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교를 내려서면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공단의 전경이 시야에 잡힐 것이란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짙게 깔린 안개 속으로 높게 솟은 어슴푸레한 굴뚝 형상만이 공단임을 알 수 있게 했다. 곧장 송산IC로 빠져나가 휴스틸과 동부제강을 지나치자 도로표지판이 우회전을 가리켰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 현장이다.

굴삭기가 고개를 처박은 허허벌판에 덤프트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야 할 현대제철 당진 공장에는 말끔하게 정리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거대한 두루마리 화장지 모양의 핫코일을 싣고 정문을 빠져나가는 트레일러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견학 온 학생들이 관광버스에서 내려 연구동으로 떼를 지어 몰려 들어가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일관제철소 기공식을 했다는 뉴스가 각종 매스컴에서 쏟아졌건만 벌써 공장이 완공됐을 리는 만무했다. 길을 잘못 찾은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정문이 A지구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당진공장은 두 개의 지구로 나뉘어 있다. 공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다를 기점으로 동쪽은 A지구, 서쪽은 B지구다. 과거 한보철강의 유물이다.

A지구에는 세계 최대 생산규모의 철근공장과 열연공장이 들어서 있다. 철근공장은 연 120만 톤을 생산함으로써 국내 생산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한보철강 부도 이후에도 유일하게 가동이 멈추지 않았던 공장이다. 연 180만 톤 규모의 열연공장은 현대제철이 정상화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B지구에는 한보철강 부도 시 70%의 공정으로 건설이 중단됐던 또 다른 열연공장이 들어서 있다. 7~8년 동안 건설이 중단된 채 방치돼 있던 이 공장은 한때 영화 <쉬리>의 전투 장면과 서태지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사용 요청을 받았을 만큼 폐허 상태였다. 당초 200만 톤 생산규모로 건설됐지만 지금은 3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됐다. 또 코렉스 설비는 철거돼 향후 일관제철소 부지로 편입된다. 현대하이스코가 정상화시켜 자동차 소재 등을 생산하는 냉연공장도 B지구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06년 10월27일 기공식을 가진 일관제철소는 이 A지구와 B지구를 지나 서쪽 냉연공장 옆으로 들어선다. 기존 부지에 바다를 메우고 사유지를 수용해 총 96만 평에 달한다.

세계 6위 철강업체 도약 비전

도로만 길게 뻗어 있는 황량한 건설 현장은 아직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됐다는 어떠한 분위기도 느낄 수 없었다. 몇 대의 덤프트럭들이 오가는 모습에서 지반 다지기와 바다 메우는 작업들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공장 부지로 수용될 민간인 소유 토지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우물에서 숭늉을 찾고 있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멋쩍은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곳에 들어설 일관제철소는 2011년에야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된다. 현대제철에 따르면 350만 톤 규모의 고로 2기가 건설됨으로써 연간 조강 생산 능력 700만 톤에 달하는 규모다. 열연강판 550만 톤과 후판 150만 톤도 생산하게 된다. 이때 현대제철은 현재 1050만 톤 규모의 조강 생산 능력이 1750만 톤 규모로 확대돼 2005년 세계 31위에서 10위권 철강업체로 급부상하게 된다.

또 조업이 안정화되고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이 정상궤도에 올라 안정적인 수익구조 기반이 마련되면 향후 연간 1200만 톤까지 설비 규모를 확장할 계획도 마련해 놓고 있다. 2015년 2250만 톤 규모의 세계 6위 철강업체로까지 도약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철강회사라는 비전을 갖기까지 현대제철은 3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했다. 당초 일관제철소 건설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숙원이었다. 1977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사업 진출을 추진했지만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에 밀려 무산됐다. 1996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정몽구 회장도 취임 일성으로 일관제철소 건설을 선언하고 이듬해 진출을 시도했지만 역시 좌절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연이은 사업 진출 실패로 현대제철은 직접 진출이 아닌 우회진출을 선택했다. 외환위기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1997년 초 한보철강의 부도를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현대제철은 지난 2004년, 부도 이후 7년여를 표류하고 있던 한보철강(현 현대제철 당진공장)의 국제입찰에 참여했다. 당시 미국, 영국, 일본 등 7개국 15개사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국제입찰과정에서 현대제철은 최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리고 2004년 10월 자산 인수 형태로 한보철강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7년 이상 방치돼 있던 공장 정상화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B지구의 열연공장은 공정 70%에서 건설이 중단돼 방치됨으로써 처음부터 다시 짓는 편이 오히려 시간과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었을 정도다.

현대제철이 A지구 열연공장을 정상화하는 데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7개월. 이어 2006년 10월 B지구 열연공장의 상업생산에도 성공했다. 투입된 비용만도 인수금액 8100억원을 포함해 약 2조원에 달했다.

한보철강 인수 직후 현대제철은 다시 일관제철소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2005년 5월 충청남도에 당진군 송산면 일대 96만 평 부지에 대한 지방산업단지 지정을 신청함으로써 사업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구체화한 추진 사업은 2006년 1월 이 지역이 송산일반지방산업단지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착수 작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

철강 산업의 새로운 메카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건설이 본격화 되면 당진지역은 새로운 철강 산업의 메카로 부상할 전망이다. 또 아산, 평택 등 주변 산업단지와의 연계를 통해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상생할 수 있는 기업도시로 도약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 1991년 졸업과 함께 입사해 한보철강의 부도와 포스코의 위탁관리, 현대제철 인수 등 당진에서 이 모든 역사를 지켜봤다는 신승주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홍보팀장은 “최근 들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변화하고 있는 지역일 것”이라고 당진과 인근 지역을 소개했다. 당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예산과 서산을 거쳐야만 올 수 있었던 서해안 오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그러나 삽교천 준공 이후 서울에서 2시간, 서해대교 준공 후 1시간으로 단축되면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특히 철강 및 자동차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과거 변방이 지금은 가장 각광받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신 팀장은 덧붙였다.

