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차의 질주가 무섭다. 조만간 소형차를 제치고 중형차도 추월할 기세다.
경기 침체에 기름 값이 치솟아도 대형차를 선호한다고 하니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대형차의 돌풍에는 차를 자기 과시로 생각하는 사회 현상이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대기업 과장 2년차인 김모씨(36)는 지난 추석을 앞두고 큰 맘 먹고 신형 그랜저를 구입했다. 첫 번째로 구입했던 준중형차와 비슷한 차종을 구입하려 했지만 이왕 사는 거 ‘큰 차’를 사자는 마음에서였다.

김씨는 “출퇴근용으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연비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며 “대신 주말에 가족들과 서울 근교로 놀러 가는 시간이 많아 안전성을 고려해 넓고 큰 차를 골랐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그랜저 같은 대형차는 임원 이상이나 나이가 지긋한 돈 많은 자영업자나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신형 그랜저의 젊은 사람이 부담 없이 탈 수 있을 정도의 디자인과 각종 편의기능들이 맘에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대형차로 바꾼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작은 차를 몰고 다니면 괜히 주눅이 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호텔이라도 들어갈라치면 괜히 신경 쓰이기도 했다. 호텔이야 자주 가지 않아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보고 얕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차에서 출발해 소형차로 바꾸고 준중형, 중형차로 옮긴다?’ 나이가 들면서 소득이 높아지고 차종도 한 단계씩 올라간다는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젊은 세대와 중년 세대 구분 없이 소득과 취향에 따라 차를 구매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최근 경기 침체와 고유가 속에서도 대형차의 소비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2001년 20.3%에 불과하던 대형차의 판매 비중이 올해 10월까지 30%대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94년 이후 국내 자가용시장을 주무르던 ‘중형’ 쏘나타의 ‘11년 아성’도 도전을 받고 있다. 도전장을 던진 것은 다름 아닌 ‘대형’ 그랜저.

그랜저는 지난해 12월 대형차 최초로 ‘월 1만 대 판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올해만도 1월과 7월 쏘나타와의 치열한 각축전에서 승전보를 울리기도 했다. 한때 중산층을 대변하던 승용차가 쏘나타에서 그랜저로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섣부른 전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랜저의 추격이 만만치 않지만 아직까지는 쏘나타가 선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8만9563대로 ‘베스트셀링카’였던 쏘나타는 지난 10월까지 9만5230대가 팔렸으며, 그랜저는 지난해 전체 판매 실적과 맞먹는 7만703대가 팔렸다.

현대차 관계자는 “쏘나타는 그랜저의 네 차례 도전에 체면을 구겼지만 아직까지 베스트셀링카의 명성을 잇고 있다”며 “갈수록 높아지는 ‘큰 차 선호’ 경향과 경기 회복에 따른 부유층의 소득 증대가 그랜저 판매를 견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쏘나타는 1994년 판매 대수 18만3399대(택시 포함)로 ‘베스트셀링카’ 자리에 오른 뒤 지난해까지 11차례나 판매 1위를 기록한 국내 자동차시장의 간판모델이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신형 그랜저가 나오면서 이러한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48개월 동안 250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신형 그랜저는 뛰어난 디자인과 성능을 앞세워 출시 이후 월별 판매 대수에서 4차례나 쏘나타를 누르고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대형차가 많이 팔리면서 소형차와 경차는 갈수록 침체 국면을 걷고 있다. 현대차의 라비타는 올해 1~10월까지 329대가 팔렸다. 한 달 평균 33대 꼴. GM대우의 소형차인 칼로스와 젠트라의 판매 실적도 847대, 3151대에 불과한 실정이다.

경·소형차시장은 ‘침체’

경차는 더욱 참담한 수준이다. IMF 위기를 겪던 1998년 27.6%에 달했던 경차 시장점유율은 2000년 8.8% 떨어지더니 급기야 2005년에는 5.1%로 내려앉았다. 올 10월까지 판매량은 3만1462대로 전체 승용차 판매(54만3035대)의 5.7%에 불과했다. 전년 대비 19%나 감소한 수치다. 한때 국민차로 불렸던 경차는 이제 서민차로 전락했다는 것이 GM대우 측의 하소연이다.

