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창 등 새시 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A사는 현재 CI 작업이 한창이다. 창사 30주년을 맞아 기업의 면모를 일신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 그러나 속사정은 그리 한가하지 못하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 왜 바꾸나

 “시장이 원하는 브랜드 없으면 순식간에 추락한다”

 

 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A사의 제품은 시장에서 3~4위권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중간 도매상이나 건설업체가 주요 고객이었던 제품 특성상 이들과의 거래선 만 잘 유지하면 별 문제가 없었다. 일부 선두업체들이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돌입했지만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보니 A사로선 ‘괜한 데 돈 쓴다’며 느긋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니 2~3년 전부터는 시장이 요동을 치지기 시작했다. 중간업자나 건설사에서 일괄 구매하는 상품이 아닌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시장으로 급격하게 변한 것이다.

 “제품 품질은 같거나 오히려 우리 제품이 우수한데도 시장에서 받는 대접은 정반대였어요. 오히려 우리보다 조금 품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쟁사 제품을 소비자들이 더 선호하는 거였어요. 차이점은 단 하나, 그쪽 제품은 별도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 ‘브랜드’가 없다는 점이죠.”(A사 관계자)

 A사와 경쟁하는 상위사들의 가격 차이는 무려 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A사 제품보다 경쟁사 제품이 더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벌어지는 판촉전에 나선 A사 직원들은 “왜 옆집은 B사 제품을 설치하고 우리 집엔 A사 제품을 설치했냐”고 항의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충격을 받은 A사는 그동안의 보수적 태도를 버리고 대대적인 CI 교체작업에 착수했다.

 브랜드와 이를 만드는 회사의 신뢰도가 제품 판매에 직결되면서 최근 중소형 건설업체들이 로고 및 브랜드 개발에 적극적이다. 유명 건설사에서 짓는 아파트와 설계부터 골조나 내외장재 측면에서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유명 브랜드 선호가 이어지자 뒤늦게 브랜드 및 심벌, 캐치프레이즈 개발에 나선 것이다. 부동산 전문 컨설턴트인 함영진 팀장(내집마련정보사)은 “소비자가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어느 건설사에 짓는 것이냐’일 정도로 이제 브랜드는 부동산 시장에서도 성패를 좌우할 만큼 위력적인 요소가 됐다”고 말한다. 시장이 ‘브랜드’가 없으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곳이 된 셈이다.



 둘, 교체 비용 & 효과

 대기업 비용 1000~3000억원선, 효과는  이보다 수십배 달해



 CI(Corporate Identity)는 통상 기업 이미지 통합 작업이라 부른다. 새로운 기업 로고를 선보인다거나 ‘또 하나의 가족, 삼성’과 같은 캐치프레이즈 등으로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소비자에게 선보이기 위한 일련의 작업을CIP(Corporate Identity Program)라 한다. 정신분석학자 에릭슨(E.H Erickson)은 “넓은 의미에서 기업의 미래 전략을 구축하고 수행해 가는 현대의 경영전략”이라고 정의했다. 기업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상표(브랜드)를 새로운 시대감각에 맞게 통일시키는 작업을 BI(Brand Identity)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CI 작업의 일환으로 BI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CI 교체작업은 기업의 규모 및 사업 특성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정도 소요된다.

 최근 새로운 CI 선포식을 가진 현대제철의 경우 “2004년 10월 당진공장(구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일관제철소 승인을 받은 후 재도약의 동기부여 차원에서 교체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현대제철의 경우, 회사의 인수합병으로 외형이 커지고 일관제철소 승인 후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운 CI 작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케이스. 현대제철은 심벌과 ‘현대제철’이라는 새로운 회사명을 최근 광고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다.

 INI스틸에서 현대제철로의 CI 작업을 진행한 장명석 현대제철 기획홍보팀 과장은 “현대자동차그룹의 일원임을 알리고 일관제철 사업소임을 알리는 의미에서 ‘현대제철’로 정했다”고 했다. ‘현대제철’이라는 사명은 일찍이 일관제철소 사업 진출을 천명했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사업계획소 설립 당시 채택했던 사명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상선도 지난 3월15일 새 CI 선포식을 가졌다.  회사 출범 30년을 맞아 진행된 CI 작업은 사업 내용의 변경이나 합병 등 대외 변수가 없는 상황에서 회사의 이미지를 일신하고 내부 조직을 추스르는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케이스.

 이외에도 최근 대기업 중 새로운 CI를 선보인 기업으로는 금호그룹이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한진그룹, 한화그룹이 CI 작업을 마치고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체작업을 통해 기업이 얻는 효과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CI 교체작업에 소요되는 비용과 효과에 대해 정확한 통계 자료는 지금까지 집계된 바 없다.

 LG그룹에서 분사해 나온 GS그룹이 지난해 CI 교체 및 홍보에 쓴 비용은 1000~2000억원 선으로만 대략 알려진다. 그 중에서 순수하게 CI에 들어간 비용은 30억원 선인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CI 전문회사로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CDR의 김성천 대표는 “인수합병이 있은 후 하나의 회사로 출범할 때는 CI 작업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설명한다. 초창기 금융권을 중심으로 시작된 CI 작업은 그 후 삼성, LG 등 대기업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에는 각 지자체들도 경쟁적으로 고유의 브랜드와 로고를 달기 시작했다.

