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법정이 아닌 런던, 파리, 제네바,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는 ‘국제중재’로 눈을 돌리고 있다. 국제중재는 양측이 상호 신뢰하에 소송을 하지 않고 제삼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대체적 수단이다. 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이뤄져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든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신흥 중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현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리나라 변호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총 3회에 걸쳐 싱가포르가 국제중재 허브가 된 비결은 무엇인지 들어본다. 또 우리 국제중재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미래를 조망해본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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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해서 먹고 살 수나 있겠어요?”

지난 2000년 김갑유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현 피터앤김 대표, 사법연수원 17기)가 국제중재 실무팀을 별도로 만들겠다고 하자, 법률 시장에선 비웃음이 나왔다. 해외 로펌이 사건을 주도하면 한국 로펌은 협업(co-counsel) 형태로 지원하는 게 ‘업계 공식’인데, 이를 깨고 우리가 주도하겠다고 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2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그의 영문명 케빈킴(Kevin Kim)은 싱가포르 국제중재 시장에서 통하는 ‘치트키’다.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 런던국제중재재판소(LCIA)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고, 주요 사건마다 승소를 거듭했다. 그가 걸어온 길이 한국 국제중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싱가포르에서 만난 외국 변호사들은 한국에서 날아온 기자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며 “케빈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싱가포르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올해 1월 28일 서울 삼성동 피터앤김 사무실에서 김 대표와 방준필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를 만났다. 이들에게 싱가포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국제중재 업계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같은 ICCA에서 사무총장까지 하고 나니 한국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다루는 법률서비스를 해보고 싶었다”면서 “그때부터 계속 싱가포르에 진출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인도양을 양쪽에 두고,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과 인접한 ‘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잠재력과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셈이다.

김 대표는 2019년 11월 부티크 로펌 피터앤김을 직접 차렸다. 로펌 개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싱가포르 현지에 사무소(대표 이승민 변호사)를 낸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국제중재와 국제소송만 하는 로펌은 피터앤김이 유일하다.

미국 변호사인 방준필 변호사는 외자 도입이 한창이던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부터 김 대표와 함께 일하면서 ‘국제중재 콤비’로 불렸다. 외국 변호사들의 논리와 문화에 대해 김 대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지근거리에서 도운 일등 공신이다. 그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국제중재 시장에서 한국은 명함도 못 내밀던 위치였지만, 지금은 확실한 ‘세(勢)’가 생겼다고 강조했다.

방 변호사는 “2000년대 초 학술행사에 참석했는데 완전히 무시당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면서도 “하지만 지금 한국의 위상은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싱가포르에서 한국의 입지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 불가능한 정도”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홍콩이 이른바 ‘차이나 리스크’로 중립적인 이미지를 잃게 되면서 그 자리를 꿰찼다. 국제중재 분야 ‘아시아 1위’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실제 한국과 중국, 일본뿐 아니라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업들의 헤드쿼터(HQ)가 싱가포르로 몰리고 있다.

김 대표는 “중국이나 일본의 메이저 로펌과 달리, 한국 로펌은 해외 진출에 매우 소극적”이라며 “글로벌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 진출 교두보로 싱가포르를 택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국제중재 프랙티스 실무를 개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 대형 로펌 가운데 싱가포르에 진출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국내 대기업들이 진출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에만 사무소를 두고 있다.


김갑유(왼쪽) 피터앤김 대표 변호사와 방준필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가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김갑유(왼쪽) 피터앤김 대표 변호사와 방준필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가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김 대표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아시아 국제중재 시장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적기’라고 본다. 영미법 기반의 싱가포르와 달리, 대륙법 체계를 갖고 있고 한자문화권 시장을 담당할 수 있는 곳은 서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싱가포르에 가서 ‘아시아 어느 나라가 국제중재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냐’고 물으면, 바로 한국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한국 변호사 인재 풀은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민간 영역이 활성화 돼 있다”면서 “특히 K컬처가 주목받고 있는 현시점이야말로 한국이 치고 나가기 좋은 때”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제중재는 법률 시장뿐 아니라 호텔, 서비스, 문화 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컨벤션 산업의 성격을 갖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수조원을 투자해 국재중재를 키웠지만, 한국 정부가 쓰는 돈은 연간 5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한국이 국제중재에서 톱티어(일류) 수준까지 올라왔음에도 여전히 우리 기업들은 (국제중재와 관련해) 외국 로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또 “한국처럼 우수한 인력들이 법조 분야에 몰리는 나라가 없는 만큼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변호사 3만 명 시대를 앞두고 포화 상태인 한국 법률 시장에서 국제중재 분야가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대표는 “전 세계 법률 시장으로 확대해 보더라도 미국, 독일 등 각지에서 한국계 변호사들이 상당히 포진돼 있다”면서 “영어도 되고 인권과 법치가 확립돼 있으며 치안도 보장되는데 이 좋은 인프라를 우리가 제대로 써먹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국내 변호사 시장에도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법률 분야 인적 자원을 잘 활용하면 세계적인 분쟁 사건들을 국내로 가져올 수 있다는 취지다. 김 대표는 “이를 바탕으로 선순환이 이뤄지면 국가 이미지가 제고되고 결국 국가 발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와 방 변호사는 향후 ‘차세대 양성’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피터앤김은 로스쿨 졸업생을 대상으로 국제중재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김 대표와 방 변호사는 “피터앤김에서 가장 활발히 뛰는 80년대생 변호사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이제 더 이상 ‘영어 구사 능력’이 이슈가 되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은퇴하고 나면 지금 구축해놓은 이 시스템을 후세대에게 물려주고 우리들을 필요로 할 때 옆에서 조력하고 싶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