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27일 LG그룹은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크림을 생산하던 3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출발한 LG는 60년에 걸쳐 한국을 대표하는 80조원대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구씨와 허씨의 동업관계로 한층 관심을 모았던 LG는 57년 만에 동업을 청산하고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를 주력으로 제 2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탄한 대로(大路)만은 아니다. 때문에 ‘인화단결’을 기업이념으로 각 계열사의 자율경영을 중시해 왔던 경영체제는 구본무 회장에 의해 ‘성과주의’로 급선회하고 있다. 구 회장의 의지와 같이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 고객이 인정하는 일등 LG”로 가기 위해 LG그룹은 창업 60주년을 맞아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고객가치 창출로 100년 기업에 도전한다.

경기도 이천에 자리한 LG인화원의 지난 1월은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사실상 비상근무 체제였다. 특히 담당부서인 리더교육팀 임직원 10여 명은 말 그대로 폭주하는 업무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LG인화원은 그룹 인재 양성소로 불린다. 갓 LG 배지를 단 신입사원에서부터 부장급까지의 직급별 교육은 물론 임원과 CEO에 대한 모든 교육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LG경영개발원이라는 법인명에서 알 수 있듯이 LG인화원은 인재 양성소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매년 정기인사가 끝난 후 신규 임원 승진자에 대한 구본무 회장의 부부 동반 축하 만찬이 열리기도 한다. 또 구본무 회장이 주재하는 경영전략회의를 매년 개최함으로써 LG그룹의 한 해 경영 방향을 결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글로벌 CEO 전략회의’가 그것이다. LG그룹은 지난 1월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구본무 회장을 비롯해 강유식 ㈜LG 부회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김반석 LG화학 사장 등 40여 명의 최고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글로벌 CEO 전략회의를 개최했다.

LG인화원이 올 초 비상근무 체제로 야근과 철야를 반복했던 것은 매년 8월 개최됐던 글로벌 CEO 전략회의가 올해는 1월로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예년과 달리 “연초부터 LG의 경영 방향에 대한 최고경영진 간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 해 동안 해야 할 일을 보다 명확히 정의해 실행력을 강화하자는 구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물론 갑작스런 결정은 아니었다. 이미 지난해 회의 때 결정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담당부서인 리더교육팀도 일찌감치 이틀에 걸친 CEO 전략회의의 프로그램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구본무 회장의 위기의식과 성과주의

올해 LG그룹의 글로벌 CEO 전략회의는 그 어느 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의미가 남다르다. 단순히 오는 3월27일로 LG그룹이 창립 60주년을 맞이하는, 특별한 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사상 최악의 경영 실적을 기록함에 따라 연말에는 그동안 LG그룹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실상 최초의 성과에 의한 대규모 사장단 문책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그룹의 미래가 위기와 재도약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은 올해 전략회의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예전 같았으면 “CEO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며 “각 사에 맞는 차별화된 고객가치 창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철저한 실행 방안 마련에 주력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끝냈을 구 회장이 “고객가치 창출과 관련한 올해의 성과에 대해서는 철저히 점검할 것”이라고 덧붙인 것은 이 같은 위기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날 전략회의에서 구 회장은 “고객가치 중심 경영이 아직 LG에 확고히 뿌리 내리지 못했고 차별화된 고객가치 창출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도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고 지적하고, “단기 목표 달성을 위한 현안 이슈 해결에 치중하는 현재와 같은 방식의 경영으로는 결코 차별화된 고객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호되게 질책했다. 이어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경영의 패러다임을 보다 철저하게 고객가치 중심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단 전략회의에서만이 아니었다. 구 회장은 신년사에서도 “창립 60주년을 맞는 새 아침에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엄숙한 질문”이라며 임직원을 향해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었다. 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우리만의 전략은 무엇이며, 이를 위한 역량 확보 방안은 구체적으로 준비되어 있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리고 “5년 전, 10년 전 관행을 고집하며 실수만 하지 않으려는 타성에 젖은 습관이 있다면,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LG그룹 60년 역사에서 올해와 같이 위기의식을 겉으로까지 드러낸 적은 없었다. 창업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LG카드 사태 때도 속으로는 앓았을지언정 지금과 같이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 LG그룹의 분위기는 분명 다르다. 구 회장부터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CEO를 필두로 임직원을 향한 채찍질에도 나서고 있다. 심지어 창립 6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이라도 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기념식은 고사하고 연례적으로 축하 인사를 겸해 개최해왔던 신규 임원 승진자 부부와의 만찬도 취소해 버렸다. 성과 이전에 기분부터 들떠 샴페인을 터뜨릴 여지를 아예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화단결’을 기업이념으로 채택한 LG그룹이 항상 긴장과 경쟁의식을 불어넣으며 생존을 위한 일류를 강조했던 삼성그룹과 같이 철저한 성과주의를 앞세우며 위기경영 체제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화학·통신서비스로 재도약 리모델링

