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투자 전문 기업’인 벤처캐피탈들 중 일부가 ‘대출기관’으로 변질되면서 벤처기업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벤처기업이 망해도 일부 벤처캐피탈은 투자한 돈 회수하는 데만 급급하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에다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한 정부지원 때문에 벤처기업들의 시름은 갈수록 깊어만 간다. 벤처기업 성장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도록 벤처캐피탈의 변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펀딩이 아니라 완전히 대출이었습니다. 한때 천사였지만 투자 회수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이자 악마로 변했습니다.” S/W 개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김 사장은 벤처캐피탈의 벤처투자에 대해 드러낸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김 사장은 지난해 월급을 절반밖에 챙기지 못했다. 벤처캐피탈에서 투자한 원금을 갚으라며 월급을 가압류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의 집도 가압류당했다. 이 벤처캐피탈은 투자계약시 1년 내 목표 매출액과 경상이익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원금을 보장해야 한다는 바이백(Buy-Back) 조건을 달아 김 사장은 꼼짝없이 이를 갚아야 했다. 벤처캐피탈의 투자회수 성공률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횡포를 당하고 있는 벤처기업 사장은 부지기수일 것으로 파악된다.

 벤처캐피탈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사업자금을 공급받기 어려운 초기 단계의 벤처기업에 창업자와 함께 위험을 부담하면서 자본 참여를 통해 기업이 성장한 후 기업공개(IPO) 등을 통해 높은 수익을 실현하는 금융활동이다. 따라서 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금 보장이나 담보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런데 일부 벤처캐피탈이 자금력을 이용해 시장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다. 일부 벤처캐피탈의 경우 대규모 투자과정에서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투자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이면계약을 요구당하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 준다. 한 벤처캐피탈의 경우 벤처기업과 투자계약서를 작성할 때, 원금 보장을 요구하거나 담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벤처캐피탈이 투자계약시 원금보장을 요구하는 등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관계자도 “일부 벤처캐피탈 회사들이 투자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이면계약을 요구하며 시장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시인했다.



 제도적 허점 이용 시장질서 어지럽혀

 자금력을 앞세운 이런 벤처캐피탈의 횡포는 제도적 허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탈은 창업투자회사, 신기술금융회사, 기업구조조정회사, 한국벤처투자조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벤처캐피탈의 근거법률이 각각 다르고, 이들의 벤처투자를 관리·감독하는 정부부처도 제각각이다. 창업기업 위주로 투자하는 벤처캐피탈인 창업투자회사는 소관 부서가 중소기업청이다. 하지만 신기술사업자에 대한 투자를 담당하고 있는 신기술금융회사는 재정경제부가 관리·감독하고 있으며, 기업구조조정 대상기업에 투자하는 기업구조조정회사는 산업자원부의 감독을 받는다.

 이렇게 따로따로 관리·감독을 받다 보니, 각 벤처캐피탈마다 관리방법과 감독수준이 다르다. 중소기업청이 관리·감독하는 창투사는 그나마 감독체계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금감원이 관리·감독하는 신기술금융사는 제대로 감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신기술금융회사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좀더 자유로우며, 기업 규모도 큰 편이다. 또 창투사의 경우 한국벤처캐피탈협회를 통해 투자현황 등을 수시·정기적으로 공시하지만, 신기술금융사의 경우 벤처투자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창투사 관계자는 “창투사는 시장 교란행위에 대해서는 몇 번의 경고조치와 함께 퇴출이라는 극약처방이 내려지기 때문에 이면계약 등을 요구하는 사례는 드문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신기술금융사의 경우 이렇다 할 감독을 받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투자 위축과 수익성 악화도 벤처캐피탈이 무리하게 이면계약을 요구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2000년을 정점으로 벤처캐피탈의 투자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IT 경기침체에 따른 IT 기술주에 대한 우려감과 코스닥시장의 위축으로 벤처캐피탈의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적자경영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2년부터 계속된 벤처산업의 침체로 등록이 취소된 벤처캐피탈은 44개사에 이른다. 한때 147개에 이르던 벤처캐피탈 수는 102개로 줄었다. 따라서 벤처에 투자한 벤처캐피탈들은 이익을 내지 못한다면, 투자원금이라도 회수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일부 벤처캐피탈의 경우 원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투자’라는 개념보다는 금융기관에서 쓰는 ‘대출’이라는 방식을 원용해 벤처기업으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규모가 작은 벤처캐피탈일수록 심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의 전언이다.

 투자재원의 확보도 어렵다. 정부의 벤처활성화대책으로 정부기금이나 연금의 출자는 증가하고 있으나, 벤처캐피탈의 자체 출자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각종 벤처비리로 벤처업계의 투명성이 낮아지면서 벤처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아직도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은 과거 벤처붐과 같은 벤처비리 사건의 재발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낸다.

 전문적인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없는 것도 문제다. 일부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벤처심사역들의 의사결정 한계와 잦은 이직, 교체로 인해 적절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벤처업체 사장은 자금투자를 미끼로 과다한 수수료를 요구하는 브로커에 가까운 벤처캐피탈리스트도 있다고 밝혔다.

