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소 중 최초로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지난 2월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KIST는 우리나라 현대 과학의 역사이면서 산증인으로 불린다.
  88올림픽 때 ‘인간 탄환’으로 불린 달리기 선수 벤 존슨의 약물 복용을 밝혀내 금메달을 박탈하게 하는 등 한국의 도핑 테스트 실력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또 1970년대 일본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비디오테이프용 폴리에스테르 필름 시장의 40%를 윌나라가 차지하고 있다. 국산 공업용 인조 다이아몬드도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을 세계에 떨치게 한 이런 성과 뒤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자리 잡고 있다. 1973년 준공된 포항종합제철소의 건설계획 연구, 삼미특수강 공장건설계획 연구가 모두 KIST에서 이뤄졌다. 1980년 KBS에서 최초로 컬러TV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KIST의 컬러TV 국산화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66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홍릉 임업시험장 내 본관과 연구동을 준공, 50여명의 연구 인력으로 출발했던 KIST는 현재 박사급 연구원 400여명을 포함해 600여명이 연구에 임하고 있다. 연구비도 설립 초기 수천만 원에서 2005년에는 연 1400억원 규모로 늘었다.

 KIST는 설립 이래 약 9400개의 연구 과제를 수행, 408건의 연구 성과를 기업에 넘기는 기여를 했다. 그동안 3303건의 특허를 등록했고 국내외에 90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산업재산권 역시 2000년대 들어 연간 국내 250여건, 국외 150여건에 달한다.

 또 설립 초기부터 한국해양연구소, 한국통신기술연구소 등 전문분야 연구소 설립의 모체 역할도 담당했다. 배출한 과학자만 3600명에 이르면서 우리나라 과학의 산증인 역할을 했으며, 설립된 이후 2003년까지 약 55조원의 경제·사회적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지금까지 55조원의 부가가치 창출

 지난해 설성수 한남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KIST는 1966년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투입한 총연구비 1조6825억원의 33.1배인 55조7447억원의 가치를 창출했다.

 KIST의 대표적인 연구·개발 사례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의 경우 3억3000만원의 연구비가 투입돼 1982~1998년 16년간 824배인 2717억원에 달하는 가치를 창출했다. 또 CFC대체물질 연구에서는 243억원이 투입돼 오는 2060년까지 21조8000억원의 연구·개발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측했다.

 그만큼 KIST가 한국 과학계에 미친 영향은 컸다. KIST 설립 초창기 때 외국에서 유치한 과학자들의 연봉이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많았으며, 서울대 교수의 3배에 달했다는 것은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당시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KIST는 2000년대부터 미래지향적인 창의적 원천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KIST는 현재 나노재료소자기술, 마이크로시스템 등 5대 국가 대형 융합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뇌과학 연구센터를 제1호 탁월성 우수 연구센터(COE)로 지정하고 미래형 원천기술 개발의 장기적인 기틀을 조성하기도 했다.

 지난 3월9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KIST를 찾았다. 국방연구원과 임업연구원 샛길로 700m를 들어가면 회색의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건물 외관에서 40년의 시간이 읽혀진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연구원들도 보여 자유로운 대학캠퍼스가 연상된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지능형 마이크로시스템 개발사업단’. 초소형 회로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개념의 초정밀 부품을 개발하기 위한 곳이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캡슐형 내시경을 개발한 곳이다.  캡슐형 내시경은 입으로 삼킬 수 있는 초소형 캡슐에 카메라 등을 장착해 식도에서부터 대장에 이르기까지 몸속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제한된 면적에 회로를 많이 넣는 반도체 공정기술을 바이오 메디컬 분야에 활용한 것이다.

 김태송(48) 사업단장은 “이미 임상실험 전 단계까지 통과했으며, 오는 6월 식약청의 허가를 받으면 올해 안에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술은 이미 바이오 관련 벤처기업에 기술이 이전된 상태다.