LG그룹은 창업주인 고(故)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이 부산 서대신동 공장에서 크림 생산에 성공하고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로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개척하며 국가 산업 및 경제발전을 물론 국민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해 왔다.

구 창업회장은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지금의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던 1907년에 태어나 식민지 청년의 아픔을 몸으로 겪으며 성장했다. 연암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통해 경제력을 길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보다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부산으로 나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연암은 1945년 11월 미 군정청이 승인한 첫 무역회사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연암과 사돈간이자 승산마을의 손꼽히는 만석꾼이었던 고(故) 허만정씨는 평소 젊은 사업가인 구 창업회장의 사업 역량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고(故)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의 경영수업을 의뢰하고 출자를 제의하게 되면서 양가의 동업 경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7년 41세에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뎌 오늘날 LG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한 것이다.

화장품 생산으로 제조업에 진출한 연암은 1958년 국내 최초의 전자회사인 금성사를 설립하고 이후 라디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전화기 등 수많은 전자제품을 국내 최초로 생산해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또 1967년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인 호남정유를 설립함으로써 기업 성장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1969년까지 금성통신, 금성전선, 럭키개발(現 GS건설) 등을 설립해 쉼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LG가 한창 성장하고 있던 1969년 12월31일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은 향년 6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1970년 1월9일, 연암에 이어 구자경 회장(현 LG명예회장)이 취임함으로써 LG는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전기를 맞이했다.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양축으로 삼아 관련 산업 분야와 유통, 증권, 보험 등 금융·서비스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LG는 1970년대를 관통하며 10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했고, 본격적인 R&D 체계 구축을 위해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럭키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LG화학은 여천공장을 준공함으로써 창업 이래 숙원이었던 석유화학 원료사업 진출의 꿈을 이루었고, 울산, 온산, 나주, 청주공장을 준공하여 생산기지의 전국화를 달성했으며, 유전공학과 정밀화학 등 첨단산업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 LG전자도 구미, 창원, 평택 및 청주 등 대단위 공장을 잇달아 준공하고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함으로써 한국 전자산업의 리더로서 진면목을 발휘했다. 1982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법인인 GSAI를 미국 헌츠빌시에 세우며 우리나라 산업 해외 진출사의 새장을 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10여 년은 변화와 혁신의 시기였다. 첨단기술 개발, 신규 사업 진출 등의 영역에서 커다란 경영 성과를 거두었으며 1984년 1월1일자로 그룹 이름을 럭키그룹에서 럭키금성으로 변경하고 다가올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름을 바꾼 이후 구자경 회장은 ‘21세기 경영 구상’ 등을 추진하는 경영 혁신에 매진했다. 다가올 21세기는 기업 간 경쟁에 국경의 의미가 없어지고 기술을 무기로 한 무한 경쟁이 전개될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1990년 2월에는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선포하는 등 21세기 경영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이념과 체제를 정립했다.

1995년 2월22일 구본무 회장이 취임함으로써 LG는 21세기를 향한 힘찬 전진을 시작했다. 또한 럭키금성에서 ‘LG'로 CI(기업이미지통합)를 개정, 새 브랜드로 새로운 역사를 향해 출발했다.

