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라 튀어라 밀어붙여라”



‘성공자를 따라 배워라.’ 백이면 백 성공학 서적이 공통적으로 조언하는 명제다. 프랜차이즈 사업에선 더욱 그렇다. 시스템 사업이기 때문이다. 성공의 가장 쉽고 확실한 원리가 바로 ‘복제’다. 겉모습 카피가 아닌 성공자 마인드를 배우란 얘기다. 특히 내 사업을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프랜차이즈는 꿈의 사업이다. 비교적 소자본으로 기하급수적 성장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플러스>는 한국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사업가를 선정, 프랜차이저 성공학 개론을 연재한다.





 “쪼끼쪼끼요? 5년 전엔 다 비웃었습니다. 뭐 그리 촌스런 이름이 다 있느냐고요.”

 생맥주 전문점 ‘쪼끼쪼끼’로 잘 알려진 김서기(47) 태창가족 사장. 그는 자칭 ‘부산 촌놈’이다. 59년생인 그는 41년을 부산에서 살다가 맨주먹으로 상경, 5년만에 서울에서 빛을 봤다.

지난해 3월 서울 성내동 400평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9층으로 올린 태창타워는 그가 터뜨린 대박의 상징물. 사업 5년여만에 그가 내준 가맹점만 600여개에 달한다.

 사장 ‘김서기’는 몰라도 쪼끼쪼끼는 다 알 정도다. 성공하면 ‘미투 브랜드’가 난립한다고 했던가. 현재 생맥주시장엔 쭈끼쭈끼, 쪼끼타임, 조끼쪼끼, 블랙쪼끼 등 아류만 수십개에 달한다. 이에 대해 김사장은 “신경쓰지 않는다”며 웃는다. 이름은 베껴도 ‘철학’은 카피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다.

 경상도 사투리가 밴 그의 말투는 어눌했다. 웬만해선 단답형이다. 그러나 옛날 얘기를 꺼내자 호흡이 길어졌다. 



 스무살 버스 행상 때 장사 눈 떠

 “장사 많이 해봤죠. 여섯살 때인가 폐품을 고물상에 팔기도 했고요. 가장 기억나는 건 스무살 때 버스 행상이었죠. 이태리타올이 주력품이었습니다. 칫솔도 취급했고, 귀후비개도 팔았어요. 그때 재미 좋았습니다. 한 달에 20만~30만원씩 벌었어요. 1년 했더니 200만원이 손에 남더군요. 당시 부산 집 한 채 값을 번 셈이죠.”

 김서기 사장은 “버스 행상을 하면서 장사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묻는다. 성공하려면 뭐가 있어야 하느냐고. 대답이 없자 그가 답을 내린다.

 “돈 있다고 어디 성공합디까. 소위 ‘빽’이요, 학벌요, 건강요, 그거 다요? 아닙니다. 장사는  ‘상술’이 있어야 살아남는 겁니다.”

 그가 말한 상술 중 첫째 항목이 ‘고정 관념을 깨라’다. 남들과 똑같이 하면서 결과만 다르기를 바란다면 ‘도둑 심보’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가 맥주집에 처음 손댄 건 지난 90년. 그의 나이 31세 때다. 그가 점포를 얻은 곳은 상가 입지로선 ‘빵점짜리’ 점포. 서면 1번가 후미진 뒷골목 지하 커피숍 자리였다. 사람 한두명이 지나치면 옷깃이 닿을 만큼 좁다란 길이었다. 워낙 입지가 나빠 1년간 빈 점포로 놀리고 있던 그곳에 그는 ‘영타운’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같은 ‘황무지’를 ‘황금 영토’로 바꾸면 어디서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90년 부산에서 생맥주점과 첫 인연

 남들이 마다 하던 그곳에서 김사장은 대히트를 쳤다. 그가 꺼낸 카드가 바로 ‘역발상 전략’이다. 그는 고정 관념을 깨고 300원짜리 안주를 등장시켰다. 땅콩과 멸치 한줌을 300원에 판 것. 입소문이 퍼지자 젊은 층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500cc, 1000cc만 있었던 맥주 용기에 5000cc, 8000cc, 2만cc 용기를 도입했다. 그의 표현을 고스란히 옮겨 놓자면 5000cc는 세숫대야로, 8000cc짜리는 ‘바께스’ 모양으로 담았다. 자연스레 젊은 술꾼들이 몰려 ‘주당 콘테스트’도 열렸다.

