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서울대 경제학 석사, NHN 이사 / 이진희 베어베터 공동대표는 “발달장애인 사원 240명과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1000여 명에게 안도감을 주는 회사를 꾸린다는 사실에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이진희
서울대 경제학 석사, NHN 이사 / 이진희 베어베터 공동대표는 “발달장애인 사원 240명과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1000여 명에게 안도감을 주는 회사를 꾸린다는 사실에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사진 김흥구 객원기자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많은 기업이 직원 일부를 내보내거나 급여를 삭감했다. 무급 휴직을 시행하거나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 경우도 있다. 허리띠를 바짝 조여 어떻게든 탈출구를 마련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통상적인 기업 논리와는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 회사가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매출이 반 토막 났지만 인위적인 인력 조정을 고려하지 않고, 직원 월급도 건드리지 않는다. 약속했던 채용 절차도 그대로 진행 중이다. 직원과 직원 가족에게 이 회사는 사회로 나가는 용기의 상징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 ‘베어베터’ 이야기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2주 앞둔 4월 6일, 베어베터를 이끄는 이진희 공동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성수동에 있는 베어베터 본사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스크를 쓴 발달장애인 사원 십여 명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만든 명함·커피·과자 등을 고객사에 배송하는 직원들입니다. 업무 특성상 재택근무가 불가능해요. 감염 예방에 만전을 기하면서 움직이는 수밖에요.” 이 대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베어베터는 네이버 창업 멤버인 김정호 공동대표와 이 대표가 2012년 의기투합해 설립한 회사다. 다른 기업에 명함·교육자료 등의 인쇄물, 조식·선물 용도의 제과, 근조 화환 등을 만들어 제공한다. 사내 카페와 매점을 위탁 운영하기도 한다. 모두 기업 간 거래(B2B)다. 현재 베어베터에 속한 발달장애인 사원은 240명. 임직원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발달장애인 사원이 직접 명함을 찍어내고, 꽃을 꾸미고, 쿠키를 만든다. 제품을 포장해 거래 기업에 전달하거나 사내 카페에서 음료를 만드는 일도 발달장애인의 몫이다.

발달장애인이 만드는 제품 품질에 의구심이 든다면 그건 선입견이다. 2019년 기준 베어베터와 거래 기업 간 재계약률은 95.0%에 이른다. 베어베터가 2년마다 실시하는 고객사 만족도 조사 결과는 평균 4.45점(5점 만점)으로 매우 높다. “직무·장애 전문가 70여 명이 발달장애인 사원 240명과 함께 일하며 (사원들을) 돕습니다. 비(非)장애인이 만든 제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죠.” 이 대표가 두 손으로 엑스(X) 자를 그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직무 설계도 베어베터 제품에 대한 거래 기업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원동력이다. “발달장애인은 숙지한 일은 완벽히 해내지만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양이 적어요. 그래서 우리는 작업 순서를 단순화하고, 사원이 순서를 잠시 잊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곳곳에 그림 순서도를 붙였어요. 또 발달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을 꼭 지키고 규칙에 집착하죠. 이런 성향은 지하철 배송 업무에 잘 맞습니다.”


400개 기업·기관과 호흡

이런 노력 덕에 회사 설립 초기 5곳(2012년 기준)에 불과했던 고객사가 지난해 기준 400곳까지 불어났다. SK·CJ·네이버·카카오·IBM·대웅제약·로레알·KT·신한은행·카이스트·고려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기관이 베어베터와 손을 잡았다. 7000만원(2012년) 수준이던 매출액도 89억원(2019년)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40~50% 줄 것으로 보인다.

“베어베터는 고객사의 총무·복지 파트에서 쓰는 물품을 주로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사업 구조상 베어베터가 돈을 벌려면 고객사의 주문이 많아야 해요. 그런데 고객사 임직원이 재택근무로 출근하지 않으니 주문도 덩달아 감소하게 되더라고요.”

녹록지 않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대표는 베어베터 입성을 꿈꾸는 발달장애인과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연초 예정했던 1차 채용(10명)을 강행했다. 현재는 2~3차 채용 후보 32명을 대상으로 업무 훈련 중이다. 훈련 과정까지 통과한 발달장애인은 정규직 기회를 얻는다. 이 대표도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다.

“김정호 대표와 고용만큼은 건드리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베어베터는 ‘직업을 가지고 가족·이웃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발달장애인의 소망 실현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에요. 발달장애인 고용 확대가 이 회사의 유일한 목표죠. 일하는 발달장애인은 성장의 기회를 얻고, 그 가족은 안도와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고요. 코로나19 후폭풍이 거세지만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버텨보려고 합니다.”


베어베터의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거래 기업에서 의뢰한 화환과 명함을 제작하고 있다. 사진 베어베터
베어베터의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거래 기업에서 의뢰한 화환과 명함을 제작하고 있다. 사진 베어베터

늘어나는 발달장애 인구

기업이 베어베터 같은 장애인표준사업장과 거래하는 이유를 사회공헌이나 상생(相生)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국가 지방자치단체와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을 고용한 공공기관·기업 등은 장애인을 일정 비율 이상 고용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런데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는 기업·기관이 장애인표준사업장과 거래하면 거래 금액의 50%까지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감면받을 수 있다. 이른바 ‘연계고용 부담금 감면제도’다.

“장애인 직접 고용이 힘든 회사는 베어베터와 거래하는 방식으로 고용 의무를 대신할 수 있어요. 기업은 과대료를 줄이면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고, 발달장애인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윈윈’인 셈이죠. 그런데 여전히 많은 기업이 그냥 과태료 내는 쪽을 택합니다. 연계고용이라는 게 막상 하려고 들면 수고스럽거든요.”

장애인 노동 시장에서 발달장애인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2018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30세 미만 장애 인구에서 발달장애인 비중은 2008년 45.4%에서 2018년 62.5%로 10년 새 17.1%포인트 급증했다. 전체 장애 인구로 확대해 봐도 발달장애인은 같은 기간 7.1%에서 8.9%로 늘었다. “어떻게 하면 발달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를 베어베터라는 회사가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경제활동인구로서 발달장애인을 배척하지 않는 사회로 진화하길 오늘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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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고용 부담금 감면제도 장애인 고용부담금 납부 의무가 있는 사업주가 장애인표준사업장과 같은 연계고용 대상 사업장에 도급을 줘 생산품을 납품받는 경우, 장애인 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간주해 부담금을 감면해주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