구 회장 취임 이후 LG는 기존의 화학과 전자사업의 성장 속에서 이동통신과 TFT-LCD사업에 도전하였으며, 중국과 유럽, 미주 지역에서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세계화 전략을 펼쳐 글로벌 기업으로 LG의 위상을 심어 나갔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는 국내 기업 가운데 최대인 65억달러 외자유치 등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선택과 집중에 의한 ‘사업구조 조정’, 그리고 지주회사체제로의 전환을 통한 ‘출자구조 재편’ 등의 단계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해 ‘재무 건전성’과 ’경영 투명성‘ 확보라는 성공적인 구조조정 성과를 달성했다. 특히 LG는 2003년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계열사 간 복잡한 순환출자 관계를 합리화하여 출자는 지주회사가 전담하고, 사업자회사는 출자에 대한 부담 없이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 및 철저한 이사회 중심의 경영으로 고유 사업에만 전념토록 하는 등 지배구조를 정비했다.

한편, LG는 지주회사 체제를 안착시키는 과정에서 LS그룹과 GS그룹의 계열 분리를 단행함으로써 창업 이래 57년간 단 한차례의 잡음도 없이 이어졌던 구·허 양가의 동업경영체제를 아름답게 마감했다.

이로써 LG는 전자, 화학 및 통신·서비스를 핵심 사업 영역으로 100년 기업으로의 재도약을 선택했다.

전자사업 부문에서는 세계 각국에 100여 개의 현지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기업으로 면모를 갖추었고, LG전자는 전체 매출 가운데 해외 매출 비중이 80%에 달하고 42인치 LCD TV, 광스토리지, 가정용 에어컨, CDMA 휴대전화 등 11개 제품이 세계 일등제품으로 등극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LCD사업은 1999년 합작법인 출범 이후 세계 No.1의 위상을 지켜오면서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위상을 확고히 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파주 디스플레이 클러스터의 1단계 공사를 마무리하고 세계 최초로 7세대 생산공장을 완공했다.

화학사업 부문에서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여 석유화학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하였고, 2차 전지 및 편광판 등 정보전자 소재사업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육성시키고 있으며, 건축자재 부문에서는 통합 브랜드 지인(Z:IN)을 출범시키며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LG생활건강은 프리미엄 전략을 적극 전개하여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LG생명과학은 팩티브의 미국 FDA 신약 승인을 받는 등 생명과학기업의 위상을 굳건히 다졌다.

1996년 LG텔레콤으로부터 시작된 LG의 통신 서비스 사업도 LG데이콤과 LG파워콤 인수를 통해 통신사업의 새로운 강자로의 도약을 기대하고 있다. 또한 LG는 2005년 ‘LG 브랜드 출범 10주년’을 맞아 ‘LG WAY’를 선포,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바탕으로 ‘정도경영’을 실천하여 ‘일등 LG’를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선언했다.

구 회장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지금 우리는 지난 60년의 성과를 기반으로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으로 발전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또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으로 한 발 앞서 고객이 인정하는 가치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창출하고 전달하는 고객가치 선도경영으로 미래의 변화를 주도해야만 100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100년을 뛰어넘는 기업을 향한 선택

