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크리스티앙 루부탱
사진 크리스티앙 루부탱

“흑인이 ‘보그’ 직원이 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인종차별(BLM·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확산한 6월 6일(현지시각) 미국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70)는 직원들에게 사과문을 보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편집장 ‘미란다’의 실제 인물로 유명한 그는 “‘보그’가 흑인 창작자에게 재능을 펼칠 충분한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라며 “상처를 주고 편협한 이미지나 이야기를 출판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 실수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라고 사과했다.

32년간 미국 ‘보그’를 이끌며 세계 패션계를 통치해 온 ‘패션계 악마’ 애나 윈터가 꼬리를 내린 이유는 반인종차별 운동에 반하는 일을 일삼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를 부추기고, 이를 어긴 직원을 떠나게 했다는 이유로 회사 내외부에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반인종차별 운동이 패션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기업에 이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퍼지면서다. 패션계에선 ‘앞으로 흑인과 연대하지 않으면 장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대 스포츠 의류·용품 브랜드 나이키는 사건이 벌어진 지 닷새 만인 5월 31일 자사 SNS에서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시작했다. 자사의 대표 슬로건인 ‘Just Do it(그냥 해)’을 변형한 ‘For Once, Don’t Do It(이번 한 번만은, 하지 마)’이라는 문구로 ‘인종차별에 침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한 한편, 미국 흑인 단체에 향후 4년간 4000만달러(약 481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경쟁사인 아디다스도 자사 트위터에 나이키 캠페인을 리트윗하며 동참했다. 또 미국 내 흑인 채용을 늘리고 흑인 사회에 2000만달러(약 240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언더아머와 파타고니아를 비롯해 구찌, 루이비통, 마이클코어스 등 명품 브랜드도 공식 SNS를 통해 ‘인종차별을 끝내자’는 목소리를 냈다.

흑인을 앞세운 전략으로 주목받은 곳도 있다. 미국 패션 브랜드 캘빈클라인은 뉴욕 맨해튼 거리에 통통한 몸매의 흑인 트랜스젠더를 모델로 한 옥외광고를 걸어 찬사받았고, 미국 의류 업체 갭은 흑인 래퍼 칸예 웨스트와 10년간 계약하고 ‘이지갭(YZY)’ 라인을 출시한다고 밝힌 후 주가가 상승했다.


1 크리스티앙 루부탱은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을 반영한 ‘누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크리스티앙 루부탱 / 2 ‘For Once, Don’t Do It(이번 한 번만은, 하지 마)’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나이키 등 다양한 브랜드가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 나이키 유튜브·아디다스 인스타그램·마이클코어스 인스타그램 / 3 흑인 트랜스젠더를 모델로 세운 캘빈클라인의 프라이드 캠페인. 사진 캘빈클라인 / 4 ‘정글에서 가장 쿨한 원숭이’라고 쓰인 H&M 옷을 입은 흑인 소년. 사진 H&M / 5 왼쪽부터 흑인의 얼굴을 형상화한 구찌의 스웨터와 프라다의 액세서리. 사진 구찌·프라다
1 크리스티앙 루부탱은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을 반영한 ‘누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크리스티앙 루부탱
2 ‘For Once, Don’t Do It(이번 한 번만은, 하지 마)’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나이키 등 다양한 브랜드가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 나이키 유튜브·아디다스 인스타그램·마이클코어스 인스타그램
3 흑인 트랜스젠더를 모델로 세운 캘빈클라인의 프라이드 캠페인. 사진 캘빈클라인
4 ‘정글에서 가장 쿨한 원숭이’라고 쓰인 H&M 옷을 입은 흑인 소년. 사진 H&M
5 왼쪽부터 흑인의 얼굴을 형상화한 구찌의 스웨터와 프라다의 액세서리. 사진 구찌·프라다

인종주의에 맞서는 패션 기업들

패션 업계에선 인종차별 논란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스웨덴 패스트 패션 브랜드 H&M은 흑인 소년을 모델로 한 화보에 ‘정글에서 가장 쿨한 원숭이’라고 쓰인 옷을 입혀 비난받았고, 구찌는 흑인 얼굴을 묘사한 스웨터를 출시했다가 혼쭐이 난 후 500만달러(약 60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북미 지역 유색인종 청년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일본 패션 브랜드 꼼데가르송이 2020 가을·겨울 남성복 패션쇼에서 백인 모델의 머리에 콘로(cornrow) 가발을 씌워 문제가 됐다. 콘로는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으로 촘촘하게 땋은 흑인의 헤어스타일이다.

하지만 이번 반인종차별 운동을 계기로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기업의 관심은 더 세밀해질 것으로 보인다. SNS를 통해 목소리를 높이는 MZ 세대(1980년부터 2004년 출생자)가 더욱 강력한 변화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젊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요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글로벌 홍보 회사 에델만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는 인종차별 시위에 대한 기업의 입장을 보고 구매나 불매를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페이스북이 폭력을 조장하는 듯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게시물을 내버려 뒀다는 이유로 기업들의 ‘광고 불매운동’의 타깃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코카콜라·스타벅스·유니레버 등 200여 개 가까운 사업체가 보이콧에 동참하면서 6월 26일 페이스북 주가는 8.3% 급락해 시가 총액 560억달러(67조2000억원)가 증발했다.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선 패션 산업의 시스템 문제를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애나 윈터가 시인했듯 패션계 주요 요직에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기용하지 않아 불평등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명품 업계만 해도 디자인을 총괄하는 예술감독(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흑인은 루이비통 남성복 부문의 버질 아블로와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유일하다. 세계 패션계에서 흑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색인종은 저임금 일자리에 배치된다. 영국 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전 세계 섬유 노동자 7700만 명 중 80%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여성이다.

김은영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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