고급차와 대형차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덩달아 준중형과 중형차의 가격대도 치솟고 있다. 여기에다 차급별 가격 차이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소형차의 가격이 준중형차에 육박하고, 준중형차는 중형차에 버금가고 있다. 또 중형차는 준대형차의 가격을 넘나들고, 준대형차는 대형차와 맞먹는 실정이다. 이는 조금 더 주더라도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하는 자동차업계의 판매 전략에 따른 것이다. 업계로서는 일단 가격 인상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데다, 상위 차종과 가격차가 줄어들수록 구매를 상위 차종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소·준중형차의 잠재 고객들은 여전히 경기 불황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중·대형차의 경우 신차 출시에 따른 가격 인하 경쟁과 함께 고급차를 선호하는 수요층들이 꾸준하다”며 당분간 대형·고급차에 대한 선호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업연구원(KIET)은 지난 10월 ‘국내 승용차 소비 구조와 개선 방안’ 보고서에서 1995년 2.7%에 그쳤던 국내 대형 승용차(2000CC 초과 세단형차)의 소비 비중이 올해(1~7월)는 24.3%까지 커졌다고 밝혔다. RV(레저용차)까지 포함하면 2000CC 초과 차량의 비중은 올해 30.5%까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60.6%)을 제외하면, 독일(21.1%), 일본(20.5%), 영국(12.8%), 프랑스(10.4%), 이탈리아(9.7%) 등 주요 자동차 생산국을 앞서는 수치다.

반면 국내의 소형(경차 포함) 승용차(1500CC 이하) 소비 비중은 11.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61.1%), 이탈리아(55.3%), 영국(52.1%), 프랑스(38.7%), 독일(23.3%) 등에 비해 상당히 낮은 것이다.

일본 베스트셀러 차종 1위부터 5위인 도요타 코롤라, 도요타 비츠, 혼다 피트, 닛산 티이다, 닛산 노트 등은 모두 소형차다.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에서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피아트 푼토, 포드 포커스, 폴크스바겐 골프 등도 대부분 소형차다.

이 보고서는 국내 소비자들이 대형차를 좋아하는 이유로 차량 크기를 신분과 동일시하는 사회 풍조와 소형차에 대한 세제 혜택 감소 등을 꼽았다. 또 이러한 대형차 돌풍에는 ‘소득 양극화’와 ‘명품 선호 현상’ 등 최근의 사회 현상이 한몫하고 있다.

‘차=자기 과시’가 대형화 부추겨

대형차 위주의 소비구조가 형성된 가장 큰 요인은 승용차를 사회적 지위와 연계시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자기 과시 수단으로 생각하여 가능하면 대형차를 구매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큰 차를 몰아야 체면이 선다는 것이다. 또 외환위기 이후 소득 구조가 양극화하면서 경·소형차의 구매층이 위축된 반면, 대형차 구매층이 확대된 것도 한 몫을 했다.

비싸야 잘 팔리는 한국인의 대형·고급차 중심의 왜곡된 소비 형태는 해외에서의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본 언론 매체인 <J-CAST>는 도요타의 ‘렉서스 LS’의 경우 한국의 가격이 미국 가격의 2배 이상이라며 이처럼 더 비싼 차가 잘 팔리는 것은 한국인의 자가용에 대한 특이한 소비성향에 기인한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 매체는 비싼 차가 팔리는 이유를 ‘허세’라고 설명했다.

소형차 보유에 대한 상대적인 이점이 줄어든 것도 소형차 판매 비중이 큰 폭으로 감소한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경차나 소형차의 판매 부진을 중·대형차 선호에서 찾고 있지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관심 부족이 더 큰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일본, 이탈리아, 영국 등의 높은 소형차 보급률은 그 나라 정부의 의지와 각종 혜택에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건 작은 차보다 넓고 큰 차를 선호하는 것은 상식인데, 우리나라만 유독 대형차 선호를 핑계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경차 이용자에 대한 각종 지원 제도를 더욱 확대해 ‘경차를 이용하는 게 경제적, 실용적’이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유가 시절마다 경차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돼 왔지만 그동안 정부의 지원 정책은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경차가 환경 문제 개선과 에너지 절약 등 사회적 이익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관공서나 공영주차장 내의 경차 전용 주차 구역 확보 등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경차 장려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처럼 소형차 판매 비중이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은 소형차에 대한 조세 측면에서의 혜택이 줄어든 데도 기인한다. 1가구 2차량 중과세에서 경차에 대한 예외 조항이 1999년 1월 폐지됐으며, 특소세도 2001년부터 대폭 낮아지고, 차종 간 격차도 줄어들었다. 3000CC 이상 대형승용차에 대한 자동차세가 크게 줄었으며, 지난해 7월부터는 소형자동차의 자동차세 부과 기준이 1500CC에서 1600CC로 전환되면서 1500CC 미만 차량의 판매가 크게 감소했다는 풀이다.