그러나 지난 60년과는 달리 100년을 뛰어넘겠다는 LG그룹의 미래는 순풍에 돛을 단 듯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LS·GS그룹의 분가 이후 그룹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특히 구씨 일가의 독립경영 첫 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난해 경영 실적은 사상 최악이었다. 매출은 늘었지만 순익 규모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LG그룹의 총매출은 80조원. 지난 2003년 85조원, 2004년 82조원, 2005년 84조원과 비교할 때 성장 정체기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LG 관계자는 “2005년까지의 매출은 LS·GS그룹의 분가 이전”이라며 “순수한 LG그룹만의 매출은 사실상 2006년부터”라고 말했다. 줄어든 게 아니라 예전 LS·GS그룹 분가 이전의 매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순익 규모에서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특히 미래 첨단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그룹의 양대 산맥인 LG전자와 LG필립스LCD의 수익률 하락은 위기라는 분석까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LG전자는 매출 23조원에 6000억원의 영업 이익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매출은 2.5%가 떨어졌고 영업 이익은 무려 41.5%가 하락했다. LG필립스LCD도 매출은 사상 최대인 10조6240억원이었지만 적자가 8790억원이나 됐다. 2005년 10조원대의 매출에 5000억원대의 순익을 올린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구본무 회장이 지난 연말 정기인사를 기점으로 임직원들 앞에서 위기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LG그룹은 지난 60년 동안 매출액 3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8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화장품 제조업으로 첫 사업을 시작한 1947년에 3억원 가량의 매출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0년 뒤 화학사업에 이어 전자사업이 본격 성장하기 시작한 1967년에는 6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또 국제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1970년에는 520억원을, 무역·금융·서비스 등으로 사업의 다각화를 추진한 1980년에는 2조7000억원을, 경영 혁신을 본격화한 1990년에는 16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첫 해인 1995년에는 50조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매출액 규모 각각 30조원과 12조원인 GS, LS그룹의 계열분리 후에도 전자, 화학, 통신 서비스 분야에서 2006년에는 창립 첫 해 대비 26만 배 이상 성장한 80조원대의 매출을 기록,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수출도 1962년 국산 라디오 62대를 미국에 첫 수출함으로써 4000달러의 실적을 기록한 이후 44년이 지난 2006년에는 1000만 배가량 성장한 400억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LG가 받아든 초라한 성적 앞에 구 회장의 위기의식은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올해를 기점으로 100년을 넘어서 한 단계 도약하느냐, 아니면 현대그룹과 같이 뒷방으로 밀려나느냐의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립 60년 LG의 국내 최초 제품들

화장품 -‘럭키크림’

LG가 고객과 처음으로 대면한 제품은 1947년 내놓은 화장품 ‘럭키크림’이다. 갈색 용기에 미국의 유명 여배우 ‘디아나 다빈’의 얼굴을 담은 이 제품은 세련된 용기 디자인으로 “상하이에서 들어온 외제품”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럭키크림은 만들어내기 바쁘게 동이 났고 나날이 인기가 치솟아 타사 제품이 1타스에 500원 하던 때 럭키크림은 1000원을 주어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럭키크림 이후 LG의 화장품 브랜드는 ‘드봉’, ‘라끄베르’, ‘이자녹스’, ‘오휘’, ‘후’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플라스틱 가공제품

LG는 화장품사업을 시작하고 4년이 지난 1951년에 화장품 용기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플라스틱 가공산업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1951년 10월에 사출성형기 한 대를 미국에 발주하는 한편 1952년 4월에 범일동 공장을, 11월에는 부전동 공장을 각각 건설했으며, 1952년 9월부터 깨지지 않는 화장품 뚜껑 생산을 시작으로 빗, 비눗갑, 칫솔, 식기류 등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플라스틱 가공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다.

치약 -‘럭키치약’

1954년 럭키치약의 개발로 LG는 이전까지 소금이나 가루치약을 사용하던 우리 국민의 생활 습관을 튜브 형태의 치약 사용으로 전환시켰고, 외제보다 저렴하면서 품질도 우수해 마침내 1957년에는 미국의 콜게이트치약을 제치고 국내 시장 정상에 등극하게 된다.

이후 한국 치약산업사는 곧 LG치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첫 출시돼 지금까지 시판되고 있는 장수 브랜드 ‘럭키치약’, 1981년 출시돼 현재까지 약 6억3000만 개가 팔리며 20년 넘게 국내 시장 1위를 지켜온 치약의 대표 브랜드 ‘페리오치약’, 그리고 1990년대 죽염이라는 원료로 치약 소재를 차별화한 ‘죽염치약’ 등이 바로 그것이다.

