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봉세 씨엔에프 회장이 1월 10일 경기도 군포 본사에서 ‘이코노미조선’과인터뷰하며 라라츄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최상현 기자
추봉세 씨엔에프 회장이 1월 10일 경기도 군포 본사에서 ‘이코노미조선’과인터뷰하며 라라츄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최상현 기자

25년간 남의 상표를 붙인 마스크팩만 만들었던 회사가 느닷없이 자체 브랜드를 내놔 홈쇼핑 채널에서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화장품 ODM(주문자개발생산)·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 ‘씨엔에프’ 얘기다. 2018년 말 ‘라라츄’라는 브랜드로 내놓은 첫 제품은 헤어쿠션, 쉽게 말해 여성용 흑채(순간증모제)다. 빈모(貧毛)에 시달리는 여성의 말 못 할 고민을 저격한 ‘틈새 상품’이다.

‘자체 브랜드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위탁생산 업계의 오랜 불문율이다. 한순간에 모든 고객사가 경쟁사로 돌아서며 수주를 뚝 끊어버릴 위험성이 있어서다. B2B(기업 간 거래) 사업과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사업은 ‘경영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난제다. 수십 년간 축적한 생산 노하우는 수천 개 브랜드의 대(對)고객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치열한 마케팅 환경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코노미조선’은 1월 10일 경기도 군포시 씨엔에프 본사에서 추봉세 회장을 만나 “국내 1위 마스크팩 위탁생산 회사가 돌발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cnf’와 ‘라라츄’라는 명칭 차이만큼이나 먼 B2B 사업과 B2C 사업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추 회장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며 “‘나는 B2C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젊고 감각 있는 직원에게 전권을 일임한 것이 성공 비결이다”라고 말했다.


2019년 12월 23일 추봉세 회장이 고용노동부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사진 씨엔에프
2019년 12월 23일 추봉세 회장이 고용노동부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사진 씨엔에프
씨엔에프는 2년 만에 정규직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그러자 제품 품질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사진 씨엔에프
씨엔에프는 2년 만에 정규직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그러자 제품 품질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사진 씨엔에프

위탁생산 업체가 자체 브랜드를 낸다는 것은 사실 ‘잘 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 아닌가. 현 상황만 유지해도 됐을 텐데.
“위탁생산에만 의존하다 보니 회사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다. 국내 시장은 워낙 한계가 뚜렷하고, 중국 등 해외 시장도 앞으로 정체하거나 내리막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됐다.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하는데, 평생 OEM·ODM만 해온 내겐 답이 없었다. 생산 라인에 대해서는 볼트 하나까지 훤히 꿰뚫고 있지만, ‘20대 여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상품을 원하며, 어떤 마케팅에 열광하는가’에 대해서는 감도 안 잡혔다. 나보다 젊고 감각 있는 직원에게서 그 답을 찾기로 했다. 2018년 초 팀장 셋을 불러 선언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20억원을 투자하겠다. 회계상 문제만 없다면 모두 날려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우리 회사의 미래를 갖고 와달라. 그러자 한 달 만에 ‘홈쇼핑 판매를 한번 해보겠습니다’며 사업계획서가 올라왔다.”

신사업이라는 게 ‘갖고 와달라’고 해서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오더(위탁생산 주문)가 들어오는 대로 생산하는 것이 OEM이라면, 사업성 있는 제품을 기획해서 고객사를 설득하고 오더를 끌어내는 것이 ODM이다. 우리 회사는 마스크팩 OEM 업체로는 최초로 2010년부터 ODM을 시작했고, 그 비중도 늘려나갔다. 그런 경험을 쌓아가다 보니 우리 직원들은 연구·개발·제조 부서가 머리를 맞대고 신제품을 고안해내는 데 도가 텄다.”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지 않나.
“ODM을 시작할 때부터 실무 일선에서 손을 뗐다. 제품을 직접 기획한 담당자가 고객사에 가서 브리핑을 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나는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 영업 사원 출신이다. 일하면서 가장 큰 원동력이 ‘계약서에 도장 찍는 짜릿한 성취감’이었다. 고생한 직원에게 그 성취감을 양보해야 하지 않겠나. 고객사 측 실무 담당자 입장에서도 내가 직접 영업에 나서면 부담스럽다. 대부분 20~30대 여성인데, 나이 차이가 마흔 살이 넘는 나와 어울리고 싶겠나. 공감대 형성이 안 되면 계약도 안 된다. 대신 고객사의 결정권자와 소통하며 막힌 데를 뚫는 서포터 역할을 맡았다. 라라츄 때도 똑같았다. 경영자로서 잘 아는 사안을 꼼꼼히 따져서 결재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잘 모르면 간섭하지 않고 그냥 결재해버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경영자들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계속 물어가면서 지식을 얻고, 그걸로 자기보다 잘 아는 직원을 리드한다. 그런 비효율성이 어디 있나.”

그렇게 출시된 헤어쿠션은 2018년 10월 출시 후 홈쇼핑 판매에서 20회 연속 완판을 이어갔다. 1여년간 홈쇼핑을 통해 기록한 매출은 235억원. OEM 체제에서는 마스크팩 750만 장을 생산해야 낼 수 있는 매출이었다. 씨엔에프의 매출액은 2018년 1593억원에서 지난해 2000억원을 돌파했다.

추 회장의 ‘과감한 도전’은 자체 브랜드 라라츄 출시뿐만이 아니었다. ‘품질 안정화를 위해선 직원의 근무 환경부터 안정돼야 한다’는 철학 아래 모든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2017년 6월에 129명이었던 정규직 직원을 2019년 6월에는 257명으로 2년 만에 두 배로 늘렸다. 일자리 창출 공로를 인정한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23일 추 회장에게 ‘은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올해부터 50인 이상 299인 이하 사업장에 확대 적용되는 ‘주 52시간 근무제’도 일찌감치 시행했다.

대부분 기업은 정규직 확대에 보수적이지 않나. 또 제조기업은 52시간제 도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몇 년 전 글로벌 화장품 유통사 ‘세포라’에서 우리 회사로 실사를 온 적이 있는데, ‘근로시간이 너무 길지 않냐. 졸면서 만드는 제품이 어떻게 품질이 유지되겠냐’고 꾸짖더라.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장들은 ‘근로시간을 조작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정공법을 택했다. 근로시간을 줄였더니 눈에 띄게 품질이 향상됐다. 내게는 ‘가장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욕심이 있다. 그러려면 직원의 근무 여건이 안정돼야 하고, 마음도 편안해야 하고, 회사를 아끼고 신뢰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 정규직 전환이었다. 품질에 대한 욕심이 직원 복지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진 셈이다.”

앞으로의 포부는.
“좋은 제품을 만들어보려다 고용노동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일단 그 상에 부끄럽지 않게 앞으로도 직원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출시 2년 차를 맞는 라라츄 브랜드는 일단 성공의 문턱까지는 넘은 것 같다. 헤어쿠션 같은 틈새상품에 머무르지 않고, 파운데이션·아이라이너 등 다양한 화장품 종류로 외연을 확장해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