 용기는 투박해도 맥주잔만큼은 예쁘게 포장했다. 당시 화제였다는 이른바 ‘비너스잔’이다. 코카콜라 병처럼 여성의 신체 굴곡을 살린 잔이다. 한마디로 남들과 다른 ‘튀는 메뉴’‘튀는 점포’로 승부한 셈이다. 워낙 장사가 잘돼 그는 이듬해인 91년 신발 제조업체인 태창실업도 인수,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장사가 잘돼 건물값이 뛰자 주인이 건물을 팔더군요. 두번째 건물주가 들어서더니 배가 아팠는지 온갖 횡포를 다 부렸어요. 나가라고 협박도 했고 월세도 엄청 올렸죠. 그러더니 옷창고였던 1~4층 전부를 맥주집으로 바꾸더군요. 우리집 외관이 ‘창고’였다면 주인집은 ‘호텔’이었어요. 그런데도 손님은 지하로만 몰렸죠. 결국 6개월만에 주인이 손을 들더군요. 제가 아예 인수했습니다. 그때가 93년쯤 됐을 겁니다.”

 그는 “장사라는 게 돈깨나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말한다. 김사장이 1~4층 맥주집을 인수하면서 영타운은 부산의 명물로 바뀌었다. 생맥주 하루 판매량만 2만cc 50통이 나갔다. 당시 부산에선 단일 업소 최대 판매량을 기록한 셈이다.

 명물 점포가 자리잡으면서 건물 프리미엄이 껑충 뛰자 세번째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99년초 영타운에서 쫓겨났다”고 말했다. 월세를 아무리 높여준대도 막무가내로 ‘나가라’는 통보만 받았다는 것. 30대 청춘을 다 바친 곳을 비워야 했던 그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힘들 때마다 바닷가를 찾는 습관이 있다. 남들 같으면 술깨나 펐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주량이 맥주 500cc가 전부다.

 “광안리 앞바다 백사장을 걸으며 곰곰이 앞날을 생각해 봤습니다. 맥주집 운영밖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군요. 그러다 광안리 뒷길을 걷는데 평소 불야성을 이루던 옷가게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걸 봤죠. 전 그때 무릎을 탁 쳤습니다. IMF  위기 때라 빈 점포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는 “이때 프랜차이즈 사업 개념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의 아이디어는 ‘쓸만한 점포를 모은 뒤 자신의 장사 노하우를 접목, 맥주집 성공 비결을 전수하겠다’는 것.

 결론이 서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점포를 알아보니 “5~6개월 월세도 안받을 테니 무조건 들어와 달라”는 건물주들이 줄을 섰다. 특히 ‘영타운’ 명성은 익히 알려진 터라 대번에 7~8군데 예비 점주들이 몰려들었다.

 문제는 또 터졌다. 동업을 하던 선배 A씨가 갑작스레 사업 철수를 선언한 것. 프랜차이즈 로 사업을 키워 보겠다는 부푼 기대는 일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A씨 부인이 하루는 점을 보더니 동업을 하지 말라는 점괘가 나왔더군요. 정말 기가 막혔어요. 갑자기 부산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몇날을 뜬눈으로 밤을 지샌 결론은 ‘서울로 가자’였다. 그러자 가족, 친척, 친구 할 것 없이 죄다 뜯어 말렸다고 한다. 오직 한 사람만 그의 편이었다. 부산 주류 도매업체인 창성주류 김주태 사장만 예외였다.

 “서기야. 너 서울 가거래이. 분명 성공할 끼다. 부산서 1등한 서기 아이가. 서울서 1등 하면 전국에서 1등 하는 거지.”

그가 손가방 하나 들고 상경한 때가 99년말께다. 점포 전문가답게 서울 구석 구석을 샅샅이 누빈 후 낙점한 곳이 서울 성내동 강동구청 인근 주택가였다.

 99년 12월23일 ‘쪼끼쪼끼 1호점’이 등장한다. 김사장은 서울에 와서도 ‘역발상 전략’으로 사업을 펼쳤다. 주택가는 맥주점 입지로 낙제점이란 건 세상이 다 아는 불문율. 그러나 그는 밀어붙였다. 맥주란 사업 아이템만 빼고 맥주집 개념을 180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첫째가 입지 차별화다. 남들이 대학가나 오피스타운에 들어갈 때 아파트단지를 공략했다. 가족이 즐기는 맥주점 개념을 도입한 셈이다. 최근엔 주5일 근무제로 주택가 상권이 뜨고 있는 추세다.

