장을 이길 수 있다. 그 기술을 피해갈 수 없다면 더욱더 그렇다. 중국 시장이 아무리 방대하다 하더라도 초격차를 보유하고 있는 기술은 항상 경쟁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기업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어깨너머로 남의 기술을 배우고, 독자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술을 개발해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퍼스트무버가 돼 누구보다 앞서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개발해야 더 앞으로 도약할 수 있다. 소위 기술에서의 초격차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선다면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은 어느 시장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더욱이 시장도 작고 부존자원도 별로 없는 한국에서는 기술만이 살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