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안정 속 쇄신’을 기조로 경영진 인사를 단행했다. 사장단에서 기존 2인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성별이나 연공서열과 무관하게 성과를 낸 인물들을 등용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0월 27일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단행한 만큼 평소 ‘인재와 기술’을 중시하던 경영철학을 반영했다는 풀이다. 임원단에서도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 증폭에 대응하기 위해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울 수 있는 30·40대 ‘젊은 피’가 대거 발탁됐다.

12월 5일 삼성전자는 사장 승진 7명, 위촉 업무 변경 2명 등 총 9명 규모의 2023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먼저 한종희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과 경계현 반도체(DS) 부문장의 ‘투톱’ 체제는 유지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주력 사업인 반도체 시장 한파 등의 경영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사장으로 승진한 7명 중 6명이 50대였다. 김우준(54) DX 부문 네트워크 사업부장 사장은 사장단에서 가장 젊다. 네트워크 사업 성장에 기여한 공로로 승진했다. 이영희(58) DX 부문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은 삼성전자 사상 첫 전문경영인 출신 여성 사장이 됐다. 이외에도 남석우(56) DS 부문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제조담당 사장, 송재혁(55) DS 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반도체연구소장 사장, 백수현(59) DX 부문 커뮤니케이션팀장 사장, 박승희(58) CR(Corporate Relations) 담당 사장, 양걸(60) 중국전략협력실장 사장 등이 승진했다.

남 사장은 반도체연구소에서 메모리 전 제품 공정개발을 주도해온 반도체 전문가이고, 송 사장은 디램(DRAM), 플래시 메모리 공정개발부터 양산까지 전 과정을 이끌어 메모리 사업 글로벌 1위 달성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백 사장과 박 사장은 각각 SBS 보도국 부국장,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대내외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해외 판매법인을 경험한 반도체 영업마케팅 전문가인 양 사장은 중국 내 사업 확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미·중 갈등의 영향으로 난관을 겪는 중국 사업을 담당할 적임자로 꼽혔다.

기존 DX 부문 네트워크사업부장이었던 전경훈(60) 사장은 DX 부문 CTO 겸 삼성리서치장으로, 삼성리서치장이었던 승현준(56) 사장은 DX 부문 삼성리서치 글로벌 연구개발(R&D) 협력 담당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12월 6일에는 사장단 인사에 이어 부사장급 이하 후속 임원 인사가 단행됐다. 총 187명의 임원이 승진해 작년(198명)보다 승진자 수는 소폭 줄었지만, R&D 임원급 최고 전문가인 펠로(2명), 마스터(19명)의 승진은 역대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40대 부사장은 17명, 30대 상무는 3명이 배출됐다. 

이처럼 ‘젊은 인재’가 대거 등용된 것은 이 회장이 평소 강조해온 철저한 성과주의 중심의 경영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기흥 반도체 R&D단지 기공식에서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앞서 6월에는 유럽 출장을 다녀온 뒤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이번 인사는 성과·성장 잠재력을 중심으로 미래 준비를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이영희 삼성전자 DX 부문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 이정애 LG생활건강 사장, 박애리 지투알 CEO 부사장, 안정은 11번가 대표이사 내정자, 이선정 CJ올리브영 대표. 사진 각 사
왼쪽부터 이영희 삼성전자 DX 부문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 이정애 LG생활건강 사장, 박애리 지투알 CEO 부사장, 안정은 11번가 대표이사 내정자, 이선정 CJ올리브영 대표. 사진 각 사

삼성, CJ·LG·SK그룹 이어 ‘유리천장’ 깼다
53년 만에 첫 여성 삼성 사장
마케팅 전문가 이영희 발탁

삼성전자에서 12월 5일 창사 53년 만에 첫 여성 사장이 나왔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 회장이 “여성도 사장까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로는 11년 만이다. 주인공은 바로 이영희 DX 부문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이다. 삼성그룹 전체에서는 비(非)오너가 출신 최초의 여성 사장이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의 두 번째 여성 부사장으로, 2012년 승진한 후 삼성의 첫 여성 사장 후보로 거론돼왔다. 200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무선사업부 전략마케팅팀 마케팅그룹장, 글로벌마케팅센터장 등을 지내며 ‘갤럭시의 세계적 성공’을 이뤄내는 데 기여했다. 임원 인사에서는 여성 승진자가 9명으로 작년(13명)보다 다소 줄었지만, 이재용 회장의 첫 인사에서 여성 사장을 배출했다. 앞서 CJ·LG·SK그룹에서도 비오너가 출신 여성 전문 경영인이 사장급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됐다. CJ그룹은 10월 25일 CJ올리브영의 새 수장으로 이선정 대표를 선임했고, LG생활건강은 11월 24일 이정애 음료사업부장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 내정했다. LG그룹 계열 광고전문회사 지투알도 박애리 부사장을 CEO로 선임했다. 12월 2일에는 SK그룹 계열사 11번가가 운영총괄을 맡는 안정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신임 CEO에 내정하기도 했다. 재계에서 여성 인재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오는 배경이다.



재계 연말 인사 마무리 국면
한화·CJ, 3·4세 경영 본격화
‘안정 속 미래 사업 발굴’ 방점

LG·SK그룹, 현대차그룹 등에 이어 삼성전자까지 경영진 인사를 단행하며 롯데를 제외한 국내 주요 기업의 연말 인사가 마무리 국면에 들어섰다. 파격 인사를 단행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조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동시에 미래 먹거리 사업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진 탓이다. 먼저 한화그룹과 CJ그룹에서는 오너 일가 3·4세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지난 10월에 인사를 모두 마무리한 한화에서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삼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리조트 상무도 한화솔루션 갤러리아 부문 전략본부장(전무)을 맡았다. 그 뒤를 이어 작년보다 이른 인사로 선제 위기 대응에 나선 CJ그룹에서는 이재현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가 식품성장추진실장이 돼 미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중책을 맡았다. 삼성전자가 ‘한종희·경계현 투톱 체제’를 유지한 것을 비롯해 LG·SK그룹, 현대차그룹 등 주요 그룹 모두 최고 경영진을 대부분 유임시키고 조직 변화를 최소화하며 안정을 꾀했다. LG그룹에서는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권봉석 LG 최고운영책임자 부회장,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등이 유임됐고 18년간 CEO를 한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만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주형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