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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산업단지 내 석탄 밀폐형 돔 사일로. SGC이테크건설이 시공 중인 단계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법무법인 세종
여수 산업단지 내 석탄 밀폐형 돔 사일로. SGC이테크건설이 시공 중인 단계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법무법인 세종

산업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작업 중 하나가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고 현장이 훼손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조사해야 한다. 이를 ‘증거보전’이라고 하는데, 본격적인 손해배상 소 제기 전 단계에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양측 의견을 조율해 감정인을 선정하고 현장을 감정(증거보전 감정)하게 된다. 감정 결과는 추후 손해배상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 번 내려진 감정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감정에 중대한 하자가 발견됐다면. 결국 재감정 명령이 나왔고, 이 결과가 재판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은 드문 사례가 나왔다.

 

“석탄 관리 소홀”vs“사일로 시공 부실”

SGC이테크건설(시공사, 법무법인 세종 대리)은 유연탄의 하역·이송·보관·반출을 위한 제반시설 공사도급계약을 금호티앤엘(운영사, 법무법인 기현 대리)과 체결했다. 이후 전남 여수에 위치한 산업단지에 석탄 8만t을 보관할 수 있는 밀폐형 돔 사일로 3기를 완공한 후 운영사에 인도했다. 그런데 약 5개월이 지난 시점인 2014년 2월, 석탄이 적재돼 있던 사일로 3기 중 1기가 붕괴됐다.

사고 발생 직후, 양측은 각각 증거보전을 신청해 사고원인 등을 규명하기 위한 감정 절차에 돌입했다.

시공사는 사일로 안에 보관돼 있던 석탄 관리를 운영사가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석탄의 경우 자연발화가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에 물을 뿌려 온도를 낮추는 등 관리가 필요한 동시에, 너무 물을 많이 뿌리면 서로 엉겨 붙어 반출이 안 된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다. 이를 운영사가 매뉴얼대로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운영사는 기본적으로 SGC이테크건설이 시공을 잘못했다고 반박했다. 시공사가 거푸집을 통해 콘크리트를 붓는 일반적 방식이 아닌, ‘숏크리트 공법(시공을 요하는 표면층에 콘크리트 재료를 혼합해 압축공기로 뿜어서 자유면에 달라붙게 만드는 공법)’을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차곡차곡 순서대로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올라가야 공극이 사라지는데, 실제 이 공극이 사고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양측의 주장이 오가는 가운데 2015년 2월 16일 증거보전 감정 결과가 나왔다. “붕괴사고가 시공사의 시공 부실로 인한 것이다. 화재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라는 결론이었다. 그러자 운영사는 붕괴된 사일로를 복구하기 위한 비용과 붕괴사고로 인해 시설을 운영하지 못했던 기간에 얻었을 이익 등을 합해 총 620억원의 손해를 입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보험사로부터 지급받은 보험금을 공제한 약 188억원을 배상하라는 소를 제기(2015년 9월)했다.


감정인이 교통환경 분야 교수?…‘중대한 하자’ 발견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시공사는 소송 대리인을 법무법인 세종으로 교체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세종의 건설부동산분쟁그룹장 김용호(연수원 25기) 변호사는 우선 감정인단과 학계 전문가의 증인신문, 수차례의 구술 변론과 서면 공방 자료를 꼼꼼하게 뜯어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존 증거보전 절차에서 실시된 감정에서 절차적·실체적으로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밝혀냈다.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 사일로 안의 ‘석탄 명칭’에 오류가 있었던 것.

김 변호사는 “감정인은 해당 분야 전문가를 쓰는데, 알고 보니 화학공학이나 재료공학이 아닌 교통환경 분야 교수가 지정됐더라”면서 “물론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한 전문가라고 하긴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대형 사건의 감정은 유명 학회의 추천을 받는데, 세종은 당시 증거보전 감정이 건축학계의 추천을 받아서 실시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양측이 추천한 전문가 중에 무작위 추첨을 하는데 시공 전문가, 구조 전문가, 화재 전문가 등 5명 중에서 1명이 뽑혔다”면서 “당시 분위기가 건축학회에서 추천받았다는 점에서 감정인의 전문성을 검토한다든가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세종은 또 감정인이 현장을 한두 번밖에 가지 않은 사실 등을 ‘감정 회의록’ 분석을 통해 파악하고, 직접 감정인을 법정에 불러 심문했다. 결국 “내 감정에 문제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다시 해보겠다”는 결정적 증언을 얻게 됐고, 마침내 2018년 1월 25일 재판부는 석명준비명령으로 재감정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세종은 △운영사가 주장하는 시공상 하자가 붕괴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 △운영사의 관리상 과오로 인한 분진폭발 등으로 인해 붕괴됐을 가능성을 치밀한 논리와 공학적 이론에 근거해 적극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폭발의 다섯 요소인 산소, 발화원(스파크), 분진연료, 부유분진(공기 중 부유), 밀폐를 근거로 들어 조목조목 반박 논리를 댔다. 사일로 내부 산소 농도기가 불량이었고, 석탄을 넣을 때 열고 닫는 개폐기가 열려 있었다는 점 등 화재 감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피력했다”고 했다.

결국 이를 통해 세종은 △시공상 하자만으로 붕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구조·시공 분야) △분진폭발이 붕괴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화재·폭발 분야)는 감정을 이끌어냈다. 이는 재판 결과에도 절대적 영향을 끼쳐 “운영사의 관리·운영상 과실이 분진폭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시공상 하자가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다만 재판부는 시공사의 손해배상책임을 30%로 제한했는데, 이미 운영사(원고)가 지급받은 보험금이 이 금액(손해배상의 30%)을 초과한다고 봐서 2월 18일 손해배상청구를 전부 기각했다.

이번 사건은 김 변호사 외에도 윤재윤(연수원 11기) 변호사와 안헌준(연수원 39기) 변호사가 대리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이 ‘건설 관련 소송’에서 감정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감정은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재판부가 감정 결과를 배척하기 어렵고, 감정 결과의 유불리에 따라 소송의 결론이 결정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은 장장 8년이 걸렸고 매우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한 번 감정 결론이 나면 그것을 뒤엎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이례적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감정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는 추세”라며 “따라서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감정인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