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3월 27일 한진칼 사내이사 연임에 보란 듯이 성공하며 ‘남매의 난’에서 승기를 거머쥐었지만 활짝 웃지 못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항공 업계에 불어닥친 악재와 대한항공 실적 악화까지 그 앞에 놓인 과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비롯한 3자 연합이 장기전을 예고하고 있어 경영권 분쟁 2라운드도 대비해야 한다. 그에겐 승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다.
조 회장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재무 건전성을 개선하는 일이다. 대한항공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과 비교해 반 토막 났고 부채 비율은 900%에 육박한다. 여기에 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국제선 운항 노선은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대한항공 항공기 90% 이상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일각에서는 조 회장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 반도건설 등 3자 연합의 공세에도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기업의 존립이 걸린 중대 위기에 주주들이 현 경영진을 지지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3월 27일 열린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출석 주주 과반(56.67%)의 찬성으로 사내이사 연임에 성공했다. 애초 3자 연합이 공격적으로 지분을 매입한 데다 기관, 개인 등 캐스팅보트가 된 주주들의 표심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터라 그의 승리는 더욱더 극적이었다. 조 회장이 연임에 성공한 직후 한진칼 주가는 이틀 연속 가격 제한 폭까지 올랐다. 의결권 유효 지분 2.9%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 앞서 조 회장의 재선임 찬성 의사를 밝히면서 다른 기관 투자자와 외국인 등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조 회장은 3월 29일 담화문을 통해 “코로나19 위기의 파고를 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뼈를 깎는 자구 노력도 병행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4월부터 경영이 정상화할 때까지 부사장급 이상은 월 급여의 50%, 전무급은 40%, 상무급은 30%를 반납하기로 했다.
3자 연합, 장기전 예고…끝나지 않은 싸움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3자 연합이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주총회에선 조 회장 측 우호 지분이 더 많았지만 주주 명부 폐쇄일인 지난해 12월 26일 이후에도 3자 연합이 계속 지분을 사들여 3월 31일 기준, 3자 연합 측이 42.13%로 조 회장 측(41.4%)을 앞서고 있다. KCGI와 반도건설이 한진칼 지분율을 각각 18.57%, 14.95%까지 끌어올린 결과다.
재계에선 3자 연합이 올가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또다시 경영권 도전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임시 주주총회를 위해 법원의 허가를 받는 데 3개월, 이후 주주 명부 폐쇄 후 임시 주총을 소집하는 절차에 3개월쯤 걸리기 때문이다.
3자 연합은 한진칼 주총이 끝난 뒤 입장문을 통해 “기존 오너 중심의 경영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많은 주주의 열망과 한진그룹 변화를 바라는 국민 여러분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며 “한진그룹이 위기에서 벗어나 정상화 궤도에 올라설 수 있도록 계속 주주로서의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항공 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3자 연합은 한진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전문 경영인을 요구하고 있다. 조 회장 입장에서는 코로나19 위기를 잘 넘겨야 연임에 대한 명분을 쌓을 수 있다.
3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3자 연합이 낸 두 건의 가처분 소송(대한항공 자가보험과 사우회 등 지분 3.79%에 대한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 소송+반도건설의 한진칼 지분 의결권 행사 허용 가처분 소송)을 기각했다. 이에 3자 연합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나 이번 주총에서의 결과가 한진그룹 정상화 여부의 끝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음을 예고하기도 했다.
자금력이 있는 KCGI가 한진칼 지분을 계속 매입할 수 있다는 것이 변수다. KCGI 역시 한진 주식 60만 주를 처분해 151억원을 확보했다. 이 자금이 한진칼 지분 매입을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반도건설 역시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합심사 기준인 15%를 넘겨 한진칼 지분을 더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조 회장의 ‘백기사’로 통하는 델타항공이 추가적인 지분 매입에 나서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경영 환경이 좋지 않아 조 회장 측 우호 지분이 얼마나 유지될지 확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