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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최첨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국가와 기업의 운명을 가를 산업기술 유출 범죄는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발생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해외로 유출된 국가 핵심 기술은 34건에 달한다.

산업기술을 유출하는 방식도 다양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국내 기업 직원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돌리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경쟁사가 직접 해당 직원을 채용하는 등 범행이 교묘해지고 있다.

통상 산업 기술 유출 범죄에서는 재판 관할권이 쟁점이다. 해외 기업을 국내에서 기소하고 처벌할 수 있는지가 문제 되는 것이다. 발광다이오드(LED) 분야 한국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서울반도체와 대만의 경쟁사 에버라이트의 기술 유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에서는 명확한 판례나 법률 규정이 없기 때문에 범죄 혐의를 발견하고도 에버라이트를 재판에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서울반도체의 영업비밀을 유출한 직원 세 명과 에버라이트 법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침해 행위자(에버라이트)가 국내 법인이 아님에도 양벌규정상 관리 책임을 인정하고,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는 큰 규모의 벌금형을 내린 것이다. 법원은 에버라이트에 벌금 6000만원을, 직원들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3년을 선고했다.

이처럼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물론 법원의 유죄 판결까지 끌어낸 데는 서울반도체를 대리한 법무법인 율촌의 노고가 컸다. 율촌 신산업IP팀장인 임형주(사법연수원 35기) 변호사는 “산업스파이 행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5000억원짜리 기술, 해외 경쟁사로 넘긴 직원들

서울반도체는 LED 분야에서 세계 3위(시장 점유율) 회사다. 매출의 10% 수준을 연구개발(R&D) 비용으로 투자하며 1만8000건 이상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에버라이트는 동종 업계 세계 7위 기업이다.

서울반도체에서 상무로 재직하다 2016년 6월 퇴직한 김모씨는 한 달 뒤 에버라이트로 이직하면서 서울반도체가 개발한 자동차에 쓰이는 LED 소자 제조 기술을 빼돌렸다. 연봉 협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에버라이트로부터 영업비밀 유출과 고액 연봉을 제안받고 부사장으로 이직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빼돌린 자료로 자동차용 헤드램프 LED 개발을 시도하다 성과가 없자 서울반도체 직원이던 손모씨와 안모씨에게 두 배의 연봉 등을 제안하며 이직을 제안했다. 결국 이들은 영업비밀을 드라이브에 저장한 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김씨에게 전달했다.

이들이 유출한 기술은 서울반도체가 7년간 5600억원의 막대한 금액을 투입해 개발한 자동차용 LED 핵심 특허 기술이다. 2011년 국내 최초로 양산에 성공하면서, 정부에서도 경제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한 바 있다.

손씨와 안씨는 서울반도체 퇴사 후 몇 년 동안 경쟁 업체로 이직할 수 없는 경업 금지 계약을 회피하고자 가명을 사용하고, 가짜 명함까지 쓰는 등 지능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의 범죄는 에버라이트가 고객사를 상대로 프레젠테이션(PT)을 하던 과정에서 드러났다. 서울반도체에서 사용하는 PPT 템플릿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가짜 명함에 가짜 이름까지 써놓고 템플릿은 그대로 사용하는 다소 황당한 우(憂)를 범하면서 꼬리가 잡힌 셈이다.

결국 서울반도체는 직원 세 명을 고소했고, 검찰은 2018년 10월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대만에 소재한 에버라이트를 한국에서 기소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되면서, 1년이 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해외 법인 국내서 기소…‘산업기술’ 침해 행위 인정

서울반도체와 에버라이트(1심 법무법인 매헌, 2심 법무법인 서정)는 수사 단계부터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에버라이트 측은 2016년 이전부터 서울반도체의 자동차용 LED 기술에 상응하는 제품들을 출시하고 보유하고 있었다며 서울반도체의 기술을 사용할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율촌은 에버라이트가 충분히 서울반도체의 기술을 빼돌릴 만한 ‘유인’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에버라이트가 서울반도체의 특정 제품에 상응하는 제품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해당 제품의 성능 개선이나 제조 원가 절감을 위해 경쟁 회사 제품들의 제조 공정·조건·원재료명 등을 알아내고자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다.

특히 김씨가 유출한 서울반도체의 ‘공정 다이어그램’은 제품의 불량률을 낮추고 수율(투입 수에 대한 완성된 양품의 비율·불량률의 반대)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하우가 담긴 것으로, 에버라이트로서는 해당 자료를 바탕으로 수율의 획기적인 향상이나 불량률 감소 등 성능을 개선하는 데 활용하기에 충분하다고 맞섰다.

율촌은 에버라이트의 범죄 혐의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해외 법인을 국내에서 기소할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쟁점이 떠올랐다.

에버라이트로 이직한 직원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속인주의(국적을 기준으로 모든 자국민에게 법을 적용하는 원칙)가 적용되지만, 해외 법인은 속지주의(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 대한민국 법을 적용하는 원칙)와 속인주의, 어느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율촌은 에버라이트가 우리나라 회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직원들이 서울반도체의 영업비밀을 유출한 행위는 국내 법인에 죄를 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검사를 설득했다. 외국인이 대한민국 영역 외에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 우리 형법이 적용된다는 판례도 찾았다.

율촌은 대만 로펌에 ‘서울반도체가 에버라이트 직원을 채용해 영업비밀을 빼돌렸다면 대만에서 서울반도체를 기소할 수 있느냐’고 자문을 요청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결국 검찰은 2019년 8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에버라이트를 기소하는 데 성공했다.


法 “행정부의 ‘산업기술 확인’ 존중해야”

재판에서는 이들이 빼돌린 기술이 단순히 ‘영업비밀’에 해당하는지, 국가에서 인정한 ‘산업기술’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1심은 “LED 스프레이 코팅 기술이 산업기술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율촌은 국가에서 정한 산업기술 카테고리에 정확히 들어맞는 기술만 인정해 준다면 해외 유출 범죄를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정한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산업기술보호법의 취지를 설명하며 행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산업기술로드맵 유망기술체계도를 분석해 LED 형광체와 관련한 유망 기술로 형광체 도포 기술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항소심은 “LED 스프레이 코팅 기술은 산업기술보호법에서 정한 산업기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산업기술 확인은 대상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 산업기술인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행정청이 전문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다.

임 변호사는 “최근 해외로의 기술 유출이 크게 문제 되는 가운데 세계 시장에서 글로벌 업체와 경쟁하는 국내 토종 기업의 권리를 두껍게 보호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며 “특히 외국 법인에 양벌규정상 관리 책임이 인정됐고,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큰 액수의 벌금형이 선고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