 “지자체의 작업은 특정한 사업 목적이라기보다는 중앙의 트렌드를 지방이 답습하는 형태입니다. 서울시가 ‘Hi Seoul’을 내세우면 부산이 ‘Dynamic Pusan’을 표방하는 식이죠. 긍정적인 의미에서 지자체도 이제는 서비스·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셈입니다.”(김성천 대표)

김성천 CDR 대표는 “기업이나 단체가 국내 전문기업과 글로벌 전문기업을 대하는 온도에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국내 전문기업은 단순히 하청업체 개념으로 접근하는 반면, 외국계 전문기업의 경우 정식 컨설팅 업체로 ‘대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글로벌 마케팅의 경우엔 유효할 수 있지만 국내 시장의 경우,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낳는 경우도 있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국내 소비자의 성향이나 특성을 무시한 채 브랜드를 정하고 마케팅을 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CI 교체로 가장 큰 낭패를 볼 뻔 했던 경우로는 지난해 진행된 GS 사례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당시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 업체로 꼽히는 ‘란도’사가 고안한 GS그룹의 심벌이 표절논란에 휩싸였던 것. 심벌을 결정하고 일반을 대상으로 광고까지 한 마당에 가구, 건설, 자재 등을 수출입하는 삼이실업의 로고와 흡사한 점이 발견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양측이 원만한 협상을 통해 무마됐지만, GS 측으로서는 출발부터 삐걱거릴 수도 있었던 가슴 철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 누가 어떻게?

 아직도 오너의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 적지않아



 5년 전 대대적인 CI 교체작업을 했던 SK그룹이 최근 새로운 로고를 선보였다. 글자 우측 상단에 나비 한 마리가 나는 듯한 새로운 로고는 이전의 심벌을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다 친숙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김성천 대표는 “단순히 심벌이나 로고를 한번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따라 조금씩 변화시켜 활력을 주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코카콜라의 글자로고와 푸르덴셜의 지브롤터 바위 심벌을 그 예로 들었다. 상징이 되는 대상은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픽을 조금씩 바꾸는 것으로 소비자와의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끄는 게 중요하다는 것. SK의 심벌 변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글로벌 기업의 이 같은 심벌이나 캐치프레이즈의 변화는 외부 컨설팅업체는 물론 전문가들의 과학적 조언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러나 몇몇 글로벌화된 기업을 제외하고 한국 기업의 CI 작업은 순전히 기업 오너의 판단에 좌우되는 게 현실이다. 글로벌 전문업체의 한 관계자는 “실제로 작업을 진행하다가도 오너가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당황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 전했다. 한 예로, 국내 사업을 통해 상당한 자금을 축적 후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고 있는 모 교육기업은 5년 전 CI 교체작업을 위해 인력을 충원하고 전문 컨설팅을 받는 등 준비를 했지만 최종 결정자의 묵묵부답으로 인해 작업 결과물이 창고에서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다. 김성천 대표는 “오너의 판단이 여전히 막강한 점은 신속한 의사 결정이 필요할 때는 좋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접근을 막는다는 측면에서 분명 부정적”이라고 분석했다.



 넷, 중소기업들은?

 중기청에서 자금과 노하우 지원



 더 이상 제품의 품질로만 승부할 수 없는 시대라는 공감대는 이제 중소기업에도 널리 퍼져 있다. 문제는 브랜드를 계획을 수립하고 만들 수 있는 여력과 노하우가 없다는 점. 이에 정부는 예산의 일부를 보조해 수출에 나서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수출중소기업 글로벌 브랜드 육성사업’을 지난 2005년부터 본격 시행하고 있다.

 수출 실적 500만달러(벤처기업은 200만달러) 이상 또는 매출액 300억원 이상이면서 자기 브랜드가 없는 중소기업 30개 내외를 선정하여 브랜드 전략컨설팅, 브랜드 개발 및 브랜드 해외마케팅 지원에 나서고 있다.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사업을 위임받은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주관 업체로 일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브랜드 제작작업에 나서고 있다. 조남준 중소기업진흥공단 인터넷 사업팀 과장은 “2004년 시범 사업을 실시한 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행하여 현재 10여개 업체의 브랜드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브랜드 컨설팅 및 브랜드 개발은 연간 매출 10억원 이상의 국내 전문업체를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사업수행 전문업체로 선정돼 현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중소기업 브랜드 개발에 참가 중인 한 전문가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아직 브랜드의 필요성이나 효과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 개발 비용의 절반 이상을 보조해 주는데도 소극적인 기업들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브랜드의 필요성을 설득해 가며 한편으로 기업의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들이 개발한 중소기업 브랜드는 올 상반기면 일반에 선 보일 계획이다.  조남준 과장은 “중소기업의 글로벌 브랜드 지원이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방침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