PVC바닥재 -‘비닐꽃장판’

국내에 바닥재가 등장한 것은 45년 전인 지난 1958년. 당시 종이장판과 신문지나 한지를 흙과 함께 이용해 바닥을 마무리하던 시절에 LG화학이 ‘비닐꽃장판’이라는 국내 최초의 PVC바닥재를 개발, 시판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바닥재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그 후 LG화학은 1970년대 연탄과 기름보일러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개발한 온돌방용 바닥재 ‘하이펫트’, 1980년대 아파트 건설 붐과 함께 국내 주거용 바닥재시장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제품 ‘모노륨’, 1990년대 주부들의 청소 편의성을 고려한 신개념 바닥재 ‘깔끄미’, 그리고 2000년대 소리를 잡는 바닥재 ‘베스트빌소리잠’까지 시대별로 최고의 히트제품을 만들어왔다.

라디오

1959년 LG가 개발한 국내의 최초 라디오(모델명 : A-501)는 우리나라 전자공업을 일으킨 획기적인 일로 기록되고 있다. 라디오 부품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당시 국내 상황에서 스위치·트랜스·플레이트·소켓 등, 자체적으로 부품을 제작해 부품 국산화율이 60%가 넘는 전자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제 라디오에 의존하던 국내 시장에서 국산 라디오의 개발은 이후 국내 전파 매체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들어서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등 범국민적인 국산 라디오 보급이 진행되면서 금성 라디오는 국민 제품으로 발돋움했다.

선풍기

LG는 1960년 플라스틱 제품 생산을 통해 축적한 금형기술을 이용해 선풍기용 팬 모터를 개발하고 이 모터를 적용한 국내 최초의 선풍기를 선보였다. 당시 이 선풍기의 기능이 단순하기는 했으나 국산 모터의 개발은 선풍기와 함께 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생산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됐고 우리 생활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자동 전화기

라디오, 선풍기에 이어 LG의 세 번째 전자제품은 자동 전화기다. 그 시절 전화기는 체신부가 요구하는 사양을 그대로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LG는 자체 기술에 의한 제품을 개발한다는 자부심으로 트랜스포머, 벨, 스큐류 등 핵심부품도 자체 개발했다.

냉장고

1960년대 냉장고는 서민들이 꿈꾸기에는 너무나 비싼 외제품밖에 없는 실정에서 LG가 국내 최초의 국산 냉장고인 ‘GR-120’ 개발에 성공했다. 외제 냉장고가 시장을 장악하던 시기에 첫 국산 냉장고의 출시는 우리나라 식생활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LG 냉장고는 1965년 ‘눈표냉장고’라는 브랜드로 첫 출시된 이후 1970년대부터는 식품 노화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싱싱냉장고’가 개발돼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00년 출시된 양문형 프리미엄 제품인 프리미엄 브랜드 ‘디오스’는 이제 냉장고의 국내 대표 브랜드로 애용되고 있다.

합성세제 -‘하이타이’

지난 1966년 4월 개발된 가루형 합성세제 ‘하이타이’는 우리나라 주부의 생활 패턴을 바꾸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하이타이는 출시 초기 소비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분말세제에 대한 생소함과 전통적인 빨래비누와 방망이로 두드려 세탁을 하던 습관의 벽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하이타이를 예식장 답례품으로 개발, 판매에 나서면서 획기적인 성장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1960년대 최고 히트 상품의 하나가 되었다.

하이타이는 지난 1996년에는 출시 30년 만에 단일 브랜드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을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장수 브랜드이며, LG는 하이타이와 함께 1980년대에는 ‘슈퍼타이’, 1990년대에는 ‘한스푼’, ‘테크’ 등 세탁문화의 발전과 변화에 따른 합성세제를 출시해 국내 시장에서 계속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흑백TV

LG는 라디오 국산화를 이룩한 지 7년 만에 TV 개발에 성공, 우리 전자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세계에 한국 전자산업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리가 4개 달리고 1.5W의 진공관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TV는 우리 손으로 만든 텔레비전이라는 온 국민의 자부심과 호기심을 이끌어냈으며, 당시 쌀 27가마 값에 해당하는 6만8000원이나 되는 고가 제품임에도 공급이 달려 하는 수 없이 구입 신청에 의한 공개 추첨 방식으로 TV를 팔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국내에 텔레비전을 대중문화로 만든 것은 1975년에 개발된 당시 가장 큰 화면인 17인치 텔레비전이었던 ‘샛별 텔레비전’이었다. 이 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영구가 나오던 <여로>, 권투선수인 홍수환 선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던 장면 등을 전달하며 국민 제품으로 발돋움했다.

