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사옥. 사진 각 사
왼쪽부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사옥. 사진 각 사

올해로 5년 차 직장인 박진우(32)씨는 “은퇴 이후의 삶을 잘 준비해서 노후를 여유 있게 보내고 싶은데, 정작 내 퇴직연금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서울 광화문 소재 직장에 다니는 신입사원 김혜림(27)씨는 “연금저축과 IRP(개인형 퇴직연금) 중에서 어떤 게 더 유리한지 궁금하다”며 “새 제도 시행 영향도 관심이다”라고 말했다.


회사가 굴리는 DB·내가 굴리는 DC·IRP

퇴직연금제도는 크게 △확정급여형(DB) △확정기여형(DC) △IRP가 있다. DB형은 쉽게 말해 회사가 책임지는 것이다. 적립금을 사용자(기업)가 운용하고, 근로자는 퇴직급여 계산 식에 따라 정해진 퇴직금을 받는 방식이다. 가령, 5년 근속 직장인이 퇴직 시 평균임금(계속근로기간 1년의 30일분)이 122만원이면, 근속연수 5년을 곱한 610만원이 퇴직연금이 된다.

DC형은 개인이 책임지는 유형이다. 회사가 매년 총급여의 일정 비율을 근로자가 관리하는 계좌에 적립해주면 개인(근로자)이 직접 금융회사 등을 통해 운용하는 방식이다. 

IRP는 DC형이나 DB형 퇴직연금과 별도로 세액공제 혜택을 위해 개인이 직접 가입하는 상품이다. 이직에 따른 퇴직금이나 여유자금을 넣어 운용하다가 55세 이후 연금을 수령하게 된다. 회사를 옮기더라도 IRP 계좌에 퇴직급여를 계속 적립할 수 있다. 총급여가 5500만원 이하라면 세액공제 한도(700만원)에 대해 최대 16.5% 환급률이 적용돼 115만5000원까지 돌려받을 수 있다. 

단 법정 사유(사회적 재난, 6개월 이상의 요양, 개인 회생 및 파산, 주택 자금 등)를 제외하곤 중도 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IRP를 중도 해지하면 그동안 세액공제를 받았던 적립금은 물론 운용 수익에 대해 16.5%의 기타소득세를 물어야 한다.

만약 임금 상승률을 뛰어넘는 운용 수익을 기대한다면 DC형과 IRP가 유리하다. DB형은 임금 상승률에 따라 연금 수령액이 늘고, DC형과 IRP는 운용 수익률이 높으면 연금액이 많아지고 절세 혜택도 누릴 수 있어서다. 


7월 퇴직연금 방치 방지하는 ‘디폴트 옵션’ 시행 예정

올해 퇴직연금 수익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들이 잇따라 시행됨에 따라 퇴직연금 시장이 더 커질 것으로 보여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등에 따라 4월부터 ‘DB형 적립금운용위원회 설치 의무’가 시행됐다. 하반기에 DC형, IRP에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도 앞두고 있다. 

특히 7월 12일부터 시행될 예정인 디폴트 옵션은 DC·IRP 가입자가 퇴직연금을 운용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사업자(금융회사)가 사전에 가입자와 맺은 계약에 따라 운용을 대신해주는 제도다. 가입 고객(근로자)의 퇴직연금 운용 지시 없이 4주가 지나면 가입자에게 디폴트 옵션이 작동한다는 통지가 발송되고, 이 시점부터 2주가 더 지나면 디폴트 옵션이 가동한다.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장기 수익률을 높이려는 게 주목적이다. 디폴트 옵션 범위는 장기 투자에 적합한 펀드(TDF‧장기가치상승추구펀드‧MMF‧인프라펀드)와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구성된다. TDF는 은퇴 시점(target date)에 맞춰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의 투자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펀드다.

금융위원회(금융위) 관계자는 “퇴직연금 가입자의 관심‧시간 부족 등으로 소극적으로 자금이 운용되는 관행이 이어져 왔는데, 디폴트 옵션은 장기 수익률을 제고할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미국은 2006년, 영국은 2008년, 호주는 2013년에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실제 제도 시행 이후 은행권의 퇴직연금 수익률 증가로 이어질지도 관건이다. 은행권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증권사보다 떨어지는 등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은행연합회 퇴직연금 수익률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국내 은행의 DC형 평균 수익률은 1.59%, IRP는 1.91%에 그쳤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기존에는 가입자의 직접적인 운용 지시가 없으면 금융사가 해당 자금을 별도 수익 상품에 투자할 수 없어 수익률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디폴트 옵션 도입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수익률 증가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금융사들의 퇴직연금 운용 전략과 수익률 등 경쟁력 차이가 부각될 수 있다”고 했다.


커지는 퇴직연금 시장, 은행권 경쟁 치열

금융사에 있어 퇴직연금은 ‘수수료 수익’과 직결된다. 최근 은행들은 퇴직연금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퇴직연금 영업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기존 퇴직연금 전문센터를 확대 개편한 ‘퇴직연금 고객관리센터’를 출범했다. KB국민은행은 ‘DB형 적립금운용위원회 설치 의무’에 대비해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부채연계분석(LDI) 기반 ‘적립금운용계획서 컨설팅’ 및 ‘맞춤형 자산배분솔루션(OCIO) 서비스’를 제공한다.

IBK기업은행은 퇴직연금 기업형 제도(DB·DC형) 비대면 신규 가입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나은행은 DC형과 개인 IRP 가입자들이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할 수 있는 ‘퇴직연금 ETF’를 출시했다. 우리은행은 개인형 IRP에 추가 자금을 입금하거나 퇴직금을 입금한 고객을 대상으로 한 경품 제공 이벤트를 마련했다.

4월부터 300인 이상 DB 도입 사업장은 적립금 운용위원회를 의무적으로 구성하고, 목표 수익률 설정, 자산 배분 정책, 투자 가능 상품 등 적립금 운용에 관한 계획서를 매년 1회 이상 작성해야 한다. 여기엔 부진한 DB 수익률을 높이려는 취지가 깔려 있다. 기존에는 기업들이 수익률 제고보다는 손실을 피하고자 원리금 상품만 운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기업들이 운용위원회 설치를 계기로 원리금 비보장 상품 비중을 기존보다 늘리는 등 적극적으로 운용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기대다.

국내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적립금 규모 기준 250조원을 넘어섰다.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 등에 따르면 작년 4분기 말 기준 퇴직연금 상품을 운용 중인 사업자는 증권사와 보험사, 은행 등 총 43곳이다. 은행권에서는 BNK경남, BNK부산, DGB대구, IBK기업, KB국민, KDB산업, NH농협, 광주, 신한, 우리, 제주, 하나 등 12개 은행이 경쟁 중이다.

작년 4분기 말 기준 12개 은행의 DB형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70조5017억원, DC형은 48조1497억원, 개인 IRP 31조746억원이다. DB형 적립금 규모는 신한은행(12조9881억원), 하나은행(11조1076억원), IBK기업은행(9조8140억원)이 1~3위다. DC형은 KB국민은행(10조56억원), 신한은행(9조3888억원), IBK기업은행(9조3081억원)이 1~3위 선두 은행이다. 개인 IRP 적립금 규모는 KB국민은행(8조3618억원)이 가장 많고 신한은행(7조8017억원), 하나은행(5조7294억원)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