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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리해고는 부당해고’라는 인식이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졌다. 2014년 정리해고를 시행한 한화투자증권이 3년 뒤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하급심은 “정리해고 시 경영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며 회사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은 “회사가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그러나 최근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6월 9일 국내 철강 제조 업체 넥스틸이 2015년 대규모 희망퇴직에 이어 일부 근로자를 정리해고한 것은 ‘긴박한 경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의 정당성을 인정한 2014년 대법원 판결 이후 8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넥스틸의 정리해고 사건은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와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 1심과 2심 법원에서 수차례 판단이 뒤집혔다. 지노위와 중노위는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고, 1심은 넥스틸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2심이 정리해고를 할 정도의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면서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됐다.

넥스틸은 대법원 단계에서 법무법인 지평의 노동그룹을 선임했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사법연수원 11기) 대표변호사를 필두로 인사와 노동, 집단적 노사관계 등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이광선(사법연수원 35기) 노동그룹 팀장, 노동법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에서 연수 중인 구자형(변호사시험 3회) 변호사가 합을 맞췄다. 중노위에선 10명의 소송수행자가 붙었다.


정리해고, 뒤집히고 또 뒤집힌 적법성 판단

2015년 넥스틸의 경영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국제 유가 하락과 미국 내 에너지 산업 침체로 주력 상품인 유정관과 송유관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넥스틸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면서 비용 상승효과가 발생했고, 유정관 판매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졌다.

강관 업계 전반의 위기 상황 속 영업 침체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넥스틸은 회계법인에 경영 진단을 의뢰했다. 그 결과 매출액·영업이익 급감, 자금 수지 악화, 미국의 유정관 반덤핑 관세 부과 등의 문제로 생산 인력을 248명에서 65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에 넥스틸은 생산직 근로자 137명에 대한 희망퇴직을 시행한 뒤 5명을 추가 해고 대상자로 통보했고, 그중 사직서를 제출한 2명을 제외하고 3명을 정리해고했다. 정리해고를 당한 세 명의 근로자는 지노위에 구제 신청을 제기했다. 지노위는 정리해고에 대한 긴박한 경영상 필요와 해고 회피 노력, 노동조합과 성실한 협의를 거친 사실은 인정되지만,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부당해고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노위 결정에 불복해 회사가 낸 재심에서도 중노위는 지노위 판단이 옳다고 봤다. 그러자 넥스틸이 중노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넥스틸이 당시 영업이익 급감으로 경영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고 판단한 반면, 2심은 넥스틸의 현금 흐름이나 부동산 보유 상황 등을 볼 때 근로자 137명이 희망퇴직한 뒤 추가로 3명을 해고할 만큼의 경영 위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평, 재무제표 분석해 정당성 입증

법원은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의 기준 중 긴박한 경영상 필요성을 매우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실상 기업이 부도 위기에 빠질 정도의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사건에서도 회사가 정리해고를 시행할 당시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가 쟁점이 됐다. 지평은 넥스틸의 재무제표를 미세한 단위로 쪼개 숫자 뒤의 이면을 꺼냈다. 재무제표상 숫자만 보면 단편적으로 기업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데, 당시 글로벌 경제 상황과 철강업계의 영업상 특이성 등을 종합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지평은 넥스틸의 재무 건전성 위기와 관련해 먼저 ‘부채 비율’에 집중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넥스틸의 평균 부채 비율은 272%에 이르는데, 제조업의 평균 부채 비율은 200% 미만이고, 넥스틸 같은 금속 업체의 평균 부채 비율은 57%에 불과하다는 점을 비교한 것이다. 심지어 272%에 달하는 부채 비율도 전년도 대비 개선된 수치로, 이는 생산량 감소 폭이 커지면서 원자재를 매입하는 채무 자체가 800억원 이상 떨어져 생긴 ‘착시 효과’라는 점을 분석해냈다.

지평은 ‘차입금 의존도’도 분석했다. 넥스틸의 차입금 의존도는 2014년 24%에서 2015년 55%로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자기자본 대비 총차입금 비율도 2014년도 말 87%에서 2015년도 말에는 224%로 크게 올랐다. 넥스틸 같은 1차 금속 업체는 2015년을 기준으로 차입금 의존도가 27%, 자기자본 대비 총차입금 비율이 44%에 불과했는데, 지평은 동종 업계 비교 분석을 통해 넥스틸의 경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기업의 지급 능력을 평가하는 ‘당좌 비율’도 파고들었다. 당좌 비율은 기업의 자산 중에서 현금화가 용이한 당좌 자산을 유동 부채로 나눈 것인데, 당좌 비율이 높을수록 지급 능력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1차 금속 업체 당좌 비율이 2015년 평균 85%를 기록했는데, 넥스틸은 2014년 말 23%, 2015년 말 17% 수준이었다.

그러나 원심은 넥스틸의 2015년 실적을 두고 재무 건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넥스틸의 당시 매출액은 1716억원, 영업이익은 125억원, 당기순이익은 25억원을 기록했다.

지평은 당시 넥스틸이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품 중 일부의 수출 조건이 바뀌면서 2014년 매출이 2015년 매출로 잡히게 된 사실을 발견했다. 보통 수출품은 배에 선적하는 순간 매출로 집계되는데, 당시 물품을 수입하는 국가에서 관세를 내야만 매출이 발생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570억원 상당이 2015년 매출로 계산이 됐다.

이 변호사는 “법원에서 판단할 때 단순히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과 영업이익 등만 보고 흑자인데 구조조정은 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며 “그러나 생산 활동이 없어서 부채 비율이 떨어지고, 원자재 구입을 포기해서 차입금 의존도가 내려가는 등 기업의 재무 상태는 재무제표의 숫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 사건에서는 정리해고 대상자가 소수(3명)인데도 정리해고의 적법성을 인정한 점이 대법원의 입장 변화를 의미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원심은 “이미 137명의 근로자를 감축했는데 또 인원을 추가 감축해야 할 만큼 경영상 위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남은 정리해고 인원이 적다고 해서 경영상 위기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가 발생하면서 국내에서도 넥스틸의 정리해고와 비슷한 사건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처럼 실제 도산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구조조정을 부당해고라고 판단하면 기업이 살아날 기회는 날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