실제 당진 지역은 고대공단에 위치한 동부제강과 부곡공단의 휴스틸 등 이미 공장이 가동 중인 철강업체들과 함께 동국제강이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 아산국가산업단지, 석문국가산업단지 등 인근 국가산업단지에 철강 연관 기업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어 철강특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또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중심으로 서산지역의 위아, 로템, 다이모스, 현대파워텍, 동희오토 등 자동차부품 업체와 LG화학 대산공장, 롯데 대산유화 등 석유화학 업체들이 포진해 있어 중화학공업의 주요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주요 공장들이 이 지역으로 대거 몰리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접근성이다. 당진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80km. 또 건설 중인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가 완공될 경우 내륙으로의 접근도 1시간대에 들어온다. 특히 대형선박의 접안은 서해안에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천항의 경우 도크를 이용할 때 5만 톤급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지역 항만은 도크 없이도 20만 톤급의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원료 수급과 생산제품의 외부로의 수송을 용이하게 한다. 물류 면에서 서해안 최고의 입지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가 완공되면 철강 원재료를 필요로 하는 주변의 철강 및 자동차, 자동차부품 산업의 수급 불균형까지 해소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때 이 지역과 수도권 일대의 철강 수요업체에 대한 원활한 소재 공급이 이뤄져 국가 차원의 물류 부담을 완화시키는 등 국가경제 측면에서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동해(포항)와 남해(광양)로 한정돼 있던 한국 철강 산업의 메카가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 제조업인 일관제철 사업은 엄청난 설비투자를 요하는 장치산업인 동시에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건설 사업은 실업 문제 해소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일관제철소 완공에 따른 직접 고용효과는 4500명 수준. 건설에 따른 직간접 고용 창출 효과만도 9만30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제철소 운영에 따른 직간접 고용 창출 효과는 7만8000여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향후 1200만 톤으로 조강 생산 능력을 확장할 경우에는 15만여 명의 대규모 고용 창출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국내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투자규모도 파급효과가 기대되고 있다. 현대제철은 고로 1, 2기가 완공되는 2011년까지 총 5조24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할 예정이다. 연산 1200만 톤으로 확장할 경우에는 총 7조5000억원의 투자비가 소요된다. 이는 4조8000억원이 투입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사업과 7조4500억원이 투입된 인천국제공항 건설 사업 등 국책 사업 수준의 대규모 기반 사업 규모보다 크다.

15만여 명의 대규모의 고용창출 효과 기대

일관제철소 건설 현장 인근에는 거대한 두 개의 크레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양 옆엔 항만 조성공사가 또 한창이었고 배후지엔 20~30톤에 이르는 긴 직사각형의 철괴가 드러누워 있었다. 일관제철소 착공에 앞서 건설하고 있는 총 4선석 규모의 항만이었다. 여기에는 3만 톤급, 5만 톤급, 10만 톤급, 20만 톤급 각 1선석의 항만이 들어서게 된다.

이미 5만 톤급 1선석은 지난 2006년 9월8일 개항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가 당진공장에서 생산된 열연강판의 수출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 슬래브와 제품 하역에 사용될 3만 톤급 1선석은 2007년 3월 완공 예정으로 현재 8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고 회사 관계자는 설명했다.

나머지 철광석과 유연탄 등 제철 원료 하역에 사용될 10만 톤급과 20만 톤급 선석은 2008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각각 30%와 20%의 공정 진척을 보이고 있다. 이들 4선석이 모두 완공되면 연간 하역 능력은 2750만 톤에 이르게 된다.

한편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는 지금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환경 친화적인 제철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된 최적의 환경 기술을 적용해 원천적으로 오염물질 배출을 극소화하고 발생된 오염물질은 최적의 관리 시스템으로 제거한다는 계획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기공식장에서 최신 환경 기술과 설비를 도입해 건설함으로써 환경 친화적인 제철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제철이 계획하고 있는 친환경 제철소는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존 공장에 환경 설비를 설치해 대응하는 사후적 개념이 아니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최신의 친환경 설비와 환경오염방지 기기들을 도입, 설치하는 사전적 개념이다. 대표적인 환경 설비는 ‘밀폐형 제철 원료 처리 시설’. 철광석과 유연탄 등 제철 원료 야적장을 구조물로 밀폐시켜 원료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설비다. 이는 전 세계 철강업체 가운데 최초로 적용된다. 또 코크스공정의 코크스가스청정설비와 고로의 슬래그운연응축설비 등 이미 선진국에서 그 효율성을 인정받고 있는 설비 도입도 계획하고 있다. 이외에 전로와 연주공정에 가스청정설비와 전기집진기를 설치해 오염물질 배출을 최소화하고 수처리설비와 폐수종말처리설비, 폐기물처리설비 등을 마련해 자원순환형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라고 현대제철 관계자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