 투자회수의 거의 유일한 방법인 벤처기업의 기업공개(IPO)도 벤처캐피탈로서는 부담이다. 벤처경기 침체로 그동안 코스닥시장도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 투자회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가 투자 벤처기업의 IPO를 통해 대박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뜨고 있는 바이오벤처에 대한 투자는 더욱 어렵다. 초기 단계의 바이오벤처에 투자해 기술개발과 기업공개를 통한 투자회수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년 정도. 투자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할 뿐 아니라 1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벤처캐피탈은 드물다. 따라서 벤처캐피탈이 투자를 회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기업들이 코스닥에 등록되는 평균업력이 10년임을 감안하면, 성장단계상 초기 기업들에게 투자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 무엇보다 절실

 정부는 1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 벤처캐피탈로 하여금 탄력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경기와 산업적인 특수성을 고려해 경기가 좋으면 적게, 경기가 나쁘면 많이 운용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더불어, 단기간의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산업에 대해서는 투자기한을 여유롭게 운영 해 투자의 본질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벤처캐피탈을 감안할 때, 정부가 매년 하는 1000억원 규모의 투자로는 단기간에 효과를 거두기 힘든 산업에 대해서 투자의 손조길차 미치지 못하는 규모라는 평가다.

 벤처업계의 경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탈이 주 투자대상으로 삼고 있는 IT 산업도 사정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가 벤처캐피탈을 통한 겉치레식 지원보다는 실질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벤처업계와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 것도 무엇보다 허울뿐인 정부지원이다. 그동안 정부의 벤처에 대한 자금지원이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면서 벤처기업들이 벤처캐피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벤처활성화대책과 함께 정부가 내놓은 벤처부활제·창업자금지원제도 등이 거의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벤처업계에서는 벤처캐피탈이 초기단계 기업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며, 정책적 지원인 만큼 수익성을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또 자금 지원을 위해 벤처의 옥석을 가리기를 위한 다른 방안들이 구체적으로 수립돼야 한다는 점도 내비쳤다.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벤처캐피탈 업계도 이른바 ‘선순환’구조에 대한 해답을 코스닥에서 찾고 있다. 벤처캐피탈과 벤처기업이 활성하려면 코스닥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스닥의 경우 해마다 30% 정도의 기업이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이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코스닥시장은 정체돼 있다는 것. 성공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이 코스닥시장에 등장, 투자활성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코스닥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투자처로서도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투자회수를 위한 다양한 방안으로는 M&A와 우회등록(Back-door listing)이 꼽히고 있다. 해마다 논의되는 M&A시장의 경우도 절차의 간소화는 많이 이뤄진 반면, 실질적인 시너지 효과를 수반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또 M&A가 잘 되려면 우회등록이 활성돼야 하기 때문이다. 나스닥의 경우 기업공개보다 M&A가 많음을 감안하면, 비공개기업보다도 공개된 기업을 통한 공개시장 진입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공시시스템 도입 등으로 자율규제

 정부의 벤처활성화정책에 따라 벤처캐피탈 업계도 올 한해 사뭇 기대가 컸다. 이에 따라 벤처캐피탈협회는 공시시스템, 자율규제, 그리고 기업 DB 및 통계에 대한 운영을 통해 환골탈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창투사 관리와 창투사 평가시스템이 그것. 등급평가에 따른 정부지원 차별과 함께 공시시스템을 도입했다. 공시시스템의 경우 업계의 반발이 있었지만, 정부의 설득으로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겠다는 마음에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최근에는 창업투자사가 경영참여 목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게 됐다. 창업지원법이 개정됨에 따라 그동안 제한을 뒀던 창투사의 경영참여 목적의 투자행위가 허용되고, 또 사모전문투자회사(PEF)의 참여 기회도 넓어졌다.

 창투사는 지금까지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폭이 좁아 투자기업의 성장지원 등에 적극적인 대응이 힘들었으며, 이는 창투사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한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고정석 벤처캐피탈협회장은 “그동안 창투사는 전체 지분의 50% 이상 투자가 불가능했으나, 이제 투자폭이 넓어져 창업초기 기업투자가 활성화될 것”이라며, “회사가 매출이 100억~200억원 규모로 성장했을 때, 경영에 필요한 조언이나 인력 등을 제공하면 경영참여 효과가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벤처캐피탈은 아직은 미국의 벤처캐피탈과 비교할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 성숙해진 투자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미국식 벤처캐피탈 모형인 유한회사형 투자조합(LLC)의 탄생 가능성이다.

 유한회사형 투자조합이란 전문 캐피탈리스트가 설립한 유한회사가 직접 업무집행조합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창투가 여러 개의 투자조합을 만들어 투자하거나, 자본금 계정을 통해 직접투자하는 방식을 병행했다. 반면 LLC란 그 자체가 투자조합이며, 회사주주가 업무집행조합원이 되는 것이다.

 LLC는 주로 미국에서 선보이고 있는 선진형 투자방식으로, 국내에서는 그동안 정부가 LLC의 설립을 지원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LLC가 국내에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벤처캐피탈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 여기에다 이 제도를 성공적으로 도입·운영하기 위해서는 벤처캐피탈리스트의 투자성과와 도덕적 자질에 대한 시장의 검증이 필요한데, 국내시장에는 그만한 토양이 없었다. 벤처캐피탈이 국내시장에 안주할 게 아니라,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