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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강도 높은 대러 경제 제재에 돌입하면서 국제 통상 환경이 요동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과거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포괄적 제재 리스크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해외 사업 관련 계약을 맺으면 예외 규정을 포함시켰다. ‘상대 회사가 특별지정제재대상(SDN) 리스트에 오르거나 제재 위험이 증가해 자사가 거래 의무를 불이행하더라도 상대 회사에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러시아 기업과 계약을 할 때는 이런 규정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재 우리 기업은 SDN 리스트에 오른 러시아 기업과 거래하면 제재 위반이 되고, 제재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거래를 불이행하면 계약 위반이 되는 ‘이중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최근 러시아 기업 조인스 스톡 컴퍼니 파워 머신즈 ZTL LMZ 엘렉트로실라 에네르고마슈에크스포르트(JSC파워머신즈·법무법인 선율 대리)가 하나은행과 현대일렉트릭(옛 현대중공업 전기전자시스템사업부·법무법인 율촌 대리)을 상대로 “계약 보증금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이 대표적인 사례다.

법무법인 율촌은 현대일렉트릭을 대리해 “미국 정부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JSC파워머신즈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끌어냈다. 국내에서 독립적 은행 보증에 대해 경제 제재를 이유로 권리남용을 인정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율촌의 신동찬(사법연수원 26기) 변호사는 “그간 경제 제재를 이유로 계약상 의무를 불이행해도 되는지에 관해 논란이 있었는데, 한국 법원이 이를 인정해 주면서 국제적으로도 의미 있는 선례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美 경제 제재 명단 오른 JSC파워머신즈… 현대일렉트릭, 계약 이행 거부

사건은 2016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JSC파워머신즈는 당시 현대일렉트릭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베트남 롱푸1 화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일렉트릭은 JSC파워머신즈 발전소에 쓰이는 배전 변압기와 전력 변압기를 공급하기로 했다. 하나은행은 계약 체결 과정에서 현대일렉트릭이 계약 내용을 불이행하면 JSC파워머신즈에 대신 보증금을 낸다는 이행보증서를 발행해 줬다. 이행보증서의 유효기간은 2019년 3월 30일로 정했다.

현대일렉트릭은 2017년 10월, JSC파워머신즈에 전력 변압기와 배전 변압기 출고 준비가 완료됐다고 통지했다. 그러나 JSC파워머신즈가 현대일렉트릭에 전력 변압기를 2018년 2월 28일까지, 배전 변압기를 2018년 10월 31일까지 보관하다가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변압기 인도 기일이 연기됐다.

그런데 그사이 JSC파워머신즈 대표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인프라 개발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과거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는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강제로 합병시켰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부당한 조치로 보고 러시아의 크림반도 인프라 사업에 힘을 보태는 기업을 대상으로 경제 제재를 가했다.

JSC파워머신즈는 2018년 1월 크림반도 개발 사업 참여 선언 후 곧바로 미국 정부의 ‘우크라이나의 주권, 통합, 민주 및 경제적 안정의 지원에 관한 법률(UFSA)’에 따라 SDN 리스트에 올랐다. 과거 SDN 명단에 오른 인물과 단체로는 오사마 빈 라덴, 알카에다, ISIS 등이 있다.

JSC파워머신즈와 컨소시엄 관계를 맺은 채 계속 사업을 진행하면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게 될 상황에 처하자, 현대일렉트릭은 JSC파워머신즈에 변압기를 공급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JSC파워머신즈는 이행보증서를 발급한 하나은행에 직접 보증금과 지연 이자 등 35만달러(약 5억원)를 지급하라고 요구했고, 하나은행이 이를 거절하면서 법적 분쟁이 시작됐다.


은행 보증 ‘무인성’ 쟁점…권리남용 인정 최초 사례

독립적 은행 보증은 수익자가 지급청구서 또는 채무불이행 진술서를 보증 은행에 제시하면 수익자에게 일정한 액수의 보증금을 지급한다는 지급 약속을 의미한다. 주로 국제적인 건설 공사나 무역 거래 등에서 발주자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발행하고 있다. 이런 은행 보증은 보증 은행이 주채무자로서 지급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에서 통상의 보증과는 다르다.

일반 개인 간 거래에서 발생하는 보증에는 ‘부종성(附從性)’이 작용한다. 쉽게 설명하면 최초의 채무가 소멸하면 보증 채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 은행 보증은 부종성이 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원인 관계에 영향받지 않는 ‘무인성(無因性)’을 띠게 된다. 이는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은 보증서에 기재된 금액을 무조건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JSC파워머신즈와 현대일렉트릭을 예로 들면, JSC파워머신즈가 “현대일렉트릭이 물건을 제때 보내지 않았다”고 하나은행에 통지하면 은행은 원인을 파악할 필요 없이 보증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것이 국제 상거래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 보증의 원칙이다.

JSC파워머신즈 측은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독립적 은행 보증의 무인성에 따라 하나은행이 이행보증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JSC파워머신즈 측은 “수익자의 청구가 있기만 하면 은행의 무조건적인 지급 의무가 발생하는 독립적 은행 보증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SDN 리스트에 올랐다는 원인과 상관없이 은행이 무조건 이행보증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율촌은 부종성이 있는 통상의 보증이 아니라, 무인성이 있는 독립적 은행 보증이라고 하더라도 지급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하면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신 변호사는 “민법에는 권리남용 금지 원칙을 규정하고 있고, 은행 보증의 무인성을 악용해 보증인에게 청구하는 것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는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했다.

독립적 은행 보증이 무인성을 띠더라도 지급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하면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는 점은 입증했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가 권리남용 여부에 영향을 주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에 율촌은 권리남용을 이유로 지급 청구를 부정한 외국 사례를 모았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인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은행에 대한 지급 청구가 부당하다고 본 미국 법원 판결과 영국 법원 판결 등을 제시했다.

결국 법원은 8월 17일 JSC파워머신즈가 현대일렉트릭을 상대로 제기한 보증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JSC파워머신즈가 항소를 포기하면서 확정됐다.

재판부는 “현대일렉트릭이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은 JSC파워머신즈와 거래하게 될 경우 미국으로부터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는 등의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큰 사실이 인정된다”며 “미국이 세계 경제 및 국제 거래에서 갖는 중요도를 고려할 때 현대일렉트릭이 경제 제재를 받게 될 경우 입게 될 피해는 매우 극심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우리 기업의 ‘사법 리스크’를 덜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신 변호사는 “우리 법원이 러시아 기업에 보증금을 줘야 한다고 판결할 경우 하나은행과 현대일렉트릭이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 기업들이 우리 기업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청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번 판결로 (우리 기업들이) 버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