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최고경영자가 상품처럼 거래되는 ‘CEO 마켓’이 형성되는 걸까. 새 둥지서 옛 오너와 친정을 향해 ‘칼끝’을 겨누는 CEO들이 늘고 있다. ‘친정 저격수’로 불리는 이들 ‘이적파 CEO’들이 과연 2007년 각 산업계 판도 변화를 몰고 올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을까.

<삼국지>를 읽다 보면 유비 진영에 노장 황충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황충도 원래 유비 사람은 아니었다. 서기 208년 유비가 형주에 머무르며 영릉, 계양, 무릉, 장사 등 남쪽 4군을 점령할 당시 장사 태수 한현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다.

당시 관우와 일합을 겨뤘던 황충은 자신이 모시던 한현이 죽자 평소 덕망이 높던 유비 휘하 로 ‘전향’한 것이다. 유비에 몸을 의탁한 황충은 이후 혁혁한 공로로 ‘주군’에 보답했다. 219년 조조의 맹장 하후연의 목을 벤 것도 황충이다. 유비 입장에서 보면 황충의 ‘스카우트’는 대성공이었던 셈.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

요즘 재계를 보면 마치 삼국지 황충과 같은 영입파 CEO들이 넘쳐난다. 이들은 옛 인연을 끊고 ‘장수’로서 현재의 오너를 위해 충성하는 맹장들이다. 특히 자신의 전 직장 사정에 밝아 ‘친정 잡는 매’로 변신한 최고경영자들이 많다.

CEO급 헤드헌팅 경험이 풍부한 최효진 HR코리아 사장은 “국내에도 CEO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옛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장’이 되는 경우가 잦다”면서 “인재를 빼앗긴 기업 입장에선 골치 아픈 존재가 되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영입파 CEO들은 어차피 ‘내부 정치’로는 한계가 있다. 외부에서 ‘전과’를 올리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친정집이 타깃이 되는 진짜 이유다.

친정 식구들도 이들을 ‘배신자’로 보지는 않는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입장이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잘만 하면 시장 파이를 키울 선의의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말을 갈아탄 CEO들은 업계 1위 친정에 ‘선전포고’를 하기도 하고 옛 회사서 갈고 닦은 경영 기법을 새 둥지에 심는 ‘미투 전략’으로 친정 따라잡기에 나서고 있다. 말하자면 옛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와 이제는 ‘도전자’로 입장이 바뀐 셈이다.

요즘 이적생 CEO들의 활약상은 식품업계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띈다. 최근 CEO 스카우트 시장에서 가장 짭짤한 재미를 본 건 김재철(72) 동원그룹 회장이다. 지난해에만 그룹 내 식품 분야 양대 CEO인 김해관 동원F&B 사장과 김재선 동원홈푸드 사장을 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동원F&B 사령탑으로 건너온 김해관(56) 동원F&B 사장은 CJ 출신. 1974년 삼성그룹 공채 11기 출신으로 CJ의 전신 제일제당 시절부터 29년간 몸담아왔다. CJ 마케팅실장, 식품본부장, 생활화학본부장을 거친 ‘영업통’이다.

2000년 11월 동원그룹 모태인 동원산업에서 식품 분야만 떼어내 분사한 회사가 동원F&B다. 특히 김재철 회장이 “동원F&B를 국내 최고의 종합식품사로 키워 달라”며 직접 영입한 CEO가 바로 그다.

김 사장은 이적 후 넉 달 만인 지난해 7월 ‘제 2 도약 선포식’을 통해 김재철 회장 뜻에 호응하고 나섰다. 2012년 매출 2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비전이다. 취임 전인 2005년 동원F&B 매출액이 6411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6년 만에 덩치를 3배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다.

이를 위해 꺼낸 카드가 선택과 집중 전략. 참치캔 시장에서 점유율 75%를 기록 중인 동원참치 등 1위 상품은 시장을 키우고 3~4위 제품은 2위로 성장시키는 게 목표다. 특히 적극적인 신상품 출시로 종합식품사로 도약한다는 전략. 지난해 7월 ‘천지인’으로 인삼 사업에 뛰어든 데 이어 올 2월엔 즉석밥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다.

즉석밥은 자신의 친정인 CJ의 ‘햇반’이 지난해 850억원 매출액(예상)으로 시장의 70%를 석권하는 아이템. 1996년 12월 출시 후 연 시장규모가 1200억원에 이르는 CJ의 효자 상품이다. 무엇보다 출시 당시 CJ 마케팅 실장으로 햇반 사업의 주역이었던 그가 이제는 햇반을 잡겠다고 나선 셈이다.

