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부자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성북동에서 시작한 부촌의 역사는 강남 8학군의 요지 대치동을 ‘교육 부촌’으로 바꿔 놓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관문 분당, 용인을 ‘명문 신도시’로 치켜세웠다. 변화를 거듭해온 ‘한국판 베벌리힐스’를 시리즈로 찾아간다.

 서울 363개 동(洞) 가운데 아파트가 없는 동네가 있을까. 정답은 ‘예스(Yes)’다. 한국의 대표 부촌으로 꼽히는 성북동이 주인공. 달랑 14평짜리 1개동만 있는 ‘성북아파트’가 전부다. 국내 대표적 아파트 시세판인 ‘KB(국민은행) 아파트 시세’에도 성북동엔 아파트가 검색되지 않는다.

대신 대지 200여 평에 건평 100평짜리 고급 단독주택이 성북동의 대명사다. 등 뒤에 북한산을 끼고 넓은 정원을 둔 대저택들은 강남 아파트 값 폭등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쪽을 내려다본다.

성북동 비둘기 떠나고 ‘총수들’ 집성촌

삼청공원에서 삼청터널을 빠져 삼선교까지 이어지는 성북동길 언덕배기가 하늘이 내린 부자들만 산다는 성북동이다. 정확히 말하면 행정구역상 성북2동이다. 1968년 11월 발표된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의 탄생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새들의 고향이었던 이곳에 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건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가까운 정관계 인사들이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게 부촌의 유래. 권력 주변에 ‘돈’이 몰리듯 70년대 개발독재 시절 대기업 총수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이 성북동에서 터를 닦았다.

성북동은 서울 사대문처럼 크게 네 개 동네로 이뤄져있다. 성락원 마을, 학의 바다 마을, 꿩의 바다 마을, 대교단지(삼청주택단지) 등이다. 꿩과 학이 동네 이름이 된 것처럼 예전엔 이곳이 새들의 천국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성락원은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으로 사적 378호로 지정된 곳. 성락원 서쪽에는 꿩의 바다 마을이 있고 그 위에 길상사가 9년 전 자리 잡았다. 꿩의 바다 마을 왼쪽에 대교단지로 불리는 성북동을 상징하는 고가 주택들이 몰려있다.

LG 창업고문인 구두회 예스코(옛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을 비롯,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김각중 경방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김영대 대성그룹 회장,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 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등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기업인들이 성북동에 산다.

특히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 71명이 지난 1996년 10월, 10억원을 출연해 성북문화원을 설립한 것을 볼 때 이곳에 사는 대기업 총수들이 줄잡아 100여 명이 넘을 것이라는 게 인근 주민들의 전언이다.

이들 재벌가와 함께 성북동은 세계 6대주를 망라한 각국 대사관저와 전통 한옥들이 어울려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최근인 2006년 12월초 중국 대사관저가 이사 온 것을 비롯,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캐나다. 호주, 알제리, 칠레 등 27개국의 대사관저가 몰려있다.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재준 가(제10호)와 상허 이태준 생가(제11호),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냈다는 심우장도 있다. 성북동을 설명하는 말 중에 ‘고풍스럽다’는 말이 나온 것도 부자들의 양옥과 전통 한옥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집값, IMF 때 안 떨어지고 최근엔 안 올라

이곳 성북동도 부자들 특유의 폐쇄성을 간직하고 있다. 집집마다 ‘세콤’ 등 무인 경비 표지판이 달려있는 게 상징적이다. 2000년 초엔 ‘벤처 갑부’가 이사 오려다 주민들이 반대해 포기했다는 루머가 들릴 정도다. 낮에도 유동인구가 드문 한적한 골목길엔 사설 경비원이 더 눈에 많이 띄었다.

이곳의 집값은 어떨까. 이곳에서 10년 넘게 성암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영렬 사장은 “성북2동은 10년째 집값이 제자리걸음”이라고 말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쇼크 때 전혀 떨어지지 않았던 집값은 최근 집값 폭등에도 전혀 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외풍에 의연한 집값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몰렸던 부녀회나 부동산의 호가 띄우기도 이곳에선 ‘딴 나라’ 얘기다. 그럼에도 건설교통부가 공시한 개별주택 가격 전국 10걸 안에 4곳이 올라있다. 이들 주택은 공시가격만 30억~40억원을 호가한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 성북동 주택은 10억~20억원 안팎이라는 게 부동산 관계자의 말이다. 세간 예상을 깨는 ‘저가’다. 아랫녘이 잘 보이는 위치 좋은 목의 평당가가 1000만~1100만원 수준이고 평균 900만원 대 가격이다.

이영렬 사장은 “이 때문에 강남 30~40평대 아파트값밖에 안한다는 자조 섞인 말도 들릴 법 하지만 이곳 부자들은 기본적으로 집값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고 들려준다. 투자나 투기 목적으로 성북동에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설사 집을 내놔도 본인 대신 회사 직원이 대신 챙겨 복비도 법정 중개료밖에 받지 못한다고 ‘푸념’한다.

실제 부동산의 손 바뀜은 매우 드물다. 얼마 전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 대치동 타워팰리스로 이사한 것을 빼면 재벌 총수의 이사는 아예 없다시피 한다. 보통 동네인 성북1동에 최근 재개발 붐이 일어 복덕방이 빼곡히 들어선 것에 비하면 이곳 성북2동엔 복덕방이 채 10곳도 눈에 띄지 않는다. 성암부동산이 2006년 한 해 동안 중개한 부동산 물건이 단 2건에 그친 것만 봐도 그렇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성북동 재벌 중엔 60~80대 고령이 많아 이사 수요가 거의 없어 조만간 강남 쪽에나 가볼까 생각 중”이라며 “성북동이야말로 서울 시내 부동산 투기의 유일한 무풍지대가 아닐까”라고 촌평했다.

성북동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다보면 숨이 찰 정도로 가팔라 성북동은 앞으로도 ‘무(無) 아파트 지대’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