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투자 대상은 부동산이다.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경험 속에서 가장 많이 봐 온 경우가 부동산 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동산 부자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이코노미플러스>는 전국의 부동산 부자들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진원(65)씨는 서울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을 파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그는 지금 연천과 문산에 수만평의 임야와 전답을 소유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야당리 부근에 음식점을 개업해 평생 처음 사장님이 됐다.

 1940년생인 김진원씨는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시립농대(현 서울산업대학) 2학년 중퇴의 학력을 가진, 당시 세대치고는 상당한 고학력의 소유자다. 대학교를 다니던 그가 식구들을 이끌고 파주로 옮겨간 것은 농촌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농민운동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침 생활이 어려워진 집안사정도 그를 파주로 이끌게 한 한 원인이기도 했다.

 1962년 3월경, 그는 서울 인근의 농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시작하려고 한 달여간 경기도 일대를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때 지금의 경기도 부평에서 평당 450원에, 관악구 상도동에서 평당 600원에, 잠실에서 평당 200원에 나온 땅이 있었는데, 당시에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아 파주시 야당리에 평당 114원을 주고 임야를 매입하고 이를 개간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1963년에 화폐개혁이 있었고, 화폐개혁 후의 돈 단위로 환산한 금액). 만약 당시 그가 조금만 돈이 더 있어서 강남의 땅을 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어디 땅을 사든 그 당시 땅을 사서 지금껏 보유한 사람치고 부자가 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처음 땅을 사서 농사를 시작했던 그는 농사일에 매달려 전력을 쏟아 부었다. 심지어 자신의 농지뿐 아니라 남의 땅도 임차해서 작물을 재배했다. 사실 파주는 토질이 진흙이고 산성땅이라 곡식이 자라기에 무척이나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장남이라는 책임감으로 농사는 물론이고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벽돌공장에 취직, 밤낮없이 일했다. 성실하게 일했으나, 때로는 메밀과 고구마, 감자,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인 비지로 끼니를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억척스럽게 일한 결과, 1970년도에는 논 1300평을 평당 320원에 매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뽕나무밭 6000평, 고구마 밭 3000평 등 차례차례로 농지를 매입하여 경작지를 확대해 갔다. 특히 1974년도에는 목장 3000평을 평당 3000원에 매입하여 젖소를 길렀고, 돼지사육에도 손을 댔다.

 이런 와중에 고등농민학원을 수료한 후 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조직화한 그는, 71년에 농촌지도자 연합회 파주시 초대회장을 지내게 되고, 이후 농지개량조합대의원, 파주교하농협 이사 및 감사, 야당 2리 이장 등을 맡아 했다.

 김진원씨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부동산투자 ‘고수’가 아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부동산 자산에 대한 소문만 들은 필자는, 그를 부동산에 대해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는 투자의 귀재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한평생 농촌에서 억척스럽게 농토를 일구며 농촌운동을 해온 전형적인 농민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부동산 부자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99년 현대산업개발에서 아파트를 짓겠다고 야당리 일대의 땅을 매입하면서부터다.



 일산 신도시 개발 후 땅값 뛰어

 파주시의 땅값이 지금처럼 높게 형성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80년대 후반 노태우정권이 제1기 신도시를 발표하면서 일산이 포함되었고, 인접했던 파주 야당리는 전답 시세가 평당 3000원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도시가 건설된다는 호재로 1년 사이 야당리 땅값은 평당 5만원으로 치솟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 1년마다 약 20% 이상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치솟던 땅값은 IMF가 난리를 치던 시절에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1998년에는 25만~30만원 정도로 시세가 형성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 현대산업개발은 야당리 근처의 토지 2만5000평을 평당 50~100만원 주고 매입하여 현대아이파크를 짓게 된다. 이때 김진원씨도 1500평을 현대산업개발에 팔게 된다. 그는 논을 판 돈으로 문산에 임야와 전답을 구입했다.

 “농사꾼에게 땅 욕심은 당연해요. 농사를 크게 짓고 싶다는 욕심은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갖는 거 아닙니까. 나는 농사밖에 모르니, 보상 받은 돈으로 임야와 전답을 샀지요.”

 김씨가 산 땅은 도로변에 위치한 잡종지 등 투자수익을 노린 땅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했고, 그나마도 주변에서 가장 싼 농지를 골라 산 것이 투자의 비결이라면 비결의 전부였다.

 5년 뒤 보다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파주·운정 제1차 택지개발지구 지정이다. 김씨가 보유한 전답과 목장용지 등이 전부 택지개발지구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평당 10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땅을 팔고, 10억원이 넘는 보상금을 받았다. 김씨는 이 돈으로 다시 연천에 있는 전답과 임야를 샀다. 농토를 팔았을 경우 대토를 위해서 부근의 농지를 매입하면 취득세, 등록세에 대한 감면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래 전부터 꿈이 하나 있다. 양로원을 지어서 가난하고 늙은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난 평생 땅만 파고 살아서 다른 일은 잘 몰라요. 다만, 늙은 노인네들, 왜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노인들 모아놓고, 먹이고, 입히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게 내 소원입니다. 죽으면 국가에 헌납하고.”

 5남매의 장남으로, 평생 농사를 지어서 동생들을 거둔 그는 마흔 줄에 뒤늦게 장가를 들어 슬하에 스물둘, 스물네 살인 딸 둘을 두고 있다. 평생 농사를 지어 온 그는 이젠 농사일이 힘에 부쳐 살던 동네에 식당을 내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뿐이다. 수십억원대의 자산가가 되었지만, 그의 자동차는 여전히 트럭이고, 옷차림 또한 수수한 시골 노인네다. 평생 근면과 성실로 살아온 그가 뒤늦게 얻은 부는 정직하게 땅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온 데 대한 하늘의 선물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