 둘째, 중소형화 전략을 구사했다. 당시만 해도 맥주점은 대형점이 통했던 시장이다. 그는 25평 내외 매장만 공략, 소자본 맥주 전문점 시대를 개막한 주인공이다.



 5년만에 600여 점포 운영중

 셋째, 맥주맛을 바꿔놓았다. ‘그린 생맥주’ ‘흑한방 생맥주’‘오미 생맥주’‘복분자 생맥주’ 등으로 젊은 층을 흡수한 전략이다. 특히 여성층에 톡톡히 먹혔다. 여기에 섭씨 영하 20도에서 얼린 맥주잔, 비어 클리너로 하루 두 번 세척한 맥주관을 통해 받은 생맥주는 다른 점포보다 훨씬 신선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넷째, 1층 매장만 고집하는 것도 특징이다. 지하나 2층 매장은 철저히 배격한다. 다섯째, 인테리어도 바꿔버렸다. 맥주집 인테리어의 대명사였던 칸막이 테이블도 죄다 걷었다.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화이트 톤으로 산뜻하게 바꿔놓은 것도 남들과 다른 점이다.

 김사장은 “다섯 가지 사업 원칙을 쥐고 6개월간 유일한 직영점이던 성내 1호점(현재 체인점 전환)에 매달렸다”고 말한다. 직영점이 잘돼야 체인점도 내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참신한 맛과 분위기로 1호점은 개점 초부터 하루 15만cc를 팔며 동네 상권을 석권, 입소문이 번져 나갔다. 맥주를 대던 주류 도매상들이 ‘구전 광고’의 첨병이었다.

 가맹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2000년 6월께였다. 그해에만 60여개 점포가 문을 열었다. 2001년엔 탄력을 받자 1년 사이에 230개나 들어섰다. 세상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제 자신도 프랜차이즈 사업이란 게 이렇게 폭발력이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가맹 대기자만 15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때에서야 가족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현재 그는 사업다각화에 한창이다. 2003년 7월 제2 브랜드인 세계꼬치요리전문점 ‘화투’, 지난해 3월엔 바비큐전문점 ‘군다리치킨’을 개설해 3개 아이템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짰다.

가맹점 숫자는 모두 합쳐 600여곳. 정확한 숫자를 묻자 그는 “체인점 수는 1년에 한 차례만 집계한다”며 “현재 600개가 넘지만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맹점 숫자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가맹점주에게 끌려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다. 아닌 건 ‘노’(No)라고 말하는 사업가다.

 프랜차이즈가 성공하려면 가맹점주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가맹점주들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본사 지도를 거부하거나 시스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거침없이 지적하고 말로 안되면 ‘폐쇄’까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프랜차이즈는 시스템 사업입니다. 본사와 가맹점간 신뢰가 기본이지요. 회사 이름을 태창가족으로 쓴 것도 이 때문입니다.”

 태창가족은 자영업계에서 IMF 위기 때보다 힘들었다는 지난해에도 전년 대비 20% 성장을 일궈냈다. 창업컨설팅업체인 FC코리아의 강병오 대표는 “태창가족은 지난해에도 매월 10~20개 점포씩 신규 출점해 왔다”며 “가장 탄탄한 프랜차이즈업체 중 한 곳”이라고 귀띔한다.

 김서기 사장이 밝힌 2004년 600여 가맹점의 매출액은 약 2000억원. 웬만한 중견기업 덩치다. 그는 올해를 ‘가맹점 매출 증대의 해’로 잡고 있다. 이를 위해 연 300개 점포에 식자재 30% 할인 행사와 TV 광고 등 공격 고삐를 바짝 죌 생각이다.

 지난해 3월 사옥 건립 후에도 김사장은 새벽에 퇴근할 때가 많다. 주말엔 확실히 쉰다. 부인과 집 근처 남한산성에 올라 막걸리 한 잔 먹고 올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그러면서 갑자기 “사업은 선택과 집중의 절묘한 배합이 중요하다”며 묻지 않은 골프 얘기를 꺼냈다.



 “상술 있어야 성공하지요”

 “지난해 봄 누가 골프채를 주더군요. 연습 좀 하고 필드에 같이 나가자고요. 몇달 뒤 같이 나갔죠. 솔직히 필드에 나가서 골프채 처음 잡아 봤습니다. 105타가 나오더군요. 끝나고 처음 잡아 봤다고 말했더니 믿지 않는 겁니다.”