 굉장히 비싼 값에 기술을 이전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 단장은 사실 기술 개발 당시에는 이것이 상용화가 될 수 있을지 100% 확신할 수 없어 약간 저렴하게 넘겼다고 말했다. 그는 우스개 소리로 기술 상용화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면 기술을 개발하다 나가서 따로 사업을 하는 연구원이 수두룩할 것이라며 기술 상용화에 대한 예상은 그만큼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상용화에는 10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 캡슐형 내시경도 연구·개발에만 4년이 걸렸으며, 상용화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정도는 빠른 편이라고 김 단장은 설명했다. 이 사업단에서는 지금까지 3개 기술을 기업에 이전했으며, 현재 2가지 기술이 기업 이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의료용 진단센서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의료용 진단센서는 혈액만으로 질병과 관련된 생체물질을 찾아낼 수 있는 신기술이다.

 다른 연구부서와 마찬가지로 김 단장은 출근시간은 9시지만 퇴근은 대중없다. 연구에 매달릴 때는 3~4일 밤새는 일도 다반사다. 이런 김 단장이 건강을 지키는 비법은 다름 아닌 ‘국선도’. 황우석 교수로부터 힌트를 얻어 하게 된 것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제 4년째지만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실 김 단장은 지난해 말까지 황우석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황 교수의 논문조작 파문이 일면서 결국 공동연구는 결렬됐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는 누군가가 해야 할 연구라며 현재 사업단에서는 이를 응용해 일반세포를 통한 신약 개발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캡슐형 내시경을 기업에 이전한 것처럼 KIST는 기술 이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왔다. ‘인쇄회로기판 제조기술’은 오늘날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활용되는 PCB의 기반기술을 이뤘다. 대우전자 VTR헤드드럼의 다이아몬드코팅 기술 개발, 울산화학의 CFC 대체물질 개발, 경보화학의 세파클러 항생제, LG 휘센에어컨에 적용된 플라즈마 표면 개질 기술 등도 KIST의 작품이다.

 KIST는 이밖에도 전자제품의 주요 부품과 소자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트랜지스터, 반도체웨이퍼, 광섬유, TV리모컨 등의 국산화를 통해 오늘날 전자공업 강국의 기초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지능로봇연구센터’. 이 연구센터는 지난해 신축된 국제협력센터 건물에 있었다. KIST에서 가장 현대적이며 깨끗해(?) 보이는 건물이다. 벌써 복도에 놓인 로봇들이 심상찮다.

 지능로봇연구센터가 개발 중인 ‘마루’, ‘아라’는 인간 감각 중 하나인 인식기능에 중점을 두고 제작하고 있다. 물체를 인식하고 조작할 수 있는 수준의 로봇까지 연구 중이다.

 키 150㎝에 몸무게 67㎏인 마루는 보통 사람보다는 작다. 마루의 두 눈은 스테레오 카메라로 제작돼 최대한 자유롭게 사물을 인식하도록 했다. 사람 귀를 대신하는 장치는 정밀 마이크가 사용됐다. 또 팔목과 발목에 가해지는 힘을 자동 측정할 수 있는 힘 센서가 부착돼 있으며 사람 몸의 평형을 유지해 주는 것과 같은 자세제어 센서도 내장하고 있다. 아라는 마루의 여자친구로 기본적인 형태나 기능은 마루와 거의 흡사하다. 기술적인 수준은 일본에 비해 5년 정도 뒤떨어진다.

 유범재(43) 지능로봇연구센터 센터장은 한국 로봇연구 역사가 10년을 조금 넘어섰으나,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40년 이상 로봇연구를 진행해 온 일본과의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 설명했다.

 유 센터장은 “로봇의 원천기술면에서는 뒤떨어진 게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아직 제품화된 로봇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격도 저렴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담고 있는 가정용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일본도 비슷한 콘셉트의 로봇 개발에 나서고 있어 제품화면에서는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지능형 로봇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일본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인공지능을 갖춘 ‘꿈의 로봇’ 시대는 언제쯤 열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 센터장은 당황한 표정부터 짓는다. 상상의 산물이지 아직 구체적인 실현을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2010년이면 가정에서 기본적인 일을 도와주는 로봇은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KIST는 5개 연구 부문에 20개의 센터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연구원이 센터장으로 있는 곳이 ‘생체대사연구센터’다. 88올림픽 때 육상선수인 벤 존슨의 약물 복용을 밝혀내 화제를 불러일으킨 도핑콘트롤센터가 그 전신이다. 국내 도핑 테스트 기술이 세계 수준임을 과시한 사례. 도핑 테스트 기술은 1000여종의 물질에 정밀도 1억분의 1을 요구하는 기술이다. IOC공인을 획득한 이 기술은 한·일 월드컵 등 각종 국제 대회의 성공적 개최의 밑거름이 됐다.