또 흑백TV를 개발한 지 10년만인 1976년에는 국내 최초의 19인치 컬러 TV ‘CT-808’을 생산했다. 1977년에는 국내 최초로 북미 지역에 컬러TV를 수출하기도 했다. LG의 컬러TV 개발은 흑백TV를 개발한 지 10년 만에 이룩한 기술력의 개가로서 영상문화시장에 일대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후 LG는 국내 컬러TV시장을 장악했던 ‘하이테크 텔레비전(1980)’, 조명 변화를 감지하여 최적의 화질을 찾아주는 ‘LG 와이드비전 라이브(1997)’, 디지털 텔레비전인 ‘X-CANVAS(2001)’, 세계 최초로 생방송을 멈추는 타임머신 기능을 탑재한 ‘타임머신TV(2005)’ 등을 선보이며 국내 TV시장을 선도해 오고 있다.

특히 타임머신TV는 디지털방송과 타임머신 기능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퍼지며 타임머신 기능이 디지털TV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을 정도로 TV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에어컨

TV, 라디오, 냉장고 등의 개발에 이어 에어컨의 개발은 1960년대 가전제품 시대를 여는 촉매가 되었다. 창문형으로 개발된 LG의 국내 최초 가정용 에어컨인 금성에어콘(GA-111)은 그 동안 수입에만 의존하던 국내 에어컨 시장에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LG의 에어컨은 1968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금성에어컨’, 1990년대에는 인체공학기술을 반영한 ‘바이오에어컨’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출시되었으며, 2000년대 프리미엄 제품 ‘휘센’은 6년 연속 세계시장 판매 1위를 달리며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서 에어컨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세탁기

LG는 196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세탁기 ‘WP-181’을 개발했다. ‘백조세탁기’란 애칭으로도 불린 ‘WP-181’은 알루미늄 세탁조로, 단순 기능의 2조식 수동기계였다. 세탁용량은 1.8kg에 불과했지만 주부의 가사노동 중 가장 힘들다는 세탁을 기계가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획기적인 문화혁명으로 받아들여져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LG세탁기는 ‘백조세탁기’ 이후 ‘레이디세탁기’, ‘빨래판세탁기’, ‘OK세탁기’, ‘리듬세탁기’, ‘카오스세탁기’, ‘통돌이세탁기’ 등의 브랜드를 거쳐 2000년부터 출시되고 있는 ‘트롬’ 세탁기는 국내는 물론 북미, 유럽 등 세계시장에서 프리미엄 세탁기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PVC창호 -‘하이샤시’

1, 2차 오일쇼크로 난방비 절감이 국가적 이슈였던 시기, LG는 기존의 알루미늄이나 목재 대신 PVC로 창호를 만들어 난방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했다. ‘플라스틱은 무르다’는 인식 때문에 사업 초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타 소재 대비 월등한 방풍, 단열 성능 덕분에 창호업계의 일대 변혁을 몰고 왔고 ‘창호=하이샤시’ 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는 등 대대적인 히트를 쳤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발코니 외창에도 PVC창호를 적용하면서 실외공간이나 다름없던 발코니가 실내공간으로 편입되는 주거문화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VTR

TV보다 부품 수가 3~4배 많고 초정밀 가공기술과 공업재료의 다양화가 요구되는 VTR의 개발은 국내 정밀기기산업의 기술 증진에 이바지했으며, 비디오의 대중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