동원F&B 마케팅실 서정동 팀장은 “2월말 출시 계획으로 현재 브랜드 작업 검토 중”이라며 “10년 만에 4억 개가 팔린 즉석밥 시장에서 동원F&B가 CJ를 추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해태유업 인수로 덩치를 키운 동원F&B의 ‘공격’은 2007년 즉석밥 시장에서도 성공할 경우 CJ와 본격적인 패권 다툼에 나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옛 동지서 ‘적장’ 변신 잇따라

동원그룹의 단체급식 및 식자재유통 업체인 동원홈푸드의 사령탑을 맡은 김재선(60) 사장. 그는 1971년 금성사(현 LG전자)로 입사, 2004년까지 33년간 LG그룹에 몸담아온 정통 LG맨. 특히 2001년 3월부터 2004년 8월까지 3년 5개월간 국내 선두권 단체급식업체인 아워홈 수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지난해 6월 동원홈푸드 지휘봉을 잡은 그가 취임 일성으로 선언한 말도 ‘아워홈을 추격하자’였다. 같은해 10월엔 ‘챌린지 2010’ 프로젝트를 발표, 매출액 2000억원대로 업계 3위로 도약하자고 선언한 상태. 지난해 동원홈푸드의 예상 매출액은 약 700억원 수준으로 업계 7~8위권. 3년 뒤 회사 규모를 3배 이상으로 올려놓고 빅3로 도약하겠다는 ‘333작전’이 김 사장이 그리는 계획표다.

이를 위해 ‘우보’ 전략으로 차근차근 추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특히 김 사장은 아워홈에서 닦아놓은 통치술을 동원홈푸드에 고스란히 옮겨 심는 데 열심이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을 ‘오픈 프라이데이’로 선정, 직원들과 대화에 나서는 모습이나 다양한 사내 제안제도를 시행, 아이디어를 헌팅하는 것도 닮은꼴이다. 특히 지난해 12월16일 토요일엔 400여 전 직원을 동원그룹 계열인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에 모아놓고 ‘혁신 공유회’를 실시하기도 했다.

박경근 동원홈푸드 마케팅팀장은 “김재선 사장 취임 후 ‘해보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면서 “평소 김 사장이 ‘모방도 창조’라며 업계 선두인 아워홈을 겨냥한 경영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최근 친정에 결정타를 날린 CEO로는 주류업계의 한기선(56) 두산주류BG 사장이 꼽힌다. 2004년 10월 진로 출신 한 사장을 영입한 것도 ‘참이슬’을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한 사장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진로 영업본부장과 부사장을 맡아 ‘참이슬 성공 신화’를 일궈낸 주역이다. 진로의 경쟁사인 두산 CEO로 취임한 지 2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축배’를 들었다.

지난해 9월6일, 한 사장은 측근들과 서울 모 음식점에서 거하게 소주를 삼켰다. 2월초 시판한 ‘처음처럼’의 시장점유율 10% 돌파 축하파티였다. 2006년 초만 해도 5% 남짓하던 소주 시장 내 두산 점유율을 8개월 새 두 배로 끌어올린 자축연이었던 셈.

지난해 12월 현재 두산 ‘처음처럼’의 시장점유율은 11~12%까지 올라간 상태. 반면 ‘소주업계의 삼성’으로 불렸던 진로는 효자 브랜드 ‘참이슬’을 내리고 ‘참이슬 후레쉬’로 전략 브랜드 교체라는 아픔을 삼켜야 했다. 이 같은 반전 드라마는 진로를 잘 아는 한기선 사장의 영입이 결정타였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차석용 사장, LG그룹 내 주가 상승 1위

2년 전만 해도 LG그룹 내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LG생활건강이 효자로 생환에 성공한 것도 영입파 CEO 덕분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2005년 초 부임한 차석용(54) 사장은 경쟁사인 한국피앤지 출신. 1등 LG를 외쳐온 구본무 LG 회장이 직접 영입했다는 말도 들린다.

영업 부진에 시달려온 LG생활건강의 최근 영업 실적이 개선돼 ‘성공작’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LG생활건강은 2006년 3분기 누적 매출액 7911억원과 영업이익 789억원의 실적을 달성했다. 전년에 비해 영업이익은 30% 이상 개선된 수치다. 미래에셋증권이 예측한 지난해 매출액은 1조136억원에 이른다.