이에 따라 급격히 줄어드는 경차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더 과감한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경차 보급 활성화를 위해 관공서 업무용 차량의 경차로의 교체, 개구리식 주차(차도와 인도 사이에 걸쳐 주차하는 방식)의 허용, 고속도로 통행료 및 혼잡 통행료 완전 면제 등의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의 무관심은 정부 중앙부처의 승용차 보유 현황을 통해 관용차의 대형·고급화 추세가 뚜렷한 것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업계 자료에 따르면 2006년 57개 중앙부처의 업무용 승용차 9605대 중 경차는 겨우 67대에 불과했다. 57개 중앙부처 중 경차가 1대도 없는 곳이 무려 43곳. 2006년 신규 수요 승용차 1314대 중 경차 매입은 겨우 6대다.

조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소형차는 에너지 효율이 높아 에너지 절감과 환경문제 해소에 도움이 된다”면서 “소형차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경·소형차 소비 촉진을 위해 정부가 유인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차 경쟁력이 대형차로 이어져

더 뛰어나고, 안전한 신 모델 개발 노력이 대형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점도 경차의 판매 부진 요인으로 꼽힌다.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경차 보급 확대를 위해서는 다양한 모델 개발과 가격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차 동호인들은 소비자들이 큰 차를 선호하면서 업체들이 중·대형차 위주의 생산·판매에 주력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다 지난 1998년 티코, 2002년 아토즈, 2004년 비스토가 각각 단종된 이후 유일하게 GM대우의 마티즈만 생산되는 독점 구조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마티즈 단일 품종으로 경차시장을 버티는 상황에서는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 대형차 위주로 생산하는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20여 종의 경차 모델이 경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에쿠스, 그랜저, 오피러스, 렉스턴 등 국산 대형차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돼 왔다. 이는 고급화되는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갈수록 공세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수입차에 맞서기 위해 편의·안전사양을 대폭 보강하는 등 고급화 바람이 불었기 때문. 국내 완성차업체들의 잇단 대형 신차 출시에는 경기 침체와 상관없이 소비 여력이 있는 고소득층 소비자를 노린 업계 전략도 맞물려 있다.

자동차 산업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 대형차 위주의 왜곡된 국내 승용차 소비구조를 개선할 필요성도 제기하고 있다. 대형차 선호 현상이 자동차 산업구조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자동차시장이 급속히 대형차 위주로 흐르는 반면 수출 구조는 여전히 소형차 위주로 돼 있다. 경·소형차의 수출 비중이 57.1%에 달하는 반면, 대형차는 2.2%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완성차업체들이 중·대형차에 집중하다 보면 소형차시장을 외국 업체에 고스란히 넘길 위험마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형차의 수출 판로 개척과 함께 경·소형차에 대한 경쟁력 강화가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경·소형차 제조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면 다른 부문의 경쟁력 확보도 용이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 승용차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부품이 작은 엔진룸과 차체 내에서 조립되면서, 동시에 낮은 가격 수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 업체들은 탄탄한 경·소형차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고급 승용차까지 경쟁력을 확보했다. 따라서 자동차 산업의 품질 및 가격경쟁력의 원천인 경·소형차 부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은 강력한 내수기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철 연구위원은 “과거 국내 자동차 산업도 소형차의 내수기반을 바탕으로 수출 산업화했다”며 “경쟁력 있는 경·소형차의 개발이 품질 및 가격경쟁력이 격화되고 있는 자동차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요건이 됐다”고 강조했다.

장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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