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도가 대표 상품 가와지 막걸리. 사진 배다리도가
배다리도가 대표 상품 가와지 막걸리. 사진 배다리도가

2009년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선 희한한 ‘술 배틀’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온 보졸레 누보 와인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양조장에서 빚은 누보 막걸리 중 어떤 술이 더 많이 팔리는지 한 달간 경합을 붙인 것이다. 보졸레 누보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 세계에서 동시 판매하는 햇와인이다. 그해 수확한 포도를 따서 와인을 빚어 바로 그해에 마시는 와인이다. 보졸레 누보와 판매 경쟁이 붙은 누보 막걸리 역시 그해 수확한 햅쌀로 빚은 막걸리다. 보졸레 누보는 2만원대, 누보 막걸리는 4분의 1 수준인 5500원이었다. 그러나 막상 비싸다는 지적을 받은 것은 보졸레 누보가 아닌 누보 막걸리였다. 당시 막걸리 한 병 가격이 1000원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무슨 막걸리가 5500원이나 하냐’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그럼 2만원이 넘는 보졸레 누보는? 2009년 그해만 해도 보졸레 누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여서, 보졸레 누보는 연말 특수까지 겹쳐, ‘가격을 따질 겨를 없이, 없어서 못 파는 와인’이었다.

그렇다면 그해 연말 보졸레 누보와 누보 막걸리 중 어떤 술이 더 많이 팔렸을까. 놀랍게도 누보 막걸리 한 달 판매량이 보졸레 누보 한 달 판매량을 앞섰다. 이벤트를 기획한 백화점 관계자도 뜻밖의 결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2009년 보졸레 누보를 누른 햇막걸리를 만든 주역은 지난 4월 경기도 고양시 가좌동에 소규모 양조장 ‘배다리도가’를 설립한 박상빈 대표다. 2009년 누보 막걸리를 만들었을 때, 그는 고양탁주 이사로 근무 중이었다.

박 대표는 올해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의 양조장을 차린 뒤,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 그것도 햅쌀로만 ‘가와지 막걸리’를 내놓고 있다. 10여 년 전 보졸레 누보를 눌렀을 때 그대로 햅쌀로 신선한 막걸리를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엔 고양시 특화 농산물인 가와지쌀로만 막걸리를 빚었다. 2009년 당시에 내놓은 누보 막걸리보다 훨씬 고급술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 술이 배다리도가의 가와지 막걸리다.

가와지쌀은 한반도 최초의 재배 볍씨에서 이름을 땄다.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고양시 대화동 일대 가와지 마을에서 볍씨가 발굴됐다. 고양시는 가와지볍씨 출토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2017년 경기도 농업기술원의 기술 지도를 받아, 가와지쌀을 개발했다. 지난해에만 약 1000t의 가와지쌀이 고양시 일대에서 생산됐다.

고향인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에 대한 박 대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가와지쌀은 찹쌀과 멥쌀의 중간 찰기로 쫀득한 식감을 자랑한다. 쌀알이 작아서 조리 시간이 짧고, 김밥, 도시락으로 활용하기 좋다. 예로부터 ‘밥으로 먹기 좋은 쌀로 빚은 술은 술맛도 좋다’고 하지 않나. 찰기 많은 가와지쌀로 빚은 술은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아도 자연의 단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가와지쌀은 양조장 입장에서 볼 때 술 빚기 쉬운 쌀은 아니다. 가격이 일반 쌀보다 비싼 데다 쌀 알갱이가 작다. 막걸리 빚는 데 핵심 원료인 전분은 쌀 알갱이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알갱이가 작다는 것은 그만큼 전분이 적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수율(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의미다.


박상빈 배다리도가 대표. 사진 박순욱 기자
박상빈 배다리도가 대표. 사진 박순욱 기자

그뿐 아니다. 가와지쌀로 술 빚기는 극도의 신중함이 필요하다. 쌀 알갱이가 작은 만큼 세척도 조심스럽다. 박 대표는 대개 쌀 씻기를 15회 정도 하는데, 갓난아기 목욕시키듯이 조심스레 쌀을 씻는다. 거칠게 씻다 보면 가뜩이나 작은 쌀 알갱이가 훨씬 작아지기 때문이다. 쌀 씻기를 살살, 천천히 하다 보니 세척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30㎏ 쌀을 씻는 데 1시간 남짓 걸린다. 쌀 씻기 다음은 침미, 쌀 불리기다. 침미 작업 역시 가와지쌀은 여느 쌀과는 다르다. 오래 불린 다음에 고두밥을 지으면, 쌀 알갱이의 힘이 없어져, 꼬들꼬들한 느낌이 약해진다. 그래서 2시간 정도만 쌀 불리기를 한다.

교반(발효 중인 술을 고루 섞기)도 쉽지 않다. 원료인 가와지쌀은 찰기가 많아 발효탱크 안의 술이 금방 딱딱해진다. 이럴 때는 부지런히 술을 저어 줘야 한다. 하지만 떡처럼 딱딱해진 술통을 휘젓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성인 남자도 두 팔을 모아서야 겨우 저을 수 있는 데다 금세 땀이 날 정도로 힘에 부친다.

그런데 이곳 배다리도가 양조장에는 자동 교반기가 없다. 박 대표를 비롯해 두 아들까지 ‘삼부자’가 돌아가며 술통을 젓는다. 여간 힘이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다. 박 대표는 “자동 교반기를 써봤는데 생각보다 교반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직접 팔로 젓고 있다”며 “젊은 아들 둘이 큰 불평 없이 잘한다”고 말했다.

현재 가와지 막걸리는 두 종으로 7.5도는 500mL에 4500원, 9.5도는 450mL에 8000원이 소비자가격이다. 지역특산주 면허가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는 안 돼 지역 소매 업장이나 전통주점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가와지 막걸리에 대한 전통주 전문가들의 시음 평도 호의적이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는 “곡류의 담백한 향이 기본으로 깔리고, 바닐라 같은 향도 담겨 있다”고 평했으며, 김재호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탁주에 한정하여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만큼 잘 빚은 술이며, 드라이하면서도 혀의 감각을 자극하는 맛이 다양하다”고 시음기를 남겼다.

가와지 막걸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테루아(terroir) 막걸리’라는 점이다. 테루아는 프랑스어로 토양, 풍토를 뜻하는 단어로 대개 와인이 만들어지는 자연, 양조 환경을 말한다. 가와지 막걸리는 고양시에서만 수확되는 가와지쌀로만 만든다. 박 대표는 “다양한 쌀막걸리 중 곡향의 차이는 미세하다고 본다”며 “가와지 막걸리의 가치는 테루아에 있다”고 말했다.

신생 소규모 양조장인 배다리도가는 현재 지역특산주 면허 취득을 준비 중이다. 그래야만 인터넷 판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가와지 막걸리 후속 제품으로 ‘일산 막걸리’를 곧 내놓을 참이다. 쌀 외에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부재료로 사용할 작정이다. 약주 면허가 있는 만큼, 증류식 소주를 발효 중인 약주에 섞어 완성하는 과하주도 개발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생산량이 많지 않지만, 제품 종류는 가급적 다양하게 갖출 방침”이라고 말했다.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로 가겠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