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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의 임금을 깎는 성과연급제(임금피크제)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화제가 됐다. 고령자고용법의 차별금지 규정을 위반하기 때문에 무효라는 취지였다.

당시 대법원이 제시한 임금피크제는 ‘연령에 따른 차별(고령자고용법 4조의 4)’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 아래 도입 목적이 타당해야 하고 불이익이 심하지 않아야 하며 불이익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근로 시간 감소 등)와 감액 재원을 도입 목적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결이 나온 뒤 혼란은 가중됐다. 공공기관과 일반 사업장이 각기 다른 형태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합리적인 기준’을 두고 갈등이 커진 것이다. ‘우리 사업장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등의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소송이 유행처럼 잇따랐다. 노동조합(노조)을 만나 임금피크제 소송만을 골라 선임하는 변호사들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갈등의 타협점을 제시할 만한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정봉기)는 지난해 10월 근로자 A씨 등 301명이 서울교통공사(서교공)를 상대로 “임금피크제로 인해 삭감된 임금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것이다. 

서교공의 임금피크제가 합리적이라는 취지의 판결이다. 법무법인 원이 5월에 나온 대법원 판결을 분석한 결과였는데, 법조계에서는 이를 두고 “모호했던 ‘합리적 이유’의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서교공 근로자·퇴직자 “위법한 임피제…71억 돌려달라”

서교공은 2017년 5월 서울메트로와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합병하며 설립됐다. 별도로 나뉘어 있던 노조도 합쳐졌다.

합병 전인 2015년 11월, 두 회사 노조는 각각 임금피크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의 노사 합의를 맺었다. 정년퇴직일을 2년 앞둔(만 59세)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되, 임금 감액률을 만 59세는 10%, 만 60세는 20%로 차등 감액한다는 게 골자였다. 임금피크제 관련 보수 등 세부 사항을 따로 정한다는 취지로 취업 규칙도 개정했다.

임금피크제의 적용 대상인 만 59·60세 근로자들은 퇴직 후 2년 뒤 소송을 제기했다. 노사 합의를 맺으며 신설한 취업 규칙과 근로자의 개별 근로계약 모두 임금을 감액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아, 종전 근로계약에 따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근로자들은 근로 강도는 그대로인데 임금이 삭감돼 위법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서교공이 ‘연령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헌법 11조와 근로기준법 6조, 고령자고용법 4조의 4 등을 어겼다는 주장도 보탰다. 

취업 규칙에 임금피크제 시행 관련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비조합원인 일부 근로자에게는 임금피크제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위법한 임금피크제로 피해를 본 것이니, 임금과 퇴직금 등 약 70억6500만원 상당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대법 판결로 암초 만난 원 “임피제 합리적 이유 찾았다”

원고와 피고는 소송 초기 ‘유리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느냐를 놓고 맞섰다. 유리의 원칙은 노동법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다. 근로 조건에 관한 두 개 이상의 규정이 상충할 때 근로자에게 유리한 조건을 먼저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근로자들(원고)은 서교공이 단체협약을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근로계약서에는 ‘취업 규칙을 따른다’고 명시했으나 연봉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지는 않았다며, 단체협약(임금피크제) 이전까지 적용됐던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취업 규칙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교공을 대리한 법무법인 원은 아무리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내용이더라도 단체협약이 가장 큰 효력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노조법상 단체협약이 우선하기 때문에 유리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근거를 들었다.

하지만 소송이 마무리될 무렵인 지난해 5월 법무법인 원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의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이 판례를 두고 “피고 측에 불리한 판결”이라며 “서교공의 사례가 대법 판례와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소명·입증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고 A씨 등이 이 판결을 증거로 제출했다. 소송을 이끈 김도형(사법연수원 24기) 변호사는 “동일한 사안은 아니었지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위급하다는 판단에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법무법인 원은 해당 대법원 판결을 ‘임금피크제가 모두 무효는 아니다’는 취지로 해석하고 차이점을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 서교공 임금피크제의 목적이 인건비 절감이 아닌 재정적 어려움 극복 및 청년층 일자리 창출 등 공익에 있다는 근거를 제출했다. 

이지현(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감액된 재원이 청년 고용 등에 쓰였다는 것을 입증할 자료를 냈다”고 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이 입을 불이익이 크지 않다는 점도 강조했다. 애초 지난해 5월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한 한국전자부품연구원은 만 55세를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대상이 된 근로자들은 5년 동안 삭감된 임금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교공의 경우 2년에 불과하며 그에 대한 임금도 10%, 20%씩 차등해 감액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오정익(사법연수원 41기) 변호사는 “5월의 대법원 판례가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는 자료를 찾았고, 법정에서 제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또 서교공이 근로자들에게 퇴직 6개월~1년 전부터 근로 여부와 상관없이 동일한 급여를 제공했다는 점, 매월 2일 유급휴가를 부여하는 점, 20만원 상당의 교육 훈련비 등 보상책을 마련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법원 “서교공 임금피크제 합리적 이유 있다”

재판부는 우선 서교공의 임금피크제에서 ‘유리의 원칙’이 문제 되지 않는다며 법무법인 원의 손을 들어줬다. 서교공이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을 준수하기 위해 단체협약인 노사 합의를 맺었고, 개별 근로계약서에서 임금 관련 구체적 근로 조건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재판부는 서교공의 임금피크제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도 판시했다. 목적성을 인정하면서 근로자가 입는 불이익이 크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정부는 공공기관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주겠다고 예고했다”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근로자들의 성과급 등이 감액되고 총인건비 재원도 동결돼 전체 직원들에게 피해가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교공의 업무 경감 조치도 충분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근로자의 1개월 근로 일수가 약 22일인 점을 감안하면, 추가 휴일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업무 경감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서교공이 임금피크제 도입 후 직원을 신규 채용해 목적의 정당성도 입증했다고 판단했다. 서교공은 지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727명을 별도 정원으로 채용했다. 재판부는 “목표치인 738명에 이르지 못했지만, 미달된 수치가 미미하므로 절감된 재원 대부분이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됐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오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기준을 제시하지만 그 기준을 구체적인 사안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며 “비록 하급심이지만 이번 판결이 임금피크제에 따른 불이익, 어떤 대상 조치가 필요한지, 임금피크제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