특히 LG생활건강은 지난해 LG그룹 11개 상장사 중 주가상승률 1위를 기록했다. 연초 주당 5만5100원에서 출발한 주가는 12월15일 현재 12만3000원으로 2.2배나 뛰어올랐다. 특히 차 사장은 취임 직후인 2005년 2월 LG생활건강 3만 주를 사며 “재직 기간 중 주가를 10만원 대로 올려놓겠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총 6만 주를 보유한 차 사장은 현재 주식 평가액만 75억원을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린 것도 화제다.

변신에 성공한 건 차 사장이 세계 1위 생활용품업체 피앤지에서 배운 마케팅 노하우를 접목시킨 결과로 풀이된다. 일단 그는 ‘돈’이 안 되는 건 모두 ‘퇴출’이라는 강수를 써왔다.

매출액이 미미했던 할인점 전용 브랜드 ‘레뗌’과 ‘헤르시나’를 철수한 것이나 화장품 직판 사업에서 손을 뗀 게 대표적이다. 특히 매출액 감소를 감수하더라도 실익이 없던 OEM 수출을 접는 과감한 시도도 병행했다.

대신 경영 지휘봉을 잡은 2년간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에 사활을 걸었다. 치약, 샴푸, 기저귀, 생리대까지 모든 제품을 고급으로 바꾼 셈이다. 고가 화장품인 ‘오휘’, ‘후’가 지난해엔 전년에 비해 매출액 80% 성장한 것도 이 덕분이다.

그는 피앤지식 경영 기법을 도입한 것 외에 아예 피앤지에 맞불 작전을 펴고 있다. 피앤지의 ‘위스퍼’가 시장 2위인 생리대 시장에 2005년 말 ‘바디피트’를 내세워 시장을 나눠먹고 있고, 샴푸 시장에선 피앤지의 ‘팬틴’을 밀어내고 자사 브랜드인 ‘엘라스틴’을 1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순혈주의’ 전통이 강했던 롯데그룹에도 최근 외부 인사 기용이 늘고 있다. 유통 경쟁사인 신세계 출신인 장경작씨(64)를 롯데호텔 사장에 앉힌 게 대표적이다. 그는 1968년 삼성그룹 비서실에 입사, 신세계백화점 이사와 서울웨스틴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인물.

2005년 2월 “월드 베스트 호텔로 만들라”는 신격호 롯데 회장의 지시 하에 신세계에서 롯데로 옷을 갈아입은 케이스다. 그는 취임 후 대중호텔 롯데를 초특급 비즈니스호텔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는 웨스틴조선이 덩치는 작지만 해외 비즈니스맨들이 선호하는 호텔 1위였다는 점에서 친정집을 벤치마킹한 사례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 장 사장은 서울 신관에 초특급 비즈니스호텔 특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첨단 e-비즈니스 환경을 갖춘 객실과 연회장으로 외국 비즈니스맨을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이다. 전국 5개 호텔과 6개 면세점을 갖춘 국내 최대 호텔업체라는 기존 강점 외에 고급화라는 승부수로 신라호텔 등 경쟁사와 간격을 더 넓혀놓겠다는 포석을 깔고 있는 셈이다.

유통업계에선 최근 친인척간 대결 구도도 형성되고 있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계열사인 현대아이파크몰 사장에 현대백화점 출신 최동주(55) 사장을 영입, 5촌 조카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과 ‘5촌 대결’을 벌이고 있고, 할인점업계에선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이 신세계 사장 출신인 권국주(63) 사장을 일찌감치 메가마트 사장으로 영입, 친형인 신격호 롯데 회장과 ‘형제간 대결’을 진행 중이다.

‘용병 CEO’ 더 늘어날 듯

이밖에 회계법인 1세대로 삼일회계법인 공동창업자인 김일섭(61) 회장이 지난해 12월 경쟁사인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비롯, 삼성의 S급 인재 출신인 오영환 동부일렉트로닉스 사장, 대신증권 상무 출신인 김한(53) 메리츠증권 부회장, 현대건설 부사장을 지낸 김호영(60) 반도건설 사장 등이 있다.

국외에선 현대자동차 미국 법인(HMA)의 마크 반스 판매담당 부사장이 지난해 12월 경쟁사인 다임러크라이슬러로 건너가기도 했다.

지난해 초 두산인프라코어에서 전무였던 C씨가 경쟁업체로 가자 ‘괘씸죄’를 적용, 스톡옵션을 취소하기도 했지만 CEO의 경쟁사 이동은 이제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대부분 50~60대 고참급 사장으로 라이벌 회사서 ‘CEO 2막’을 열고 있는 이들 이적파 CEO들. 그들이 친정 저격수로 명성을 이끌어갈 지 재계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