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강용현 변호사, 황용현 변호사, 윤정노 변호사가 4월 19일 오전 서울 공평동에 있는 법무법인 태평양 서울사무소에서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왼쪽부터 강용현 변호사, 황용현 변호사, 윤정노 변호사가 4월 19일 오전 서울 공평동에 있는 법무법인 태평양 서울사무소에서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통상 버스에 탑승한 승객들은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앞쪽을 응시하게 된다. 자리가 부족할 경우 손잡이를 잡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는 지체 장애 1급 A씨에게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휠체어 전용공간의 위치 때문에 정면을 응시하는 다른 승객들과 달리 그는 측면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한다. 또 전용공간이 턱없이 좁은 탓에 방향조차 마음대로 틀지 못한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A씨는 지난 2016년 “김포운수주식회사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했다”며 위자료 및 적극적 시정명령 조치 청구를 제기했다. 이후 5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A씨는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그의 뒤엔 ‘무료 변론’을 진행한 법무법인 태평양이 있었다. 반면 김포운수를 대리한 법무법인 광장은 역전패의 쓴맛을 봤다.


‘무료 변론’ 대리한 태평양

김포운수의 버스는 김포 신도시와 서울 시내를 오가는 광역버스다. 2015년 하반기 운행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장애인 택시, 환승이 잦은 지하철 등으로 불편을 겪어온 휠체어 탑승 장애인들은 버스 도입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막상 버스에 타보자 장애인들은 난감해했다. 버스 내부가 휠체어 탑승 장애인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설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휠체어 전용공간이 교통약자법이 지정한 길이 1.3m, 폭 0.75m보다 좁아 버스 뒷문을 바라본 상태로 고정돼야 했다. 방향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휠체어 전용공간이 일반 좌석 바로 앞에 마련돼 있는 점도 이들을 불쾌하게 했다.

A씨는 김포운수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1심에서 A씨를 대리했던 경기장애우권익연구소는 법무법인 태평양을 찾아갔다. 이에 태평양이 항소심을 맡았다. 프로보노(Pro Bono·변호사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공하는 무료 법률서비스) 차원에서 대리했던 만큼 수임료는 받지 않았다. 태평양이 투입되자 재판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항소심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김포운수에 휠체어 전용공간 확보 의무가 있는지 여부였다. 의무가 없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요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광장은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김포운수의 버스가 저상형(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에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바닥이 낮고 출입구에 경사판을 설치한 버스)이 아니기 때문에 휠체어 전용공간 확보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태평양은 교통약자법 시행규칙이 저상형 등 특정 버스 종류가 아닌 ‘휠체어 승강 설비가 설치된 버스’에 설치 의무를 부과한 점을 강조했다. 태평양은 실제 김포운수 버스에 휠체어 탑승을 돕는 수동식 경사로가 있다는 점을 제시해 근거를 마련했다.

특히 태평양이 요청한 ‘현장검증’이 결정적인 승소 요인이 됐다. 재판부와 양측 대리인 모두 김포에 있는 김포운수 차고지를 방문했다. 당시 서울고법 민사26부의 주심 판사였던 서경환 판사는 직접 해당 버스에 승차해 저상버스가 맞는지, 현 상태에서 휠체어 탑승자가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지, 일반 승객의 통행을 방해하는 등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결과는 태평양과 A씨의 역전승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김포운수가 A씨에게 위자료 3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또 해당 버스에 휠체어 탑승자를 위한 전용공간을 시행령 기준에 맞게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 버스에 휠체어 탑승자를 위한 전용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최소한의 조치로 보인다”라며 “휠체어 전용공간을 확보하지 않은 행위가 차별 행위가 아니라는 피고 측의 주장은 모두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재판부는 또 “휠체어 탑승자의 모습이 일반 승객의 정면 시선에 위치하게 되는 건 장애인으로서 상당한 모멸감, 불쾌감 또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며 “이는 모든 생활 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주심 이기택 대법관) 역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이 장애인 이동권 관련 적극적 구조조치를 받아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만 “피고에게 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 위반에 관해 고의 또는 과실이 없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위자료 부분은 파기했다.


태평양 “제도 개선에 더욱 힘쓸 것”

이번 사건에서 승소를 끌어낸 태평양 변호사 모두 장애인 권익, 사회적 약자 관련 소송 분야의 ‘베테랑’으로 통한다

강용현(사법연수원 10기) 변호사의 경우 전 업무 집행대표 변호사이자 태평양이 설립한 공익재단법인인 동천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정노(사법연수원 36기) 변호사는 이번 소송뿐 아니라 휠체어 리프트 철거 소송을 대리하는 등 장애인 이동권 관련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황용현(사법연수원 44기) 변호사는 장애인의 경제적 착취 관련 형법 친족상도례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을 진행 중이며, 권영실(변호사시험 6회) 변호사 역시 재단법인 동천 상근 변호사로 근무하며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사건을 대리한 강 변호사는 “태평양과 동천의 담당 변호사들 모두가 힘을 모아 수고한 결과”라며 “앞으로도 태평양과 동천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의미 있는 활동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윤 변호사는 소송 과정에서 재판부의 현장검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재판부 입장에서 현장 검증이 굉장히 귀찮게 느껴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흔쾌히 검증 요청을 받아들였고 결국 승소했다”며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과 의지를 보인 재판부를 만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매우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황 변호사 역시 “장애인 권익 관련한 상징적인 사건에서 승소해 기쁘다”며 “앞으로도 장애인 권익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 제도 개선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례를 발굴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한편, 태평양과 재단법인 동천은 장애인 관련 사건뿐 아니라 난민, 이주 외국인, 탈북민, 여성·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공익법률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태평양에 따르면 지난해 태평양 소속 변호사 454명 중 313명(68.94%)이 공익 활동에 참여했다.

강현수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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