금성사는 1970년부터 컴퓨터 기능을 응용한 기기들을 개발하기 시작해 1982년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컴퓨터 ‘마이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 컴퓨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던 1970년 이미 컴퓨터 사업부를 신설한 금성사는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개발로 우리나라의 컴퓨터 시대를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LG전자는 컴퓨터 관련 연구 개발과 투자를 지속 실시해 1984년에는 국내 최초로 IBM-PC와 완벽하게 호환할 수 있는 16비트 PC ‘GMC-6011/6021’을 자체 기술로 개발하고 1987년에는 고성능 보급형 16비트 PC ‘마이티-16 Ⅱ’를 개발하는 등 국내 컴퓨터 대중화 시대를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데스크톱PC에 이어 1993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TFT 컬러 LCD를 채용한 486SX급 노트북 PC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도킹 스테이션을 장착할 수 있어 휴대용 PC의 단점인 확장성을 보완하여 데스크톱 PC와 동등한 기능을 가질 수 있는 노트북PC이다. 2000년부터는 IBM과의 제휴를 통해 ThinkPad x20 등을 출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3년에는 LG전자의 독자 브랜드로 XNOTE 시리즈(XNOTE NZ2, NZ3, LM/LS)를 출시하며 노트북PC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기존 플라스틱 소재와 비교해 강성과 내열성이 우수해 자동차부품, 기계부품, 전자부품 등과 같은 공업적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금속 대체용 플라스틱 소재로 당시에는 반도체에 버금가는 첨단산업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제조기술의 습득이 어려운 분야로 우리나라는 1980년대 들어 전기, 전자, 자동차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이 소재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LG는 1983년에 국내 최초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개발, 전자 및 자동차산업이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CDMA 휴대전화

1996년 1월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가 개시되면서 휴대전화시장은 아날로그 이동전화기에서 데이터 통신 기능을 구현하는 멀티미디어 종합 단말기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LG전자는 CDMA 서비스에 맞춰 같은 해 2월 국내에서 최초로 CDMA 휴대전화를 선보이면서 국내 디지털 휴대전화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LG의 휴대전화는 ‘화통(1995)’이라는 브랜드를 시작으로, 귀족의 자손이라는 의미의 ‘싸이언(CION, 1997)’, 사이버 세상을 연다는 뜻의 ‘싸이언(CyON, 2000)’ 등의 브랜드로 출시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싸이언 브랜드의 블랙라벨 첫 번째 시리즈인 ‘초콜릿폰’과 2006년 출시된 두 번째 시리즈 ‘샤인폰’은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편광판

TFT-LCD용 편광판은 LCD의 광 특성을 결정짓는 핵심 소재로 코팅, 점착 등 정밀필름가공기술과 광학성능기술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소재로 그 동안 일본 업체들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품목이었다.

LG화학은 지난 1999년 오랜 연구개발 끝에 우수한 광학 특성뿐만 아니라 일본 제품보다 뛰어난 내구성 및 내열성을 가진 편광판을 국내 최초로 개발, 부품 소재의 국산화에 기여하는 한편 세계시장에서 일본 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팩티브

LG생명과학은 지난 2003년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으로부터 독자 개발한 퀴놀론계 항균제인 ‘팩티브(FACTIVE)’의 신약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국내 제약업계 106년 역사를 새로 썼다.

이는 국내 제약사 중 처음으로 美 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의 첫 탄생이었다. 특히 FDA 신약 승인을 받은 국가는 세계적으로 10여 개국에 불과해 한국 제약산업의 위상 제고는 물론 국내 신약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팩티브는 경ㆍ중증 폐렴이나 만성기관지염 등 호흡기 질환의 급성 악화에 치료 효과를 가진 차세대 항균제다.

지상파 DMB폰 (2004년) /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읽어주는 휴대전화 (2006년)

LG전자는 고속이동 중에도 선명한 화질의 실시간 방송을 제공하는 첨단 방송기술인 DMB를 적용한 지상파 DMB폰을 지난 2004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동안 프리미엄 복합 휴대전화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지켜온 LG전자는 이 제품 개발을 통해 글로벌 휴대전화시장에서 리더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또 LG전자는 앞선 기술을 이용해 시각장애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2006년 7월 시각장애인 전용 전화인 ‘책 읽어주는 휴대전화’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책 읽어주는 휴대전화’은 휴대전화의 모든 메뉴를 음성으로 안내해 줄 뿐 아니라, 음성인식기능, 문자메시지 음성변환 기능 등을 내장해 시각장애인들이 최대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