 생체대사연구센터는 오랫동안 축적된 생체에서의 미량물질 분석기술과 첨단 분석 장비를 이용해 신약 후보물질을 포함한 화학물질의 약리·대사 및 독성 연구, 인체 유해물질들을 연구한다. 최근에는 질환예방 또는 조기진단과 치료제 약물의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메타볼로믹스(metabolomics) 연구 등의 기반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탈모증환자를 정상인과 비교해 그 차이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청소년기 때 탈모를 예측하고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유영숙(51) 박사는 지난 2004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센터장이 됐다. 처음 센터장 제의를 받았을 때는 고사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할당제니 여성 우대니 하는 정책들이 많아 실력보다는 여자라서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센터장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요.”

 한편으론 남자동료도 많은데 그 자리를 내가 빼앗아도 되나 하는 역설적인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여성연구원들의 미래를 위해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요즘은 센터장으로서 책임도 무겁지만 다른 센터장보다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다고 귀띔했다. 다른 여성연구원들을 센터장으로 계속 이끄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됐다.

 유 센터장이 내민 명함의 다른 면에는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이란 직함이 찍혀 있다. 올해부터 맡은 직책. 그는 이공계 고학력 여성의 취업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 등을 펼칠 계획이다.



 세계 10대 연구 기관 성장 목표

 KIST는 2010년까지 세계 10대 연구 기관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나노재료소자기술, 인텔리전트 HCI, 마이크로시스템, 생리활성선도물질, 자원순환형 환경기술 등 5대 중점 영역을 설정, 연구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분야별로는 고효율의 무공해 수소연료전지 자동차를 개발, 선진국의 무공해 자동차 사용 의무화를 대비한 국산기술을 확보했다. 생체과학 분야의 약물흡수율을 향상시킨 ‘먹는 항암제’ 개발, KIST 리눅스 클러스터 슈퍼컴퓨터 개발 등도 최근 5년간 일궈낸 성과다.

 또 유망 연구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한 ‘전담연구원제’를 도입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전담연구원제란 특정 과제에 연구원과 전담 계약을 체결해 해당 과제 외에 다른 과제는 맡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전담연구원제도는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할 중점연구 분야에 실력 있는 연구원을 집중 투입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소속 연구원들은 예산이나 평가에 대한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KIST가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해 연구원들의 사기 높이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지난 2004년 도입한 우수 성과급제.

 지난해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연구자들에게 최고 4000만원이 넘는 연말 성과급을 지급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KIST는 지난 2005년 1년간 소속 연구원들이 수행한 과제를 대상으로 자체 성과 평가를 실시해 우수 연구원 10명에게 연봉 기본급의 5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이번에 우수 연구원으로 선정된 이들은 대부분 10∼15년차 경력의 책임연구원들로 2700만원∼4300만원의 성과급을 받았다. 이는 국내 30대 대기업 부장급이 받는 성과급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액수다.

 지난 2월27~28일에는 직원 자녀부터 과학과 친해져야 한다며 이틀간 자녀 초청 과학교실을 열었다. 연구원들이 가장 겁내는 말이 자녀가 ‘나 이공계 갈 거야’라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과학기술계의 초라한 현실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점심때가 되자 건물들마다 연구원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나다니던 사람 하나 없어 조용했던 연구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느낌이다. 외부와 좀 동떨어져 있어 연구원 대부분이 구내식당을 이용한다고 한다. 올해 17년째를 맞은 이동주 홍보팀장은 어쩌다 오는 외부인들은 구내식당이 맛있다고 하지만 자신은 지겨울 때가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벌써 따뜻해진 봄 햇살에 점심식사를 마친 연구원들이 잔디밭 군데군데 모여 있다. 한쪽에선 운동을 하는 연구원도 보인다. 숲길 사이 산책로에도 가벼운 옷차림의 연구원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장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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