 그는 “사업은 리허설이 없는 생방송 게임”이라고 강조한다. 한 번 할 때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도전 정신은 필수 덕목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에 맨주먹으로 와서 일궈냈듯이 사업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시련이 왔을 때 더 힘을 내는 ‘악발이 근성’이 그를 성공자로 만든 셈이다. 그가 말하는 성공학은 독특하다. 

 “(머리를 숙이며) 제가 머리숱이 좀 없지 않습니까. 샴푸나 비누 없이 20년째 맹물로 머리를 감거든요. 처음엔 남들이 미친 사람 쳐다보듯 하죠. 그러다 1~2년이 지나면 ‘별 희한한 사람 다 있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한 20년쯤 하다 보니까 ‘아, 저게 도움이 되나 보다’ 하고 평가가 달라집디다. 성공이란 게 그런 겁니다. 사업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죠. 그러려면 ‘과정’이 좀 길더라도 꾹 참아내야 합니다.”

 그에게 꿈을 물어봤다. 대답이 역시 의외다.

 “최단 시일내 은퇴하는 겁니다.”

 사업 목표는 분명하다. ‘TCF(태창가족) 1004 프로젝트’에 따라 2006년까지 1004개 가맹점을 만들 계획이다. 올해엔 중국에 진출,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도 짜놓은 상태다.

 김서기 태창가족 사장은 요즘 가슴에 그의 좌우명인 ‘가장 평범한 게 가장 특별하다’는 뱃지를 달고 산다. 그에게 느껴진 특별함은 고정 관념을 깨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도전 정신으로 다가왔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5년 전 쪼끼쪼끼로 이름을 정했을 때 남들이 뭐라 했는 줄 아십니까. 맥주집을 하려면 ‘비어뱅크’나 ‘비어호프’ 식으로 좀 세련돼야 히트친다고 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저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Plus CASE



성남 신흥2호점 황선준씨

개업 전 70여개 점포 돌며 입지 선택 

월 1000만원 수익 올려



 
“몸은 직장 때보다 고단하지만 수입은 낫습니다.”

 20년 넘게 하얏트·로얄·리베라 호텔에서 조리 책임자로 일해 온 황선준씨(50). 그는 지난  2001년초 ‘사오정’ 나이 때 회사를 사직, 내 사업에 도전했다.

 그해 3월 쪼끼쪼끼와 가맹 계약을 맺은 그가 실제 개업에 나선 건 11월초. 점포 물색에 장고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8개월간 찾아다닌 점포만 70여곳에 달한다.

 최종 낙점한 곳이 서울 종암동 집에서 훨씬 떨어진 성남시 신흥2동 주택가 대로변 1층. 배후에 아파트 주택가를 낀 데다 맞은편에 수정구청이 있어 사무실 손님층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주중엔 관청 등 인근 직장인 손님이 몰렸고, 주말엔 가족 단위 고객이 끊이지 않았다. 호텔 조리사답게 깔끔한 매장 관리는 특히 여성 손님을 끄는 데 힘을 발휘했다. 황선준씨는 “첫 사업이라 안정적 운영을 위해 프랜차이즈를 택했다”며 “개업 이전부터 김서기 본사 사장과 메뉴에 대한 대화가 많이 오갔다”고 신뢰를 표한다.

 그의 사업 대차대조표를 분석해 보자. 매장 면적만 31평인 점포 개설에 들어간 총 투자 비용은 약 2억5000만원. 점포 보증금 1억원에 권리금 2000만원, 인테리어와 초도물품비, 가맹비, 주방기기를 합쳐 1억3000만원이 소요됐다. 본사가 정해 놓은 20평 기준 7900만원 투자비(점포 제외)보다 점포가 대형 평수라 추가 투자가 많아진 때문이다.

 반면에 황씨가 밝힌 매출액은 하루 평균 100만~120만원선. 지난 2004년 1년을 기준으로 하면 월평균 3300만원 꼴이다. 여기서 월세 280만원과 재료비, 인건비 등 제반 경비를 뺀 순익은 월 1000만원 안팎.

 유재수 한국창업개발연구원장은 “자영업에서 따지는 성공 점포의 투자수익률은 월 3.5%를 기준으로 친다”고 말한다. 1억원을 투자했을 때 월평균 350만원 정도면 성공했다고 보는 셈이다. 이 기준에 비춰 봤을 때 황씨의 투자비 대비 수익률은 4%대로 안정된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사업 3년6개월을 넘고 있어 사업 안정성도 확보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