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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SW) 수입대금은 ‘소프트웨어 사용료를 내고 얻은 이익에 대한 대가(사용료 소득)’일까, 아니면 ‘물건을 되팔아 얻은 이익(사업 소득)’일까. 소프트웨어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했던 1990년대 말, 해외 소프트웨어 수입 대가에 대한 세금을 둘러싸고 소송이 이어졌다. 사용료 소득이면 해외에서 구입할 때, 국내에서 되팔아 수익을 올릴 때 각각 세금이 부과된다. 반면 사업 소득일 경우 외국 판매사의 국내 고정사업장이 없다면 수입사가 되팔 때만 세금을 내면 되는 것이다.

약 20년이 지났지만, 유사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에는 소프트웨어의 기능·가격을 고려해 상품 수입 대가면 사업 소득, 노하우 이전 대가면 사용료 소득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던 탓에 법원 판단도 접수되는 사건마다 달라 혼란이 계속됐다. 

이 상황에 마침표를 찍어줄 판결이 최근 나왔다. 산업용 소프트웨어 수입회사인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과세 당국을 상대로 “220여억원 상당의 과세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냈다. 1·2·3심서 모두 승소한 것이다. 이 소송은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낸 대금은 사업 소득이어서 과세가 부당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시작됐다. 소송을 이끈 김성환(사법연수원 29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유사한 사건은 예전부터 계속됐지만,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며 “이 판결이 기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소프트웨어 완제품 수입해 팔았는데…220억원 세금 폭탄

인터그래프 코리아는 소프트웨어를 수입해 정유·화학·조선회사 등에 판매한다. 미국 인터그래프 본사와는 ‘별도 법인’으로 1990년대 말부터 소프트웨어를 국내에 들여왔다. 본사가 개발한 3차원(3D)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이 주력 상품이었다. 이는 건물·선박 등의 형상에 기초해 배관이 어느 곳에 있어야 하는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제품이다. 또 공정 설계나 데이터 관리 등의 프로그램을 팔면서 유지보수나 교육 등도 제공했다.

2017년 4월, 인터그래프 코리아는 서울지방국세청의 법인세 통합조사를 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국세청은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본사에 지급한 소프트웨어 구입대금을 ‘국내 원천 사용료 소득’으로 판단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부과된 세금은 가산세를 포함해 원천징수 법인세 220억4100여만원과 지급명세서 미제출 가산세 5억원이었다. 5년 단위로 국세청 조사가 이뤄지는 탓에 2017년 이후분에 대해서도 조사·추가 과세가 이뤄졌다. 옛 법인세법과 한·미 조세협약이 국세청 판단의 근거였다. 옛 법인세법은 노하우를 국내에서 사용하거나 그 대가를 지급하는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을 외국 법인의 국내원천소득으로 분류한다. 한·미 조세협약 14조는 비밀공식, 기술 등의 사용 또는 사용권에 대한 대가로 받는 지급금 등을 사용료로 규정한다. 국세청은 미국 본사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노하우’로, 인터그래프 코리아의 대금을 사용료로 보고, 사용료로 얻은 이익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인터그래프 코리아 측은 불복했다. 판매된 소프트웨어는 범용 소프트웨어로, 노하우나 비공개 기술정보 도입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사용료 소득을 전제로 한 처분이 부당하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지난 2018년 조세심판원에 심판청구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시작했다.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2012~2016년 당시 판매한 소프트웨어의 구동 장면. 사진 인터그래프 코리아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2012~2016년 당시 판매한 소프트웨어의 구동 장면. 사진 인터그래프 코리아

“그림 프로그램 샀다고 해서 그리는 기술도 산 건 아냐”

광장의 변론 전략은 ‘비유’였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어 ‘노하우 전수가 아니다’는 논리를 강화한 것이다. 웹툰 또한 작가들이 작화를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이 사건 속 3D 구현 프로그램과 유사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전략이었다. 임수혁(36기) 광장 조세팀 변호사는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을 샀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에 만화 그리는 노하우까지 포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하며 재판부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소스코드(source code·소프트웨어 개발 시 포함되는 모든 동작의 코드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를 받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로 활용했다. 광장 조세팀 소속 임한솔(43기) 변호사는 “완제품을 포장한 그대로 사 왔을 뿐”이라며 “소프트웨어를 바꿀 수 있는 소스코드를 받지도 않았다는 점과 복제 판매권 등이 없어 해당 제품을 자체적으로 복제·변형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수입할 때의 프로그램 상태와 판매된 이후 프로그램 상태도 비교했다. 설치부터 구현되는 전 과정을 비교·분석해 노하우가 이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소송을 함께한 문흥대(26기) 변호사는 “소프트웨어의 제작기법 노하우를 수입한 뒤 개작해서 팔았다면, 본사의 제품과 최종 소비자가 사용하는 제품에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광장은 ‘노하우가 이전됐다’고 판단한 국세청이 어떤 노하우인지 특정하지 못하는 점도 파고들었다. 김성환 변호사는 “통상 노하우를 사기 위해서는 비밀 유지 의무도 포함되는데, 인터그래프의 경우 100여 개 회사에 완제품 그대로를 판매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비공개 정보를 100여 개 기업에 전달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법원 “사업 소득으로 봐야…과세 처분 부당”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조미연)는 지난해 “인터그래프 코리아의 대금은 노하우 대가가 아니라 본사가 개발한 상품의 구입 대가”라고 판시하며 광장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

국세청 측의 주장이 기각됐고 소프트웨어의 범용성이 인정됐다. 재판부는 “제조 설비에 쓰이는 프로그램들이지만, 교육기관 등에서도 일부 활용된다”며 “이는 범용성을 가진 제품이라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이어 “국세청은 ‘인터그래프 코리아가 고객사들의 요청에 따라 소프트웨어 일부를 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 개작됐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과세 당국 내부의 해석기준인 ‘법인세법 기본통칙’과 과세 처분이 부합하지 않는다고도 판단했다. 재판부는 “본사로부터 소스코드를 받지 않았고, 개작해 제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입대금 역시 소프트웨어별 개당 거래 단가에 기초해 결정됐다”며 “기본통칙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기본통칙은 △소프트웨어 비공개 소스코드가 제공되는 경우 △국내 도입자의 개별 주문에 의해 제작·개작된 소프트웨어가 제공된 경우 △소프트웨어 구입대금이 사용 형태나 재생산량 규모 등 일정 기준에 기초해 결정되는 경우를 법인세법상 사용료에 해당한다고 규정한다. 이 기준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국세청의 과세처분이 위법하다는 취지다. 이 판결은 8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